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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8일 금요일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지난 겨울날들 중 어느 날에 좋은 일이 있었던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떠오르는 추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겨울만 되면 가슴이 뛰는 걸까?
  겨울이 언제 시작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다. 몇월의 몇일날 바로 겨울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나의 설렘은 정확히 어느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음을 알게 되고, 겨울이 왔음을 실감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은 겨울에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를 넘은 탓이다. 그덕에 좋은 일은 없었다. 늘 마음 졸이고 잘못을 되새겼던 기억들만...
  내가 느끼는 겨울은 노래로 치면 이렇다. 차분해보이는 것은 단지 겨울의 겉모습이고,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위험하게 흔들흔들거린다. 나대지 좀 말지.....
  그래도 나는 겨울이 좋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만큼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좋다, 그만큼 행복한 날들은 또 없다. 잘못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흥분이 눈처럼 녹아내린 봄날의 내가 할 것이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낮밤이 바뀌어버렸다

  어제부터 낮에 자고 새벽이 일어나있다. 크 머리아파. 컨디션도 별로라 글을 쓸 마음도 안생기고....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네트 상에서의 감정 소모

  가 부쩍 심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누군가가 무엇을 하나 잘못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은 다음 기어코 숨통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세상이 각박해지다보니 그런걸까, 조그만 것에도 화를 내는 사람들과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에 숨어 남을 헐뜯는 그들의 태도가 부쩍 자주 보인다. 논리적인 이성보다 한껏 격양된 자기 감정이 우선이다 보니 말과 글이 폭력적이고 분별이 없다.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다른 시야가 트일텐데 그거마저 귀찮아 하는 건지....

  사람들이 갈수록 사실정보를 얻는 정성을 무시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긴 글이 나오면 스크롤을 쭉 내리고는 댓글로 3줄 요약을 요구하며, 프로그램 한 편을 다 보기 보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플래시를 챙겨본다. 당연히 짧고 얕게 보고 들을 수록 정확한 사실정보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난다. 오해와 왜곡은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잠잠해진다.

  또 사람들은 공인에 대해 편파적인 시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범법행위를 몇 번씩 저질러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숨을 죽여야 한다. 자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쇼 오락의 겉다리나 만지작 하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으면 서럽다.

  꽁치 통조림 하나 잘못 썼다고 모든 잘못을 독박쓰는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서 쓰는 글. 그러나 나도 그 사람을 셰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곽정은의 발언이 불편한 이유

  곽정은이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내용은 대충 택시를 타고 일하러 가는데, 택시기사가 '이랗게 예쁜 공주님들도 일을 하러 가느냐'라고 말한 것에 불쾌함을 느끼고 택시에서 내렸다는 것. 뒤이어 왜 택시기사의 말이 불쾌했는지 짤막한 이유도 적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과 예쁜 여자가 왜 일을 하느냐는 전제, 그리고 공주라고 지칭하며 미성숙한 애 취급을 하는 일련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꼈다 - 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곽정은의 말이 불편하다. 이유는 이러하다.

  1. 택시기사가 한 발언은 그냥 칭찬으로 건넨 말인게 뻔한데 그것을 굳이 꼬아서 해석한 것.
  2. 곽정은 자신이 했던 지난 날의 발언과는 그 행동이 모순된 것.
  3. 마지막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이해시켜줄 이유가 없다.'라고 일축해버린 것.

  우선 1번부터. 택시기사가 건넨 말은 어딜봐도 칭찬이다. 곽정은 본인도 그 말이 칭찬임을 알 것이다. 택시기사가 힘 준 단어는 역시 '예쁜 공주님'일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예쁘다고 칭찬을 한 것이다. 헌데 그것에 대해 '외모에 대한 평가 섞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곽정은은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라고 했는데, '평가'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단어를 부러 불쾌한 의미의 것으로 바꾸어 썼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판단까지 불쾌한 의미의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곽정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고 오 예쁘네, 잘생겼네, 라고 말한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타인의 외모에 대한 불쾌한 평가인가?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받아들이는 말을 어거지로 불쾌한 의미로 바꾸면 본인의 삶 역시 언행불일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공주'라는 말에 미성숙한 애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공주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들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공주님 소리가 전부인 모양이지만, 사실 공주는 그냥 어떤 위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나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때문에 '미성숙한 애'의 나이를 훌쩍 넘은 공주들도 많다. 또한 택시기사가 딱 봐도 어른인 사람에게 애 취급할 목적으로 '공주'라는 말을 썼을리도 없으며, 에X드 하우스만 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공주소리인 만큼 그 대상이 '미성숙한 애'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쁜 여자가 일을 하러 가느냐, 라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긴 사람만 일을 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

  2번에서 서술할 내용은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다. 다만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2번의 예시는 그 유명한 장기하와 침대 발언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곽정은이 모 프로그램에서 장기하에게 '저 남자는 침대에서는 어떨까?'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럴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사람이니 만큼, 은어에 관련해서는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고, '침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둘이 이야기를 잘 마쳤다고는 해도 이미 전파를 타고 각 가정에 나가버린 이상, 그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곽정은은 단호히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라며 그 이유에 대해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나는 본인의 벌언에는 관대하고 타인인 택시기사의 발언에는 엄격한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예전에 잘못을 했더라도 지금 타인의 행동에 불쾌를 느끼고 따질 수 있다. 허나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겠는가?

