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古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김수영, 시집『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지금 상황과 잘 맞는 시.
네트 상에서의 감정 소모
가 부쩍 심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누군가가 무엇을 하나 잘못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은 다음 기어코 숨통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세상이 각박해지다보니 그런걸까, 조그만 것에도 화를 내는 사람들과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에 숨어 남을 헐뜯는 그들의 태도가 부쩍 자주 보인다. 논리적인 이성보다 한껏 격양된 자기 감정이 우선이다 보니 말과 글이 폭력적이고 분별이 없다.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다른 시야가 트일텐데 그거마저 귀찮아 하는 건지....
사람들이 갈수록 사실정보를 얻는 정성을 무시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긴 글이 나오면 스크롤을 쭉 내리고는 댓글로 3줄 요약을 요구하며, 프로그램 한 편을 다 보기 보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플래시를 챙겨본다. 당연히 짧고 얕게 보고 들을 수록 정확한 사실정보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난다. 오해와 왜곡은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잠잠해진다.
또 사람들은 공인에 대해 편파적인 시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범법행위를 몇 번씩 저질러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숨을 죽여야 한다. 자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쇼 오락의 겉다리나 만지작 하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으면 서럽다.
꽁치 통조림 하나 잘못 썼다고 모든 잘못을 독박쓰는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서 쓰는 글. 그러나 나도 그 사람을 셰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갈수록 사실정보를 얻는 정성을 무시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긴 글이 나오면 스크롤을 쭉 내리고는 댓글로 3줄 요약을 요구하며, 프로그램 한 편을 다 보기 보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플래시를 챙겨본다. 당연히 짧고 얕게 보고 들을 수록 정확한 사실정보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난다. 오해와 왜곡은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잠잠해진다.
또 사람들은 공인에 대해 편파적인 시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범법행위를 몇 번씩 저질러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숨을 죽여야 한다. 자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쇼 오락의 겉다리나 만지작 하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으면 서럽다.
꽁치 통조림 하나 잘못 썼다고 모든 잘못을 독박쓰는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서 쓰는 글. 그러나 나도 그 사람을 셰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곽정은의 발언이 불편한 이유
곽정은이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내용은 대충 택시를 타고 일하러 가는데, 택시기사가 '이랗게 예쁜 공주님들도 일을 하러 가느냐'라고 말한 것에 불쾌함을 느끼고 택시에서 내렸다는 것. 뒤이어 왜 택시기사의 말이 불쾌했는지 짤막한 이유도 적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과 예쁜 여자가 왜 일을 하느냐는 전제, 그리고 공주라고 지칭하며 미성숙한 애 취급을 하는 일련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꼈다 - 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곽정은의 말이 불편하다. 이유는 이러하다.
1. 택시기사가 한 발언은 그냥 칭찬으로 건넨 말인게 뻔한데 그것을 굳이 꼬아서 해석한 것.
2. 곽정은 자신이 했던 지난 날의 발언과는 그 행동이 모순된 것.
3. 마지막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이해시켜줄 이유가 없다.'라고 일축해버린 것.
