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심판의 밤 - 1부

  "...믿지...."

  1942년 세계가 제 2차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고 있는 때에, 한 여객선이 희뿌연 안개를 헤치며 바다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고 있다. 수면 가까이 자욱하게 깔린 안개 덕분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여객선은 나침반과 노련한 항해사의 기술에 의존하여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않아..."

  안개 사이로 여객선의 갑판이 보이고, 그 위에는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선 채 "믿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람은 하나 불지 않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깔린 습기로 인해 날이 추웠던지라, 남자는 목을 입고있는 긴 트렌치 코트 안으로 들이밀어놓고는 팔짱을 힘껏 쥐고 있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은 초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동공은 풀려 있는 것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남자는 몇 초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더니 금세 잠에서 깨어난듯 몸을 푸드덕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에는 온통 안개가 맺어놓은 물방울 맺힌 난간과 선장실 벽 뿐이었다.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리둥절해 한다. 이윽고 자신의 상황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서 왔었지? 이름은? 온갖 의문점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남자의 질문이 점점 깊숙히 빠져들 무렵, 갑자기 누군가가 남자의 앞에 나타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옆으로 넘겼으며 수염은 깔끔하게 잘라낸 모습의 신사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흰 셔츠에 검은 자켓을 걸쳤는데, 자켓의 모양이 으레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입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이 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선원일 것이다.

  "랜서 씨?"
  "예?"

  선원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선원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찾던 남성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가, 곧 안정을 찾았다. 그래, 나는 랜서구나. 랜서였다. 랜서는 여러가지 의문 중에서 적어도 자신의 이름만은 해결했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랜서는 끼던 팔짱을 풀고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의 온기가 그의 두 손을 감쌌다.

  "식사 시간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선원은 랜서를 배 안으로 안내했다. 랜서도 두 말 않고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좁다란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내려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큰 식당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다. 식당에는 이제 막 도착한 랜서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과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 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테이블들은 흰색 보로 덮여있었고, 그 위에는 와인잔과 그릇들이 엎어진 채로 놓여져 있었다. 승객들은 꼭 몇 명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배에 혼자 탑승한 것은 랜서뿐인 듯했다. 아니 근데, 정말 내가 이 배에 혼자 탑승한게 맞을까? 랜서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 뻔 했으나, 한 여자아이가 떨어뜨린 인형을 주워주느라 곧 그 의문을 잊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자."

  인형을 받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랜서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식당 문을 나갔다. 랜서는 이 모든 모습이 낯설었고 희한할 뿐이었다. 전혀 익숙치 않은 풍경이었다. 그저 조용히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를 벗어 선원에게 건넬 뿐이었다.

  "랜서 씨 인가요?"

  방황하는 랜서의 뒤로 살집이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턱이 두 개일 정도로 살이 붙어있었으며 덩치도 컸다. 머리는 전부 뒤로 넘겨서 이마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신의 몸에 맞게 입은 옷일지는 모르겠으나, 흰 셔츠에 노란 니트를 입었고, 붉은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세로로 줄무늬가 그려져있는 자켓을 입고 있었다. 잘 입은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돈이 꽤나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예... 그런데요...?"
  "전 포터라고 합니다. 여기에 앉으시죠!"

  어리둥절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랜서에게 포터는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랜서는 포터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저 포터라는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랜서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으나 포터는 곧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랜서에게 소개시켜주기 시작했다.

  "끝에 앉아 계신 남성 분은 '스탠리' 씨 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계신 여성 분은 스탠리 씨의 비서인 마틸다 씨죠."

  포터의 소개가 끝나자 스탠리와 마틸다가 랜서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인가요? 아니면 미국으로 떠나시는 길인가요?"
  "미국으로... 떠나는 길일겁니다... 아마도..."

  랜서는 마틸다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도 그럴것이, 정작 자신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단편이 아예 사라진 느낌이었다. 갑판에서 정신을 차리기 이전의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랜서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위화감을 계속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결국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에서 랜서는 소극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대화가 오고 갔고, 랜서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랜서는 그 모든 의문에 짜증이 났다. 전부 집어치우고 싶었다. 점차로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순간 배의 선장이 랜서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선장은 키가 큰 편이었고, 호리호리한 몸에 제복을 딱 맞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이가 좀 들어보였는데, 선장의 흰 턱수염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빠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밖에 안개가 가득 깔려 있어서 항해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 연안에는 독일군의 유보트가 매복해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죠."