  3번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곽정은은 트윗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개중에는 나름 적절하게 비판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마 대부분은 화를 참지 못한 욕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가 피곤해져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라며 일축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적어도 적절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까지 싸그리 묶어 '수준'을 운운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 상세하게 자신이 불쾌를 느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도, 더 설득력있게 글을 쓰지도 않았다.

  최근의 트윗을 보니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곽정은이 리트윗한 최지은이라는 분의 트윗은 '여성이 불쾌를 겪은 일에 유별나다며 비웃는 것은 보다 많은 여성이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올바른 생각이고, 무엇이 유별난 생각인지부터 판단할 줄 알아야....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입국금지에 대한 생각 정리

  국가가 개인을 입국 금지 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입국 금지는 개인의 자유를 금지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다.

- 그러나 개인이 본인의 자유를 담보로 타국의 시민권을 따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 만일 개인이 입국 금지를 당할 것을 모르고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국적 선택은 누구든지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이다. 누구든지 본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물론 개인에게는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병대 홍보 대사나 이미지 소모로 인해 이득을 번 행위 등,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또한 입국금지 같은 처벌이 당사자의 예측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처벌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법을 수호하며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사안이다. 모든 사건에 공소시효가 있으면서 군입대 거부에만 공소시효가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 아니, 애초에 입국금지는 헌법에 명시된 처벌 방법이 아니다.


- 국적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더라도, 국적을 선택한 것은 개인이고, 그로 인한 책임과 부담을 고려했어야 함. 다만 계속되는 입국금지는 군입대 거부 전 벌어놓은 이미지나 돈을 생각하더라도 과중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더군다나 국내에만 군비리를 저지른 높은 분들이 수두룩한 판에, 군입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금지를 시키는 것은 진정성의 여지가 의심될 우려가 있다. 입국금지는 그만하되, 개인이 입국할 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빌어야 함.

- 무슨 소리인지....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뒤늦은 잔혹동시 논란에 대한 소고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보는 시리즈 도서가 있다. 바로 <한니발>. <양들의 침묵>부터 시작해서(중간에 <레드 드래곤>이 있지만 읽어보질 못했다. 아쉽.) <한니발 라이징>까지 쓰여진 시리즈는 꽉 짜여진 긴장감과 강한 흡입력으로 몇 번을 읽어도 언제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 즈음에 즐겨 읽었다. 한니발 시리즈를 읽은 후에는 왜인지 이전에 읽었던 큰 글씨가 따박따박 박힌 책들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일부러 읽기 쉬운 도서들보다는 어려운 책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허나 그럴때마다 같이 간 어른이 늘 나를 말렸다. 그런 책들은 나이가 좀 더 든 다음에 보라는 말도 덧붙여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의문스러웠다. '왜 어리다고 어려운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거지?'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넌 아직 어리니까'였다. 이 무슨 궤변인지.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11039461&code=940100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시간도 많으니 폐쇄성에 대해 글을 하나 더

  현재 스르륵 회원들이 오유로 유입 중이고, 여성시대(이하 여시) 카페를 저작권 위반과 개인정보 수집으로 방통위에 신고한 상태이다. 일단은 여시 내에서 빈번하게 저작권이 위반된 적은 사실이고(사실 대형 사이트들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기는 한다.) 개인정보 수집 역시 여시와 탑시 가입 특성상 위법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개인정보 수집의 경우에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암튼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사방이 적인 여시가 이제는 같은 여초 특성을 가진 쭉빵에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조작글이 자기네 사이트에서 먼저 제기된 것 때문인지 쭉빵에서도 이번 일에 민감한 듯하다. 현재는 쭉빵이 거의 여시에 넘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다면 여시는 어떤 얘기로 쭉빵을 꼬드겼는가. 바로 그동안 그들이 지겹도록 얘기했을 '여혐' 사상이다. 오유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이 여혐사상을 갖고 여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내부균열을 막고 회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여시 운영진의 대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방법은 꽤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써먹은 방법이 바로 대륙진출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쟁기간만큼은 일본 무사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히틀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적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내부에서 토의하고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내부에서의 해결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는 모 국가가 떠오른다.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 일본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독일과 모 국가 세 나라 모두 폐쇄성을 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위 예시들에서 폐쇄적일 수록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이 더 자주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로 나열한 국가들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거나, 실패한거나 다름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모 국가는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모기 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니. 여시 역시 다음주 내로 부작용의 여파를 크게 맞으리라 예상한다.

  추가로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한국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의 그것보다 비중있고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차별적인 시각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의 허리를 감싸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허리를 감으면 '좋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에게 썩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문제가 남성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녀차별은 신체적 차이로부터 나온다. 성희롱부터 폭행, 강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범죄들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여기서 힘은 사회적 지위가 일수도 있지만, 원초적인 신체적 힘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그러므로 여성 차별 문제에 더 민감해진다. 당장 범죄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희생자들 중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여성이 제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이 역시 기본은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가 여성문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스르륵 회원들이 신고하니까 이제야 사과문을 올린 여시. 스르륵한테만.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니니....