우선 1번부터. 택시기사가 건넨 말은 어딜봐도 칭찬이다. 곽정은 본인도 그 말이 칭찬임을 알 것이다. 택시기사가 힘 준 단어는 역시 '예쁜 공주님'일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예쁘다고 칭찬을 한 것이다. 헌데 그것에 대해 '외모에 대한 평가 섞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곽정은은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라고 했는데, '평가'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단어를 부러 불쾌한 의미의 것으로 바꾸어 썼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판단까지 불쾌한 의미의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곽정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고 오 예쁘네, 잘생겼네, 라고 말한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타인의 외모에 대한 불쾌한 평가인가?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받아들이는 말을 어거지로 불쾌한 의미로 바꾸면 본인의 삶 역시 언행불일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공주'라는 말에 미성숙한 애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공주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들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공주님 소리가 전부인 모양이지만, 사실 공주는 그냥 어떤 위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나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때문에 '미성숙한 애'의 나이를 훌쩍 넘은 공주들도 많다. 또한 택시기사가 딱 봐도 어른인 사람에게 애 취급할 목적으로 '공주'라는 말을 썼을리도 없으며, 에X드 하우스만 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공주소리인 만큼 그 대상이 '미성숙한 애'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쁜 여자가 일을 하러 가느냐, 라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긴 사람만 일을 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
2번에서 서술할 내용은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다. 다만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2번의 예시는 그 유명한 장기하와 침대 발언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곽정은이 모 프로그램에서 장기하에게 '저 남자는 침대에서는 어떨까?'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럴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사람이니 만큼, 은어에 관련해서는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고, '침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둘이 이야기를 잘 마쳤다고는 해도 이미 전파를 타고 각 가정에 나가버린 이상, 그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곽정은은 단호히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라며 그 이유에 대해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나는 본인의 벌언에는 관대하고 타인인 택시기사의 발언에는 엄격한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예전에 잘못을 했더라도 지금 타인의 행동에 불쾌를 느끼고 따질 수 있다. 허나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겠는가?
3번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곽정은은 트윗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개중에는 나름 적절하게 비판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마 대부분은 화를 참지 못한 욕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가 피곤해져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라며 일축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적어도 적절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까지 싸그리 묶어 '수준'을 운운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 상세하게 자신이 불쾌를 느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도, 더 설득력있게 글을 쓰지도 않았다.
최근의 트윗을 보니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곽정은이 리트윗한 최지은이라는 분의 트윗은 '여성이 불쾌를 겪은 일에 유별나다며 비웃는 것은 보다 많은 여성이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올바른 생각이고, 무엇이 유별난 생각인지부터 판단할 줄 알아야....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곽정은의 말이 불편하다. 이유는 이러하다.
1. 택시기사가 한 발언은 그냥 칭찬으로 건넨 말인게 뻔한데 그것을 굳이 꼬아서 해석한 것.
2. 곽정은 자신이 했던 지난 날의 발언과는 그 행동이 모순된 것.
3. 마지막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이해시켜줄 이유가 없다.'라고 일축해버린 것.
우선 1번부터. 택시기사가 건넨 말은 어딜봐도 칭찬이다. 곽정은 본인도 그 말이 칭찬임을 알 것이다. 택시기사가 힘 준 단어는 역시 '예쁜 공주님'일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예쁘다고 칭찬을 한 것이다. 헌데 그것에 대해 '외모에 대한 평가 섞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곽정은은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라고 했는데, '평가'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단어를 부러 불쾌한 의미의 것으로 바꾸어 썼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판단까지 불쾌한 의미의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곽정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고 오 예쁘네, 잘생겼네, 라고 말한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타인의 외모에 대한 불쾌한 평가인가?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받아들이는 말을 어거지로 불쾌한 의미로 바꾸면 본인의 삶 역시 언행불일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공주'라는 말에 미성숙한 애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공주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들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공주님 소리가 전부인 모양이지만, 사실 공주는 그냥 어떤 위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나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때문에 '미성숙한 애'의 나이를 훌쩍 넘은 공주들도 많다. 또한 택시기사가 딱 봐도 어른인 사람에게 애 취급할 목적으로 '공주'라는 말을 썼을리도 없으며, 에X드 하우스만 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공주소리인 만큼 그 대상이 '미성숙한 애'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쁜 여자가 일을 하러 가느냐, 라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긴 사람만 일을 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
2번에서 서술할 내용은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다. 다만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2번의 예시는 그 유명한 장기하와 침대 발언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곽정은이 모 프로그램에서 장기하에게 '저 남자는 침대에서는 어떨까?'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럴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사람이니 만큼, 은어에 관련해서는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고, '침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둘이 이야기를 잘 마쳤다고는 해도 이미 전파를 타고 각 가정에 나가버린 이상, 그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곽정은은 단호히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라며 그 이유에 대해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나는 본인의 벌언에는 관대하고 타인인 택시기사의 발언에는 엄격한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예전에 잘못을 했더라도 지금 타인의 행동에 불쾌를 느끼고 따질 수 있다. 허나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겠는가?
