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3일 금요일

감상문

액자라고 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다. 작게는 예술 작품, 특히 미술 작품을 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액자가 있고 크게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테두리를 형성하는 거대한 액자가 있다. 이 액자에 걸린 작품은 그 시대의 사상이나 관념 등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유희를 뽐낸다. 액자는 이를 외부와 분리시켜 작품이 순수하게 그 자체로써 존재하도록 규정짓는다. 또한 작품으로 하여금 예술로 규정을 짓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액자 안에 있는 것은 자연스레 예술로 인식을 하면서, 액자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거나 혹은 관심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액자의 역할이다. 
 
  액자에 담긴 미술작품은 각각 존재하는 개별자인 동시에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동일체이다. 액자에 담김으로써 그 밖의 다른 세계와는 분리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관조자마저도 미술작품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액자는 그림과 관조자의 직접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데, 관조자를 포함한 외부 세계는 차단시키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관조자의 정신은 그의 삶이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또한 액자의 테두리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에 있어서 강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순이다.  예술에 관여하는 것은 이러한 액자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자극이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조각상에 덮인 천이나, 콘서트의 서치라이트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는 주관적 감상마저도 이 자극에 들어간다. 칸트는 이 자극에 대하여 부정적인 스탠스를 취하면서, 자극에 의해 미가 증대된다는 것은 오류이며 자극은 되려 순수한 취미판단을 저해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극을 이물질이라는 성가신 존재 그리고 없어야 좋은 존재에 비유했다. 반면 자크 데리다는 자극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자극은 작품의 가장자리로써 작품에 내재하는 것이며 때문에 작품의 구성요소로 보았다.

  우리 주변의 테두리를 인식하는 것은 낯설고 이색적인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는 우리도 모르게 그저 멋대로, 마음에 드는 대로 선택하는 것들이 수두룩하고 이러한 선택은 매 순간마다 찾아온다. 하물며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어떤가? 나는 예술작품의 작은 테두리, 나아가서는 시대문화적인 큰 테두리를 인식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감상하는 것은 거의 그림 그 자체들이다. 누구도 액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술관은 어떤지 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점묘법을 사용하여 안개 낀 밤 풍경을 묘사한작품이라는 설명은 들었어도 날카롭게 조각된 나무모양의액자라는 설명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액자가 바로 작품을 순수하게 가두어놓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니, 나의 생각보다 그것은 미술작품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지켜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세상과 단절시키는 그것은 비단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는 한다. 가령 우리가 매 순간마다 선택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시대관념적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테두리가 들어간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우리는 늘 머릿속에 각자의 고유한 액자를 들고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마땅한 작품이 보이면 그 액자 안에 가두어 놓고 평가하며 만족해한다. 이는 예술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 큰 연결고리가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예술작품들은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 작품 외적인 요소들과 작품이 결합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어차피 액자는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므로, 작품이 언제까지나 그 액자 안에 갇혀있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자연적이지 못한 일이기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칸트가 보기에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액자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가해지는 자극 또한 포함되는데, 데리다는 자극 또한 작품의 한 요소로써 보고 있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뉘는데, 현대의 예술 작품들은 작품과 자극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극이 작품이 되거나 작품을 넘어서 주가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칸트가 본다면 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애초에 작품과 자극을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과 외적인 것은 액자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작품과 작품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대결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물론 그리스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각색한 이야기일 테지만), 제욱시스는 작품을 방해하는 천, 즉 자극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바로 작품에 속한 요소였다. 파라시우스는 자극을 작품의 요소로 생각하여 그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칸트는 계속해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작품의 요소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자극을 작품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칸트는 작품의 요소와 작가의 의도 모두를 거부하고 있기에 유동적이지 못한 입장으로 보인다액자에 관한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으니, 나중에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면 그때는 액자 모양과 더불어 작품을 감싸고 있는 각종 조명들이나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봐야겠다. 그것이 정말로 작품과 나의 자연성을 이어줄 지 궁금하다. 이제 좀 더 재미있는 관람시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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