여시 관련 + 오유

  계속해서 사건이 커지고 있는 여성시대 카페 조작글 사태는 결국 여시쪽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올리지 않고 끝날 공산이 크다. 아직까지도 운영진이 상황을 부정하는 데다가 회원들마저 운영진의 태도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성이 부른 타 사이트들과의 불통이다. 가끔 불통이 고소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여시에서 하는 악담이 특정 인물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것이라 고소는 불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전에 특정 연예인을 두고 희희낙락한 것은 해당 연예인이 성희롱으로 고소할 수도 있을듯.)

  여시 조작 사태는 카페 일부 회원들의 소행이고 그 회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작과 물타기를 방관한 타 회원들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해당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바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작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작한 자료를 섣부르게 지지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조작과 선동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시가 워낙 폐쇄적이고, 대세인 주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찍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허나 여시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많은 여성 유저들이 그러했듯이 체제가 마음에 안들면 개인이 나오면 되는 일이다.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재밌는 유머들이 많아서 불만을 참고 활동하는 건 암묵적으로 사이트에 동의한 것이다. 간혹 아웃팅한 일베인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사실 일베가 유용한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있다. 나는 눈팅만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사람은 순수한 유저구나'라고 생각할 여시 회원들이 얼마나 될지.

  + SLR(이하 스르륵)에서 여시를 위해 따로 비밀방(탑씨)을 만들어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르륵회원들이 분노했다. 비밀방이 기존 스르륵 사이트 게시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글 올리기 좋았기 때문. 화가 난 회원들은 스르륵을 떠나 오유에 입성했다. 그래서 지금 오유는 스르륵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글이 많이 올라오는 중이며, 기존 오유 회원들도 유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과거 여성시대 영리화 사태때에도 열받은 여시 회원들 중 많은 수가 오유로 옮겨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오유는 새 회원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후 오유는 페미나치적인 성 관념을 주장하는 게시글/댓글이 늘어나면서 보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스르륵 회원들이 대거 유입되는 지금, 오유는 여시때와는 또 다른 문제점을 떠안을 수도 있다.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사람을 방에 혼자 가두면 미쳐버리지만

  여러명을 가두면 어떨까? 우선 가두어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서로 아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방법을 고민한다. 잠시동안은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편이 갈리고, 다른 쪽의 의견은 무시한 채 귀를 막으며 지내게 된다. 타의에 의한 폐쇄성이 자의에서 피어나는 과정이다.

  폐쇄성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흘러가야 하듯이, 집단도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립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안에서 그네들만의 잔치가 열린다.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자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점차 극단적인 성격을 띄어간다.

  허나 동시에 폐쇄성은 허울일 뿐이다. 내부에서 일삼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 울타리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외부로 넘어가는 순간, 비밀스레 나누던 파시즘이 들통나고 사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하던 이야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대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얼마전 팟캐스트 방송 내용으로 문제가 된 옹달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그 누구보다 비난했던 '여성시대'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매장 운동까지 했던 대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폐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피해를 끼친 이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할 일이 아닌지.

2015년 5월 2일 토요일

우리들이 돈을 내고 소비하는 것

  나는 선물을 구매할 때 '프리미엄'이 붙어있으면 못사고는 못배길 정도로 (심각한)구매욕을 느낀다. 내가 구매욕을 느끼는 프리미엄들은 유니크한 디자인이나 선물을 구매할 시 유니세프에 기부금이 전달된다는 것 등등 여럿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이 '한정판'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구매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정판이라고 하면 왜인지 더 멋져 보이고, 더 쓸모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리셀까지 고려하면서 구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프리미엄이란 것은 무시무시한 나름의 광고효과를 낸다.

  얼마 전 들었던 '안나 와인오프너'의 이야기도 프리미엄의 한 종류에 관한 것이다. 이 와인오프너에 얽힌 이야기는 소비자의 구매욕을 증가시킨다. 제작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소비자들은 혹시라도 내일, 아니 다음주나, 언젠가는 쓸일이 있겠지, 혹은 장식용으로 둘 목적으로 해당 물품을 구매한다. '안나 와인오프너'가 얽힌 이야기 하나 없는, 그저 귀여운 디자인의 오프너였다면 이만큼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프너 너머에 있는 제작자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보고 돈을 지불한 것이다.

  조금 다른 예시이긴 하지만, 열기가 좀 식긴 했어도 아직 열풍을 몰고다니는 '허니버터칩'도 이와 흡사한 판매방식을 보인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허니버터칩의 맛은 특출나지 않다. 팬에 버터를 녹여 얇게 썬 감자를 튀기고 꿀을 넣어 조린, 딱 그맛이다. 처음 출시될 당시에는 생소한 맛이었겠지만 이제는 각종 '허니버터'가 난무하며 꿀벌이 고통받는 상황일 정도로 흔한 맛이 되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허니버터칩은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것일까? 답은 과자의 '희귀성'에 있다. 제품을 만든 회사는 현명하게도, 생산 라인을 많이 늘리지 않고 적은 수량으로 제품을 파는 방식을 택했다. 그럼으로써 허니버터칩은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려고 찾아보니 없는' 상품이 되었다. 프리미엄이 붙은 허니버터칩은 광풍을 몰고 다녔다.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것'에 현혹되고는 하는데, 적당히 높은 수준의 질을 가진 운동화나 옷, 화장품 등에 보다 높은 가격이 적용되면 과시용으로라도 구매하려 하는 것이나, 도저히 재고량이 늘어나지 않는 에어조던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구매자들이 그 예다. 