3번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곽정은은 트윗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개중에는 나름 적절하게 비판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마 대부분은 화를 참지 못한 욕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가 피곤해져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라며 일축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적어도 적절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까지 싸그리 묶어 '수준'을 운운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 상세하게 자신이 불쾌를 느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도, 더 설득력있게 글을 쓰지도 않았다.
최근의 트윗을 보니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곽정은이 리트윗한 최지은이라는 분의 트윗은 '여성이 불쾌를 겪은 일에 유별나다며 비웃는 것은 보다 많은 여성이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올바른 생각이고, 무엇이 유별난 생각인지부터 판단할 줄 알아야....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입국금지에 대한 생각 정리
국가가 개인을 입국 금지 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입국 금지는 개인의 자유를 금지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다.
- 그러나 개인이 본인의 자유를 담보로 타국의 시민권을 따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 만일 개인이 입국 금지를 당할 것을 모르고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국적 선택은 누구든지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이다. 누구든지 본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물론 개인에게는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병대 홍보 대사나 이미지 소모로 인해 이득을 번 행위 등,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또한 입국금지 같은 처벌이 당사자의 예측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처벌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법을 수호하며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사안이다. 모든 사건에 공소시효가 있으면서 군입대 거부에만 공소시효가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 아니, 애초에 입국금지는 헌법에 명시된 처벌 방법이 아니다.
- 국적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더라도, 국적을 선택한 것은 개인이고, 그로 인한 책임과 부담을 고려했어야 함. 다만 계속되는 입국금지는 군입대 거부 전 벌어놓은 이미지나 돈을 생각하더라도 과중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더군다나 국내에만 군비리를 저지른 높은 분들이 수두룩한 판에, 군입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금지를 시키는 것은 진정성의 여지가 의심될 우려가 있다. 입국금지는 그만하되, 개인이 입국할 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빌어야 함.
- 무슨 소리인지....
- 그러나 개인이 본인의 자유를 담보로 타국의 시민권을 따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 만일 개인이 입국 금지를 당할 것을 모르고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국적 선택은 누구든지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이다. 누구든지 본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물론 개인에게는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병대 홍보 대사나 이미지 소모로 인해 이득을 번 행위 등,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또한 입국금지 같은 처벌이 당사자의 예측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처벌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법을 수호하며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사안이다. 모든 사건에 공소시효가 있으면서 군입대 거부에만 공소시효가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 아니, 애초에 입국금지는 헌법에 명시된 처벌 방법이 아니다.
- 국적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더라도, 국적을 선택한 것은 개인이고, 그로 인한 책임과 부담을 고려했어야 함. 다만 계속되는 입국금지는 군입대 거부 전 벌어놓은 이미지나 돈을 생각하더라도 과중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더군다나 국내에만 군비리를 저지른 높은 분들이 수두룩한 판에, 군입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금지를 시키는 것은 진정성의 여지가 의심될 우려가 있다. 입국금지는 그만하되, 개인이 입국할 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빌어야 함.
- 무슨 소리인지....
