... 그러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만이,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
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만이 어떤 공화국도 감히 말할 수 없
었던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
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
스럽게 보호하는 삭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
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
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
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784년 9월 30일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I. Kant.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중 마지막 부분.
인간이라면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지녀야하고, 이는 사유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포괄하는 인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군주는 마땅히 이 자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일 군주가 그의 힘으로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있어서, 그로 인하여 이성의 공적 사용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 군주는 시민의 이름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그러니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나에게는 이 말이 자신의 에고를 알처럼 깨고 나와서 지성의 사용을 날개삼아 이성의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라는 말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