  이처럼 사람들이 돈을 주고 소비하는 것은 해당 상품의 질이나 디자인 뿐만 아니라, 그것에 얽힌 이야기나 화제 등의 프리미엄도 있다. 안나 와인오프너를 사면 오프너 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사랑 이야기 또한 구매하는 것이고, 허니버터칩은 과자와 질소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과 의식을 먹어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프리미엄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써 프리미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최대한으로 마케팅 수단을 분석하여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이 지갑의 돈을 지키는 좋은 길일 것이다. 마무리가 어설프지만 안녕~ 

2015년 4월 30일 목요일

허지웅이 글 쓰는 방식에 대해서

  그냥 생각난건데, 허지웅의 글을 보고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 특히 트윗글. 하긴 책들이야 몇 번 감수를 거치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일기 쉽지만, 생각나는 대로 바로 글로 쓰는 게 특징인 트위터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면 쉽게 쓸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어느샌가 다른 잡생각들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가 생각했던 주제를 멀리 보내버리고는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글을 못쓴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쓰는 것이 주제에 알맞은 글을 쓰기가 쉽다.

  그리고 또 하나. 이해하기 쉽게 적어놓으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어느샌가 인터넷 곳곳에 퍼져있고, 이걸로 의견이 분분해진다. 특히나 현 세태나 누군가를 염두하고 쓴 글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이렇게 어어, 하다가 싸운건 네티즌인데 최종적으로 피해보는 건 글을 쓴 본인이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렵게 써서 소수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허지웅은 한 과오에 비해 뭇 남성들의 질타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과거에 한 일이 철딱서니가 없는 행동이었기로서니... 그리고 남도 아니고 본인 트위터에 본인이 글을 쓰는데, 트윗을 읽는 사람들을 반드시 배려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배려하건 말건 그건 허지웅 본인 마음.

2015년 4월 29일 수요일

기성세대의 시각 뻘소리

  20대들이면 지겹게 듣는 말들 중 하나가, '너는 왜 안 그러니?'라는 말이다. 너는 왜 토익 준비를 안하니, 취업을 안하니, 왜 그러니 등등, 뇌에서 말하기 조정 역할을 담당하는 기성세대의 브로카 영역에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구비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비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요즘 거슬리는 말이 '왜 20대들은 나가서 현실에 대항하지 않나요?'이다.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벙어리인 사람들은 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로 들린다. 재밌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꼰대'질을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꼰대질을 혐호하면서 꼰대질을 한다니... 이 무슨 모순.

  자, 그들이 (이미 난도질당해서 너덜너덜한)김난도 교수를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따진다. 당신이 요즘 20대들의 사정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돌아서서 20대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런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느냐고. 개탄스럽지 당연히. 그럼 왜 나가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무슨 수로 싸워..

  20대들의 사고방식은 지배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뿌리 깊은 암기 교육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대학생이 되니, 혹은 취직을 하니 왠지 화가 나고 억울하다. 교과서 속 세계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따지려고 하니 막상 학점이 걱정이고, 월급이 걱정이다. 학점을 받아야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 카드 대금을 내거나 월세를 내거나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일은 대부분 암담하다. 싸웠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더라도 반짝,일뿐이다. 대중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20대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20대이기 때문에 분노를,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3,40대들도 안싸웠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엉.

  결국 누가 안싸운다고 화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솔직히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빠지는 추세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윗에게 힘을.

 
  내가 이런 글을 왜 쓰냐고? 재보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뻘소리

  1. 최근 연이어 불거지고 있는 연예계 문제 이야기

  2. 휴학생은 알바를 하지 않으면 할 것이 컴퓨터 뿐이다. 물론 알바를 한다고 해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튼 오늘도 네트 상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티아라의 팬이 하소연하는 글을 보았다. 아직도 여전히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까이고 있다는 하소연. 음, 그럼 이쯤에서 그만 용서해줘야 하나? 그런데 누가 누굴 용서해주지?

  3. 티아라 사건(?)의 주 대상은 탈퇴한 멤버와 현 몇 멤버들이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문제는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은 당연. 내가 친구와 싸웠다고 해서 남이 화해를 시켜주지는 않듯이. 전 멤버와 현 멤버가 화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 두 대상에 끼어들어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은지? 이전에 장동민 글에도 썼었으나, 그런 사람들은 요상하게도 자신이 정의의 편인 것처럼 생각한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건당위를 정확히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지을 수 있는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4. 그런데 한편으로는 맞는 행동인 것도 같다. 아니, 잘못을 한 사람이 사회에 떳떳하게 나와서 잘만 사는 게 말이 돼? 안된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동화로 배워온 권선징악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이것은 유치원생도 안다. 그런데 권선징악은 헌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다. 법률, 규칙, 제도 모두 권선징악을 해야 한다고 정해놓지는 않았다.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이다. 누군가가 (법에 어긋나지는 않는 일상적 형태의)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못되보이고, 미워진다. 권선징악은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대부분 비슷하므로 못된 행동과 착한 행동을 가릴 줄 알고, 또한 그것에 공감하거나 혐오를 느낄 줄도 안다.