2015년 5월 18일 월요일
Maroon 5, Sugar
2집 이후 꾸준히 락에서 팝으로의 변신을 시도했던 마룬 5. 결국 4집 <Overexposed>부터는 완전한 팝 밴드가 되었다. 음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기에는 역시 팝 음악만한 게 없다. 음악성이 대수냐. 돈이 최고.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잡담
기린의 노래를 듣다가 세상이 점차 계산적이고 섬세하게 변해감을 실감했다. 요즘 인기있는 직업은 짧은 기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나 대기업 사원보다는 오래도록 적은 돈이나마 벌 수 있는 공무원이다. 이상적인 연애는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들기보다 넓게 공감을 해 줄 수 있는 것. 경조사는 직접 하기보다 대리업체에 맡긴다. 짧고 빠르게. 경제나 정치가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변하게 되었다. 벌리는 돈은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니, 실패할 확률이 높은 도박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살기는 편하겠구나 싶다.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면 굳이 큰 야망을 꿀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러나 어쩐지 처량한 자기위로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은 누구든지 가슴속에 큰 꿈을 갖고 살아가지만, 현실로 끄집어낼 조건과 용기가 없어서 정신승리를 하며 살아가기 때문. 행복하지만 슬픈 시대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토마스 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g On Heaven's Door'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밥 딜런의 노래일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생 시절 학원에 다닐 때 영어 수업 시간에 밥 딜런의 노래를 배웠었다. 그리고 그 때 천국의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다. 죽음의 순간을 깊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숨이 끊어질 듯 애처로운 노래는 초등생의 마음조차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 독일의 영화는 밥 딜런의 노래의 제목 뿐만 아니라 가사의 내용마저 닮아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매 순간 빠른 속도로 죽음에 가까워진다. 어쩔때는 약이 없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오기도 할 만큼 극한 상황에 처해있다. 죽음의 문 턱에 서 있는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바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생의 갓길을 달리는 모험은 아찔하기 짝이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며 죽음을 재촉하는 것도 모자라, 갱의 차와 돈을 훔치고 경찰과 부닥치는 등 오늘만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허나 그 과정이 심각하지는 않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묘사되며, 등장인물들의 바보같음으로 인해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시한부 주인공들이 하는 말은 초반의 긴장감을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우린 지금 천국의 문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거야." 죽음이라는 삶의 가장 큰 비극을 앞두었으면서도 온갖 희극적 상황들로 뒤덮인 주인공들의 여로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연상시킨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자아의 이성으로 그려진 루디와 감정으로 그려진 마틴은 결국 감정의 이끔으로 인하여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난관을 헤쳐나온 그들의 인생은, 목표에 도달하자 아름답게 스러지고 만다. 그리고 밥 딜런의 노래가 스며 나오면서 비로소 영화는 우리에게 주제를 각인시킨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목적을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다만 갱의 보스가 둘을 그냥 풀어준 전개는 개연성이 많이 부족했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뒤늦은 잔혹동시 논란에 대한 소고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보는 시리즈 도서가 있다. 바로 <한니발>. <양들의 침묵>부터 시작해서(중간에 <레드 드래곤>이 있지만 읽어보질 못했다. 아쉽.) <한니발 라이징>까지 쓰여진 시리즈는 꽉 짜여진 긴장감과 강한 흡입력으로 몇 번을 읽어도 언제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 즈음에 즐겨 읽었다. 한니발 시리즈를 읽은 후에는 왜인지 이전에 읽었던 큰 글씨가 따박따박 박힌 책들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일부러 읽기 쉬운 도서들보다는 어려운 책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허나 그럴때마다 같이 간 어른이 늘 나를 말렸다. 그런 책들은 나이가 좀 더 든 다음에 보라는 말도 덧붙여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의문스러웠다. '왜 어리다고 어려운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거지?'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넌 아직 어리니까'였다. 이 무슨 궤변인지.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11039461&code=940100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아다치 미츠루, 러프
<러프>를 읽기 전까지 내 마음 속 미츠루 최고의 작품은 <터치>였었다. 그러나 어제 러프를 다 읽고 나서 생각이 뒤바뀌었다. 러프가 최고.
아다치 미츠루가 그리는 연애의 오묘한 감정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H2>가 고민을 수반한 복잡한 연애 심리를 그리고 <터치>가 은근한 연애의 진행 과정을 보여준다면 <러프>는 미츠루 작품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연정을 나타낸다. 아미가 케이스케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에게 마음을 품는 과정과 아미에 대한 케이스케의 심리 고백, 그리고 엔딩에서 울려 퍼지는 아미의 고백까지. 남성 판타지적 요소가 맛깔스럽게 들어간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일본판같다.
부럽구만, 젊음이. 차도, 채여도 몇 번이고 여름은 오지. 뜨거운 계절이 말이야.
