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블로그 관리가 귀찮아지기 시작하더니 5월에는 아예 그냥 손을 놔버리고야 말았다. 이후 가끔 생각이 나고는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여 방치하고 있던 것을 오늘 다시 끄집어내고자 한다. 한동안 정말 뜸했다.
<그녀에게> 역시 내가 한동안 관심을 끄고 있던 영화였다. 몇년전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다가 접하게 된 영화. 당시에는 어렴풋이 이해를 하고 넘어갔던 영화의 감성을 이제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영화의 감독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모도바르의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차분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누군가가 그저 흘깃 스쳐본 영화의 겉표면은 잔혹한 사랑 영화로 보여질 수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사실 엉뚱한 넌센스 영화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둔 남자가 게이로 오해받으며, 그 남자의 지극한 간호로 깨어난 여자는 남자를 다시 만날 수가 없다. 넌센스의 중심에 선 인물은 남자 간호사 베니그노이다. 알리시아가 발레리나로써 할동했을 때 부터 그는 그녀를 짝사랑한다. 매일 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을 훔쳐보며 사모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그녀의 집을 알아내어 머리핀을 훔쳐가기도 한다. 영락없는 스토커의 모습이자,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알모도바르는 이를 베니그노의 감성에 덧대어 조금더 이질적인 느낌으로 만들어 낸다. 때문에 베니그노의 분명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분노가 아닌 이질적이고 기묘하게 생각되고는 한다.
환자와 간호사로 만난 후의 행동은 이제 베니그노의 탁월함을 과시한다. 베니그노는 의식불명의 알리시아에게 매일 말을 걸면서 그녀가 깨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기적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본인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절대 놓지 않는다. 마르코는 베니그노의 행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얼마 안가 그의 생각에 일부 동조하게 된다. 허나 마르코가 혼수상태의 연인, 리디아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후 나오는 리디아의 전 연인과는 대조되는 부분인데, 전 남자친구는 리디아의 손을 잡으며 의식이 없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도 자신이 발목을 다쳐 2주동안 리디아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사실 마르코는 베니그노만큼 기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베니그노는 그렇게 사랑하는 알리시아를 강간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분명 사회적으로 볼 때 크게 규탄받을 행위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이를 넌센스하게 풀어 나가는데, 바로 알리시아가 베니그노의 보살핌으로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감옥에 들어간 베니그노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으며, 결국 베니그노는 알리시아가 없는 세상에서 자살을 택하고 만다. 넌센스에 이은 넌센스가 빛나는 장면이다. 이로 인해 베니그노에 대한 규탄적 시선보다는 한 남성의 짙은 로망이 만들어낸 잔혹한 결말로 보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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