  5. 자,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벌을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법률에는 없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티아라 팬은 하소연을 한다. '당신들 언제까지 미워해야 직성이 풀릴 겁니까?' 그리고 대중의 대답은 '잘못해놓고는 무슨 선처를 바람? 노어이' 티아라 팬은 권선징악의 기간을 보다 짧게, 대중은 보다 길게 생각하는 탓에 이런 괴리가 생긴다. 허나 여기서 대중이 팬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생각하는 기간과 (대중의)처벌이 다를 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사실 처벌이란 말을 쓰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마땅히 다른 말이 안떠올라서 그냥 쓰도록 한다(..)

  6. 그럼 문제를 일으킨 연예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냥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 좋아하려면 좋아하고, 싫어하려면 싫어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남에게 화를 내거나 비웃는 것은 옳지 않다. 서로 성격이나 기호가 다른 문제일 뿐이다.

  7. 그렇지만 자숙을 하지 않은 연예인은? ...자숙은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대중의 피(..)를 먹고 산다. 대중의 사랑, 대중의 돈, 하다못해 연관검색어 순위에 오른다면, 그건 인터넷을 쳐하고 사는 나와 같은 잉여들의 덕이다. 대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대중과는 거래관계에 있다. 즐거움을 팔고 돈을 얻는다. 만일 거래상대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면 사과해야 맞는 일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바이어의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법이다. 시용을 회복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안좋은 말들을 듣게 되는 법이다. 거래 상대에게 예의는 지킵시다. 우리도 지킬 터이니.

  8. 그래서 양현석의 '아티스트는 크리에이티브 해야 한다'라는 소리가 우습다. 아니, 그리에이티브 한 거랑 사과하고 자숙하는 것이랑 무슨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 자숙하면 덜 크리에이티브하게 되는지..? 아니면 사과를 크리에이티브하게 하겠다는 뜻인지, 참...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15년 18일 광화문 시위와 진압

  1. 15년 4월 18일, 광화문에서 시위가 열렸다. 나는 갤러리에 가기 위해 그 현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내가 광화문을 지난것이 오후 1시 즈음이었다. 당시 세월호 유가족을 포함한 시위자들이 경복궁 정문 앞에 백여명 좀 안되게 있었고, 건너편 광화문에도 시위자들이 10명 남짓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 인도를 따라 경찰버스가 죽 길을 막고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시위자들이 경복궁 쪽으로 건너가 합류하려 하자, 이를 경찰들이 막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합류를 막기 위해 버스를 줄지어 세운 것으로 보였다. 그덕에 나를 포함한 시민들은 길을 건너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2. 고작 백여명 남짓한 시위자들을 막자고 그 거대한 버스를 한두대도 아니고, 몇대씩이나 동원하여 길을 틀어막아햐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후 있을 시행법 반대와 세월호 인양 시위에서 교통불편을 해소하고,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취를 취한다고 한 것이지만, 글쎄. 이후 사건을 살펴보니 시위자들이 만명 가까이 모인 듯 했고, 경찰과 경찰버스는 그의 몇배나 되는 인원이 모였다. 교통은 물론이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는 마당에 시민안전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않나.

  3. 누군가는 이 시위를 보고 '변질'되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애초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엄숙한 세월호 추모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항의하려고 모인 것이다.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목적이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시위를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애당초 세월호 침몰 후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유가족들의 순수한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한 쪽이 어느쪽인지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순수를 더럽혔는가? 또한 순수의 개념과 범위가 너무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시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변질된 시위인가.

  4. 그리고 그 사람 말마따나 시위가 조용해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3번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이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인원을 대거 모으지도 않고, 경찰과 대치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은 채 한동안 얌전히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정부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나 했는지. 오히려 종북 빨갱이라며 특례입학 및 배상금 루머를 퍼뜨린 것은, 정부와 친한 언론 및 지지자들이 아니었나. 그럼 그 때 그 루머에 맞서 정부가 제대로 된 사실관계를 밝혀주기라도 했는가. 한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대놓고 빨갱이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얌전히 있어봐야 나아지지 않으며,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시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사실이다.

  5. 누군가는 순수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민주사회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소수의 인원이 아닌 다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다수가 순수하게 한 맥락의 말을 가지고 한 가지의 뜻과 의견으로 모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가 불가능하다. 이는 왕권군주제에서는 가능하다. 왕 하나의 의견으로 끝을 보면 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애초에 순수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순수는 민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이다.

  6. 이전까지 나는 시위와 진압에 대해 긴가민가 했었다. 시위자들의 말도 맞는 것 같고, 경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도 있었고,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다시말해 꿈틀하려면 먼저 밟혀야 한다. 이 경우 분명 사건제공의 원인은 밟은 쪽이다. 누가 먼저 상대를 밟았는지, 과도한 행동을 취했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확신했다. 이번은 명백히 경찰이 밟은 쪽이었다. 강물을 우물에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반드시 새어나오게 마련이고, 경찰은 새어나오면서 터지는 시위대의 감정적 행위를 유도했다.