하이데거 세번째
1. 현존재 De-sein(= 세계-내-존재)은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 개념이다. 현존재는 쉽게 말해 '있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어의 Be 동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Be 동사로 예시를 들어본다. 'He is my friend'라는 문장에 is라는 동사가 있다. 한국어로 해석하면 is는 '~은/는'이 된다. 이 문장에서 ~은/는이라는 것은 앞의 주어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 그런데 주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주어가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나의 친구다'라는 문장에서 '그'가 존재하지 않으면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있어야(존재)'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바로 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 위해 현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전통적으로 인간 존재는 신 앞에 우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신학을 중시한 중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고대나 근대에도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다른 신이 있다거나 했을 뿐이지 신의 개념은 늘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한 존재였다. 필연적인 존재는 오직 신 뿐이었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세상에 휙 던져진 존재로써, 누구든지 우연적으로 탄생한 존재였다. 또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서 던져지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성을 갖게 되면서 가능성 또한 갖게 되었다. FM을 예로 들어보자. 선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포텐이 터지고, 능력치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만일 FM의 시간이 2015년 5월에 계속 멈춰있다면 해당 선수가 아무리 -9의 포텐을 가진다 해도 능력치가 올라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발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헌데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므로 발전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발전할 가능성 또한 없다. 이 '가능성'이란 존재자만의 고유한 특권인 셈이다. 그리고 존재자들은 자기 존재밖에 있는 시간성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탈존'의 과정을 겪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있음이 타 존재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선 인간의 있음은 세계-내의 것이다. 인간은 있음 그 자체로 이미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 행동양식이나 생활방식등이 선조에서 후대로, 나의 주변에서 나에게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홀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친구 윌슨과 함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바탕으로 섬을 가꿔간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그 자체로 타자와 연결된다.
또한 인간의 있음은 다른 존재자들의 그것보다 자유롭고 심도있다. 동물들은 집을 지을 때 기껏해야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밖에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를 들어 지을지 고민할 수 있다.
2. 인간의 있음은 끊임없는 탈존의 성격을 띈다. 탈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어야 하고, 탈존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타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인산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 존재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단순한 물물/정보 교류로 이루어진 원시적 탈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각종 규제들은 고민의 산물이다.
3. 에픽하이 4집의 <백야> 중 타블로 벌스에 '매 순간이 과거의 끝'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매 순간 과거와, 자아와 작별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 다운에 돌입한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게 되며, 걱정이 심각해지면 네크로포비아가 되기도 한다. 이건 다음 번에....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 위해 현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전통적으로 인간 존재는 신 앞에 우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신학을 중시한 중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고대나 근대에도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다른 신이 있다거나 했을 뿐이지 신의 개념은 늘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한 존재였다. 필연적인 존재는 오직 신 뿐이었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세상에 휙 던져진 존재로써, 누구든지 우연적으로 탄생한 존재였다. 또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서 던져지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성을 갖게 되면서 가능성 또한 갖게 되었다. FM을 예로 들어보자. 선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포텐이 터지고, 능력치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만일 FM의 시간이 2015년 5월에 계속 멈춰있다면 해당 선수가 아무리 -9의 포텐을 가진다 해도 능력치가 올라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발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헌데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므로 발전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발전할 가능성 또한 없다. 이 '가능성'이란 존재자만의 고유한 특권인 셈이다. 그리고 존재자들은 자기 존재밖에 있는 시간성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탈존'의 과정을 겪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있음이 타 존재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선 인간의 있음은 세계-내의 것이다. 인간은 있음 그 자체로 이미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 행동양식이나 생활방식등이 선조에서 후대로, 나의 주변에서 나에게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홀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친구 윌슨과 함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바탕으로 섬을 가꿔간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그 자체로 타자와 연결된다.
또한 인간의 있음은 다른 존재자들의 그것보다 자유롭고 심도있다. 동물들은 집을 지을 때 기껏해야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밖에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를 들어 지을지 고민할 수 있다.