  배가 지나가는 곳은 독일군의 유보트 출몰 지역이었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독일군은 오직 적과 아군만을 생각했을 뿐, 민간인이라는 제 3자를 염두해 두지 않았다. 때문에, 독일군은 유보트를 이용하여 민간 여객선을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자 승객들은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포터가 침묵을 깨고 이야기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뒤로 합시다. 여기 랜서 씨도 오셨으니까요."

  포터는 선장을 돌려 보낸 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띄워놓기 위해 모두를 바라 본 후, 제안을 했다.

  "우리 각자의 출신지를 이야기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전 맥시코에서 왔습니다. 랜서 씨, 랜서 씨는 어디에서 오셨죠?"

  질문을 받은 랜서는 당황했다. 출신지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갑판 이전의 일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출신지가 기억날리가 만무했다.

  "전... 프... 프랑...."

  랜서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답을 끄집어냈다. 본인도 속으로 놀라고 있었으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요?" 포터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그게 기억이....아, 프랑.... 프랑크푸르트일겁니다."
  "그렇다면 독일 출신이신가요?"
  "예... 그렇죠..."

  랜서는 겨우 자신의 출신지를 생각해내었다. 프랑크푸르트. 어쩐지 더욱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럼 독일은 언제 떠나셨다요?" 마틸다가 물었다.
  "아 그게...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러나 랜서는 고향만이 기억날 뿐, 그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껏 이름과 고향을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던 아까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지만, 랜서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대화할 자신이 없어졌다. 말을 섞을수록, 질문에 대답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고, 자기 존재에 대해 의심이 커져갔다. 결국 랜서는 자리를 떴다. 식당 문을 열고 나와 철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던 도중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식당 문을 뒤돌아본다음 다시 계단을 마저 내려가 숨을 내뱉었다. 그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안개 이슬이 조그맣게 맺힌 차가운 철제 벽에 등을 댄 채, 랜서는 가만히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작 기억난 것이라고는 이름과 고향 뿐이었다. 랜서는 이런 상황에 짜증이나 화가 나기 보다는 점점 간절해졌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존재하는 것인가? 대답에 대한 답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갑판을 내달리며 기쁨의 포효라도 내지를 기분이었다. 랜서가 몇 분 쯤 가만히 바다를 내다보며 자신의 기분을 곱씹고 있을 때에, 철계단에서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계단을 다라 내려오고 있었다. 랜서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틸다가 있었다. 마틸다는 곧장 계단을 내려와 랜서의 앞을 지나 배의 복도를 지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랜서는 마틸다를 보더니 다시 의문에 차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마틸다 씨... 혹시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랜서가 마틸다를 보았을 때, 의문에 가득찬 그것은 바로 낯설지 않은 느낌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이전에 본 것 같은 느낌. 그것이 그의 머릿속을 다시 엉망친창으로 만드려 하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상하다는 듯, 랜서의 눈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아뇨. 처음 보는걸요?"
  "저기... 무례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당신이 굉장히... 친숙해요. 익숙하고..."
  "음, 그건 다행이네요."
  "아니요, 그게... 다정한 느낌이 아니라, 오랫동안 바라본 느낌이란 말입니다."

  랜서는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며 힘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힘든 것은 마틸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아가부터 랜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 중 하나인 줄 알았으나, 랜서의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마틸다는 눈을 약간 찡그랜 채 랜서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 배에 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눈을 떠보니 제가 배 위에 서 있었어요. 제가 언제 어디서 배를 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전... 맘소사...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랜서는 허공에 눈을 맞춘재 손을 입술에 대고 말을 이었다.

  "제 이름과 고향은 기억나는데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집은 어딘지, 가족들은 누군지, 직업은 뭔지..."

  대답을 들은 마틸다는 랜서의 상태가 확실히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제 그녀는 랜서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드려고 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잠시 쉬는 게 좋겠어요. 방으로 돌아가셔셔 한 숨 주무시는게..."
  "... 잠깐만요."

  마틸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랜서는 갑자기 머리에 번뜩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랜서는 바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마틸다에게 말했다.

  "유보트... 그게 기억이 나요. 우리 배는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는 랜서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는 눈을 부릅떴으나 동공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제 인상을 확실히 찡그리고 답했다.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모두가 그걸 주의하고 있어요."
  "아니요, 확실해요. 왜인지 그게 기억이 납니다."

  이름과 고향 밖에 기억이 나질 않더니, 이젠 유보트라니! 랜서는 자신의 기억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지만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것이란 사실에는 확신이 들었다. 왜 유보트가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랜서의 머릿 속에는 배가 유보트의 공격을 받고 좌초하는 그림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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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판 <The Twilight Zone>, 한국명칭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 번 글로 옮겨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애먹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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