  7. 개중에 태극기를 태운 시위자가 있다고 한다. 유가족은 아니고, 시위꾼인 것으로 아는데,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와 별개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냐 묻는다면, 그것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호와 불호로 나눌 문제이지, 올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으로써 이루어진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다. 국민은 국가의 부모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거슬렀을때, 국민이 이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한 방법이 태극기를 불로 태운 것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를 태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므로.

  8. 그러나 의경버스를 털어간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시위를 하러 왔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9. 의경이 미워서, 경찰이 미워서 그들에게 화를 푸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가족과 시위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경찰보다는 정부쪽이다. 정부는 이 전 대통령 이래로 같은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의경과 경찰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푸는 것은 감정과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이다. 소모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게 되면 포기하기에 이른다.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네트 상에서의 조직화와 네티즌의 암

  1. 네트 상에서는 조직화가 오프라인보다 훨씬 쉽다. 90년대 만화 극장판에 나온 인형사의 말마따나 네트는 광대하고, 매우 빠르고 간편하다. 사람이 모여들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으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만한 흥미를 지어내고, 퍼뜨리는데에도 좋은 환경이다. 때문에 조직화가 쉽다. 또한 조직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 구별도 모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최근 연예계 최고의 이슈였던 장동민의 팟캐스트 방송을 예로 들어보면, 우선 장동민의 방송을 듣고 이 사람이 너무나 미워진 나머지, 네트 상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조직을 꾸려 계획을 세우고, 장동민이라는 사람에게 불리한 글을 꾸준히 그리고 널리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후 역풍이 일어난 뒤, 해당 사람들은 부인하거나 침묵했지만 이미 캡쳐까지 나돌아다니는 일이, 모른척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조직을 꾸렸다. 그리고 계획에 맞게 일을 했다. 이 사람들의 조직의 핵심이다. 그러나 핵심 이외에도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직이 올린 글을 다른 곳으로 퍼뜨린, 조직 외 사람들이다. 조직과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조직원과 조직 외 사람들간의 차이는 직접 서로 소통을 하여 계획에 참여했느냐, 아니냐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3. 조직 외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생각해보면 이용당한 피해자이니까. 그러나 그들 스스로 다시 생각해볼진대, 본인이 이용당하기를 원하진 않았는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4. 일련의 장동민 사건은 '장동민'이라는 사람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면서 그 사람의 과거 행적과 (조금이나마)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위 사건을 접하면서 장동민에게 숱한 매질을 했다. 분명 방송은 누가 들었어도 여성비하적인 내용이 농축되어 들어 있었다. 옹꾸라를 들어온 사람들은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은 아니라거나, 음성으로 듣는 것과 텍스트 상의 어감은 많이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이든, 어감이 다르던간에 그것은 분명한 여성비하였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매질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동안 분위기상 움츠려있던 네티즌들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장동민과는 별개로, 네티즌에 관한 문제였다. '과연 매질을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5. 사실 네티즌에게는 권력이 없다. 검사처럼 누구를 기소할 힘도, 판사처럼 판결을 내릴 권리도 없다. 검사나 판사가 헌법의 수호 아래 권력을 가진다면, 네티즌들은 다수의 힘의 수호 아래서 '가짜권리(력)'를 갖는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으로써, 누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여러사람의 고심 끝에 나온 철학적 결과물도 아니다. 정당성도 물론 없다. 가짜권리는 무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나온다. 사실 건달과 다를 바가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니, 무시를 넘어서 칼로 푹 찔러버리는 일도 대수다. 네티즌의 가짜권리는 건달의 사시미 칼과 다를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폭력 농축액이다.

  6. 매질을 하는 것은 분명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분위기와 사람에 휩쓸려 매질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분위기 상에서는 반대 의견을 제시해봤자 금세 묻히거나 욕을 먹을 뿐이었다. 장동민을 향한 사시미 칼이,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자 의견을 낸 한 네티즌의 배때지로 향한다. 네트 상에서는 하주 흔한 일이지만,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어쟀거나 그렇게 매질을 시원하게 하고 나니, 이제야 시야가 맑게 개이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생각치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역풍이 일어났다.

  7. 장동민은 팟캐스트 방송 이후 몇차례 사과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첫사과는 영 시원치 않은 것이었지만, 당시 팟캐스트가 '듣는 사람만 듣는' 마니아들을 위한 방송이었고, 그 마니아들이 받아들이고 넘어갔다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많은 대중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재차 다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는 매질이 끝난 뒤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매질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몰랐기 때문에, 사과를 한다고 장동민을 용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본인을 정당화하는 중이다. 허나 정당한 폭력따위는 없다. 또한 사과를 한 사람에게 무시라면 몰라도, 폭력을 행하는 것이 어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8. 한 매체 편집장은 장동민이 했던 발언에 대해 '사람부터 되라'고 말했다. 그렇다. 장동민은 사람부터 되야 했다. 그래서 사과 후 팟캐스트 방송을 전부 삭제하고 광고도 전부 컷했으며, 유재석을 찾아가 새출발을 다짐했다. 그 후 그가 폭력적 언어로 누군가를 비하한 적은 없다. 적어도 사과 한 뒤에는 제정신을 차린듯 싶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다. 안타깝게도 편집장은 사과를 했던 것에 대해서까진 조사를 하지 않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편집장의 태도를 매우 존중한다. 장동민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이런식으로 했어야했다. 그냥 칼로 푸욱 찌르는게 아니라.