2. 인간의 있음은 끊임없는 탈존의 성격을 띈다. 탈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어야 하고, 탈존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타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인산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 존재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단순한 물물/정보 교류로 이루어진 원시적 탈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각종 규제들은 고민의 산물이다.
3. 에픽하이 4집의 <백야> 중 타블로 벌스에 '매 순간이 과거의 끝'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매 순간 과거와, 자아와 작별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 다운에 돌입한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게 되며, 걱정이 심각해지면 네크로포비아가 되기도 한다. 이건 다음 번에....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주저리 모음
1. 하이데거를 다시 쓰려니까 피곤함이 밀려온다. 뇌 속 뉴런을 깨우기가 벅차다. 아아 이따 저녁에 다시 써야지.
2. 요즘에는 음악도 기사도 찾아보지 않고 그저 밀물썰물에 흘러가듯 지내고 있다. 나의 흐름은 달의 장력에 맡겨놓았다. 귀찮기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는 이유도 있고, 남들 말하는대로 부화뇌동하는 게 싫어서 꼼짝않고 지낸다. 요즘은 뭐 축구도 재미 없고,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을 떼가 제일 행복하다. 이러니까 아저씨같잖아 흑흑....
3. 어제 매운 볶음음식을 찬으로 삼았더니 위가 좀 쓰리다. 덕분에 오늘 까르보나라가 땡겼으나 속 안 좋아질까봐 패스. 건강 챙기고 살도 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오^ 그러나 속 안 좋은 와중에도 밥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까르보나라는 내일 다시 해먹어야지.
4. 까르보나라 하니까, 저번에는 면을 너무 적게 삶은 탓인지 겨우 1인분이 나왔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삶아야겠다. 그리고 치킨 스톡을 우려내어 육수로 넣으면 어떨까. 맛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짜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일 시도해봐야지..
5.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고 싶다. 소주 말고 좀 맛있는 거...
2. 요즘에는 음악도 기사도 찾아보지 않고 그저 밀물썰물에 흘러가듯 지내고 있다. 나의 흐름은 달의 장력에 맡겨놓았다. 귀찮기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는 이유도 있고, 남들 말하는대로 부화뇌동하는 게 싫어서 꼼짝않고 지낸다. 요즘은 뭐 축구도 재미 없고,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을 떼가 제일 행복하다. 이러니까 아저씨같잖아 흑흑....
3. 어제 매운 볶음음식을 찬으로 삼았더니 위가 좀 쓰리다. 덕분에 오늘 까르보나라가 땡겼으나 속 안 좋아질까봐 패스. 건강 챙기고 살도 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오^ 그러나 속 안 좋은 와중에도 밥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까르보나라는 내일 다시 해먹어야지.
4. 까르보나라 하니까, 저번에는 면을 너무 적게 삶은 탓인지 겨우 1인분이 나왔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삶아야겠다. 그리고 치킨 스톡을 우려내어 육수로 넣으면 어떨까. 맛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짜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일 시도해봐야지..
5.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고 싶다. 소주 말고 좀 맛있는 거...
시간도 많으니 폐쇄성에 대해 글을 하나 더
현재 스르륵 회원들이 오유로 유입 중이고, 여성시대(이하 여시) 카페를 저작권 위반과 개인정보 수집으로 방통위에 신고한 상태이다. 일단은 여시 내에서 빈번하게 저작권이 위반된 적은 사실이고(사실 대형 사이트들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기는 한다.) 개인정보 수집 역시 여시와 탑시 가입 특성상 위법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개인정보 수집의 경우에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암튼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사방이 적인 여시가 이제는 같은 여초 특성을 가진 쭉빵에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조작글이 자기네 사이트에서 먼저 제기된 것 때문인지 쭉빵에서도 이번 일에 민감한 듯하다. 현재는 쭉빵이 거의 여시에 넘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다면 여시는 어떤 얘기로 쭉빵을 꼬드겼는가. 바로 그동안 그들이 지겹도록 얘기했을 '여혐' 사상이다. 오유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이 여혐사상을 갖고 여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내부균열을 막고 회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여시 운영진의 대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방법은 꽤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써먹은 방법이 바로 대륙진출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쟁기간만큼은 일본 무사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히틀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적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내부에서 토의하고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내부에서의 해결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는 모 국가가 떠오른다.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 일본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독일과 모 국가 세 나라 모두 폐쇄성을 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위 예시들에서 폐쇄적일 수록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이 더 자주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로 나열한 국가들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거나, 실패한거나 다름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모 국가는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모기 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니. 여시 역시 다음주 내로 부작용의 여파를 크게 맞으리라 예상한다.