  9. 이전에 걸그룹 '러블리즈'의 한 멤버에 대한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간적이 있다. 결국 루머일 뿐,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멤버는 매우 큰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대중은 사실이 밝혀진 후 무엇을 했는가? 그 멤버에게 찾아가 울며 사죄라도 했을까? 답은 '아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울며 무릎꿇고 사죄해도 모를 판에 떳떳하다고 비판을 한다. 인간의 도리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럼 네티즌들은 어땠는가? 집단 린치를 가한 사람들이 사실이 밝혀지자 모르쇠한다. 어차피 자신이 사실을 왜곡한 '조직'에 알게 모르게 관여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대중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지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10. 최근에는 또 이상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간의 싸움으로 붙은 것이다. 하기야 예상된 것이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자였고, 위에서 언급한 '조직'은 여초 사이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애당초 '여성'비하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싸움은 매우 무의미하다. 그 시간에 본인에 대한 반성이나 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다고 전부 꼴마초인 것은 아니며, 조직을 꾸려 계획적으로 사건을 과장하고 음해한 사람들이 여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 분들께 '너나 잘하세요..'라고 읖조려주고 싶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해야겠고.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감상문

액자라고 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다. 작게는 예술 작품, 특히 미술 작품을 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액자가 있고 크게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테두리를 형성하는 거대한 액자가 있다. 이 액자에 걸린 작품은 그 시대의 사상이나 관념 등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유희를 뽐낸다. 액자는 이를 외부와 분리시켜 작품이 순수하게 그 자체로써 존재하도록 규정짓는다. 또한 작품으로 하여금 예술로 규정을 짓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액자 안에 있는 것은 자연스레 예술로 인식을 하면서, 액자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거나 혹은 관심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액자의 역할이다. 
 
  액자에 담긴 미술작품은 각각 존재하는 개별자인 동시에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동일체이다. 액자에 담김으로써 그 밖의 다른 세계와는 분리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관조자마저도 미술작품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액자는 그림과 관조자의 직접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데, 관조자를 포함한 외부 세계는 차단시키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관조자의 정신은 그의 삶이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또한 액자의 테두리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에 있어서 강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순이다.  예술에 관여하는 것은 이러한 액자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자극이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조각상에 덮인 천이나, 콘서트의 서치라이트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는 주관적 감상마저도 이 자극에 들어간다. 칸트는 이 자극에 대하여 부정적인 스탠스를 취하면서, 자극에 의해 미가 증대된다는 것은 오류이며 자극은 되려 순수한 취미판단을 저해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극을 이물질이라는 성가신 존재 그리고 없어야 좋은 존재에 비유했다. 반면 자크 데리다는 자극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자극은 작품의 가장자리로써 작품에 내재하는 것이며 때문에 작품의 구성요소로 보았다.

  우리 주변의 테두리를 인식하는 것은 낯설고 이색적인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는 우리도 모르게 그저 멋대로, 마음에 드는 대로 선택하는 것들이 수두룩하고 이러한 선택은 매 순간마다 찾아온다. 하물며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어떤가? 나는 예술작품의 작은 테두리, 나아가서는 시대문화적인 큰 테두리를 인식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감상하는 것은 거의 그림 그 자체들이다. 누구도 액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술관은 어떤지 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점묘법을 사용하여 안개 낀 밤 풍경을 묘사한작품이라는 설명은 들었어도 날카롭게 조각된 나무모양의액자라는 설명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액자가 바로 작품을 순수하게 가두어놓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니, 나의 생각보다 그것은 미술작품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지켜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세상과 단절시키는 그것은 비단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는 한다. 가령 우리가 매 순간마다 선택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시대관념적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테두리가 들어간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우리는 늘 머릿속에 각자의 고유한 액자를 들고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마땅한 작품이 보이면 그 액자 안에 가두어 놓고 평가하며 만족해한다. 이는 예술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 큰 연결고리가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예술작품들은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 작품 외적인 요소들과 작품이 결합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어차피 액자는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므로, 작품이 언제까지나 그 액자 안에 갇혀있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자연적이지 못한 일이기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칸트가 보기에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액자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가해지는 자극 또한 포함되는데, 데리다는 자극 또한 작품의 한 요소로써 보고 있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뉘는데, 현대의 예술 작품들은 작품과 자극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극이 작품이 되거나 작품을 넘어서 주가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칸트가 본다면 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애초에 작품과 자극을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과 외적인 것은 액자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작품과 작품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대결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물론 그리스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각색한 이야기일 테지만), 제욱시스는 작품을 방해하는 천, 즉 자극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바로 작품에 속한 요소였다. 파라시우스는 자극을 작품의 요소로 생각하여 그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칸트는 계속해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작품의 요소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자극을 작품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칸트는 작품의 요소와 작가의 의도 모두를 거부하고 있기에 유동적이지 못한 입장으로 보인다액자에 관한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으니, 나중에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면 그때는 액자 모양과 더불어 작품을 감싸고 있는 각종 조명들이나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봐야겠다. 그것이 정말로 작품과 나의 자연성을 이어줄 지 궁금하다. 이제 좀 더 재미있는 관람시간이 되지 않을까.