추가로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한국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의 그것보다 비중있고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차별적인 시각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의 허리를 감싸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허리를 감으면 '좋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에게 썩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문제가 남성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녀차별은 신체적 차이로부터 나온다. 성희롱부터 폭행, 강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범죄들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여기서 힘은 사회적 지위가 일수도 있지만, 원초적인 신체적 힘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그러므로 여성 차별 문제에 더 민감해진다. 당장 범죄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희생자들 중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여성이 제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이 역시 기본은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가 여성문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스르륵 회원들이 신고하니까 이제야 사과문을 올린 여시. 스르륵한테만.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니니....
사방이 적인 여시가 이제는 같은 여초 특성을 가진 쭉빵에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조작글이 자기네 사이트에서 먼저 제기된 것 때문인지 쭉빵에서도 이번 일에 민감한 듯하다. 현재는 쭉빵이 거의 여시에 넘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다면 여시는 어떤 얘기로 쭉빵을 꼬드겼는가. 바로 그동안 그들이 지겹도록 얘기했을 '여혐' 사상이다. 오유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이 여혐사상을 갖고 여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내부균열을 막고 회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여시 운영진의 대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방법은 꽤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써먹은 방법이 바로 대륙진출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쟁기간만큼은 일본 무사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히틀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적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내부에서 토의하고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내부에서의 해결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는 모 국가가 떠오른다.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 일본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독일과 모 국가 세 나라 모두 폐쇄성을 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위 예시들에서 폐쇄적일 수록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이 더 자주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로 나열한 국가들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거나, 실패한거나 다름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모 국가는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모기 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니. 여시 역시 다음주 내로 부작용의 여파를 크게 맞으리라 예상한다.
추가로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한국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의 그것보다 비중있고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차별적인 시각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의 허리를 감싸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허리를 감으면 '좋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에게 썩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문제가 남성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녀차별은 신체적 차이로부터 나온다. 성희롱부터 폭행, 강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범죄들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여기서 힘은 사회적 지위가 일수도 있지만, 원초적인 신체적 힘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그러므로 여성 차별 문제에 더 민감해진다. 당장 범죄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희생자들 중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여성이 제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이 역시 기본은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가 여성문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스르륵 회원들이 신고하니까 이제야 사과문을 올린 여시. 스르륵한테만.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니니....
여시 관련 + 오유
계속해서 사건이 커지고 있는 여성시대 카페 조작글 사태는 결국 여시쪽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올리지 않고 끝날 공산이 크다. 아직까지도 운영진이 상황을 부정하는 데다가 회원들마저 운영진의 태도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성이 부른 타 사이트들과의 불통이다. 가끔 불통이 고소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여시에서 하는 악담이 특정 인물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것이라 고소는 불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전에 특정 연예인을 두고 희희낙락한 것은 해당 연예인이 성희롱으로 고소할 수도 있을듯.)
여시 조작 사태는 카페 일부 회원들의 소행이고 그 회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작과 물타기를 방관한 타 회원들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해당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바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작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작한 자료를 섣부르게 지지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조작과 선동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시가 워낙 폐쇄적이고, 대세인 주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찍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허나 여시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많은 여성 유저들이 그러했듯이 체제가 마음에 안들면 개인이 나오면 되는 일이다.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재밌는 유머들이 많아서 불만을 참고 활동하는 건 암묵적으로 사이트에 동의한 것이다. 간혹 아웃팅한 일베인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사실 일베가 유용한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있다. 나는 눈팅만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사람은 순수한 유저구나'라고 생각할 여시 회원들이 얼마나 될지.