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서양 철학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생한 이유 (1)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탐구는 그들의 종교적 사유에서 나왔다. 철학은 이성의 영역이고 종교는 신앙의 영역인데, 철학이 어떻게 종교적 믿음에서 나올 수 있었는가? 사실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사유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가족종교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가족종교라는 것은 원시시대의 각 가정이 집 중앙 화덕에 불을 피워놓고 그 불을 수호신으로 기렸던 것을 말한다. 가정의 가장은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을 가장 큰 임무로 생각했다. 모든 것은 불로 이루어졌다. 새 가족이 태어났을 때도, 혹은 결혼을 하여 외부인을 들여왔을 때에도 모두 불 주위에서 특정한 의식을 행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고대 그리스 종교의 밑바탕이었으며, 국가로서의 종교가 된 시점에도 그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종교를 통하여 나라의 번영과 기원 그리고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빌었다. 이는 정치적인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이 닿아있는 것으로, 이러한 그리스의 종교적 성격을 이해해야만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의 관계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종교의식에는 두 가지가 존재했는데, 하나는 청동기 시대의 신들을 다루는 '올림피아' 의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신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카타크토니아' 의식이었다. 올림피아 의식의 경우, 올림포스 신들을 모시는 의식이었으므로 주로 낮에 이루어졌으며,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기원하는 국가 주도적 의식이었다. 따라서 참여자는 그리스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였는데, 만일 그리스 시민된 자가 의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시민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의식은 국가 전체를 지배하였고, 나라의 법과 질서를 체계화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올림피아 의식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종교와 정치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타크토니아 의식은 주로 다산성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에는 시민권을 가진 자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다. 올림피아 의식이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을 설명해준다면, 카타크토니아 의식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엘레시우스 비밀 의식을 살펴보자. 이 의식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의 의미가 곡물 정령의 죽음과 부활에 있음을 사제가 말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무엇인지 사유할 힘을 갖는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신화를 극으로 연출한다. 여기까지는 비단 고대 그리스 뿐만 아니라 다른 문명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다른 문명권들이 의식의 주체를 왕과 여사제로 국한시켰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에서는 모두가 의식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신과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 신적 질서로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제가 한 알의 밀알을 보여주는 세번째 단계에서는 마침내 모든 존재가 가시적으로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종적 차원에서는 비가시적 영역에 속한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무한한 존재의 현현임을 직관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후 계속.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인문학의 사회적이고 문화적 역할.

 이것도 시험 문제. 근데 이건 전에 적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현대 인문학은 과거의 그 역할과는 달리 하고 있다. 현대의 인문학은 개인을 중심으로 맞추어 나간다. 주로 개인의 심리 상태에 조언이나 위로를 던져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콘크리트 땅에서 한송이 민들레를 피어나게 하며, 문화적으로는 인간 중심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등장하게 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괜히 자기 계발서 유행이 사그러들고 마음을 치유하는 치유계(?) 문학들이 나온 것이 아니다.

 아 이건 그냥 내일 써도 무방할듯.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들.

 교수님이 시험 문제로 이런 문제를 내주셨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일까? 철학을 배우는 학도로써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저 '이성이요'라고 답했다가는 큰 실망을 넘어선 절망을 안겨드릴 것같은 느낌에 이렇게 뻘소리를 남겨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한 대로 이성일까? 그러나 이성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인간답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성이 있다. 심지어는 인간 말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몇몇은 냉철한 이성주의자인 경우도 있다. 그런고로 이성을 인간다움의 조건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감성은 어떤가? 몇 동물도 지니고 있는 감정이란 요소는 인간다움의 요건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답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는 한다. 인성이 제대로 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이내의 것들은 전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도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다. 지식이나 학습활동, 사회적 약속 등.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몇 차례의 물음 끝에 한가지 요소를 발견했다. 바로 이성을 넘어선 감성, 즉 연민이다. 연민은 인간다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내 생각에는 거의 유일한 요소이다. 나와 관계없는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 그 상대에게 인타까움을 느끼는 심정은 인간다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요소이다. 인간답지 않은 사람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기 때문에 비판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감정적인 사람도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타인을 생각하지 않기에 욕을 먹는다.

 생각해보니 연민과 비슷하게 배려나 양보 또한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배려나 양보는 사회적으로 배운 학습 효과에서 나오거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나중에 돌아올 이득을 생각하며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허나 연민은 다르다. 그것은 나에 돌아올 어떤 이득을 고려하지 않는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물론 연민을 하는 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연민을 하는 척일뿐, 연민을 한다, 라고는 할 수가 없다.

 이정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