+ SLR(이하 스르륵)에서 여시를 위해 따로 비밀방(탑씨)을 만들어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르륵회원들이 분노했다. 비밀방이 기존 스르륵 사이트 게시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글 올리기 좋았기 때문. 화가 난 회원들은 스르륵을 떠나 오유에 입성했다. 그래서 지금 오유는 스르륵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글이 많이 올라오는 중이며, 기존 오유 회원들도 유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과거 여성시대 영리화 사태때에도 열받은 여시 회원들 중 많은 수가 오유로 옮겨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오유는 새 회원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후 오유는 페미나치적인 성 관념을 주장하는 게시글/댓글이 늘어나면서 보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스르륵 회원들이 대거 유입되는 지금, 오유는 여시때와는 또 다른 문제점을 떠안을 수도 있다.
여시 조작 사태는 카페 일부 회원들의 소행이고 그 회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작과 물타기를 방관한 타 회원들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해당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바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작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작한 자료를 섣부르게 지지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조작과 선동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시가 워낙 폐쇄적이고, 대세인 주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찍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허나 여시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많은 여성 유저들이 그러했듯이 체제가 마음에 안들면 개인이 나오면 되는 일이다.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재밌는 유머들이 많아서 불만을 참고 활동하는 건 암묵적으로 사이트에 동의한 것이다. 간혹 아웃팅한 일베인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사실 일베가 유용한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있다. 나는 눈팅만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사람은 순수한 유저구나'라고 생각할 여시 회원들이 얼마나 될지.
+ SLR(이하 스르륵)에서 여시를 위해 따로 비밀방(탑씨)을 만들어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르륵회원들이 분노했다. 비밀방이 기존 스르륵 사이트 게시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글 올리기 좋았기 때문. 화가 난 회원들은 스르륵을 떠나 오유에 입성했다. 그래서 지금 오유는 스르륵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글이 많이 올라오는 중이며, 기존 오유 회원들도 유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과거 여성시대 영리화 사태때에도 열받은 여시 회원들 중 많은 수가 오유로 옮겨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오유는 새 회원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후 오유는 페미나치적인 성 관념을 주장하는 게시글/댓글이 늘어나면서 보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스르륵 회원들이 대거 유입되는 지금, 오유는 여시때와는 또 다른 문제점을 떠안을 수도 있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사람을 방에 혼자 가두면 미쳐버리지만
여러명을 가두면 어떨까? 우선 가두어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서로 아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방법을 고민한다. 잠시동안은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편이 갈리고, 다른 쪽의 의견은 무시한 채 귀를 막으며 지내게 된다. 타의에 의한 폐쇄성이 자의에서 피어나는 과정이다.
폐쇄성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흘러가야 하듯이, 집단도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립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안에서 그네들만의 잔치가 열린다.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자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점차 극단적인 성격을 띄어간다.
허나 동시에 폐쇄성은 허울일 뿐이다. 내부에서 일삼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 울타리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외부로 넘어가는 순간, 비밀스레 나누던 파시즘이 들통나고 사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하던 이야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대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얼마전 팟캐스트 방송 내용으로 문제가 된 옹달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그 누구보다 비난했던 '여성시대'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매장 운동까지 했던 대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폐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피해를 끼친 이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할 일이 아닌지.
폐쇄성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흘러가야 하듯이, 집단도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립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안에서 그네들만의 잔치가 열린다.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자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점차 극단적인 성격을 띄어간다.
허나 동시에 폐쇄성은 허울일 뿐이다. 내부에서 일삼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 울타리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외부로 넘어가는 순간, 비밀스레 나누던 파시즘이 들통나고 사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하던 이야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대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얼마전 팟캐스트 방송 내용으로 문제가 된 옹달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그 누구보다 비난했던 '여성시대'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매장 운동까지 했던 대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폐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피해를 끼친 이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할 일이 아닌지.
말릭 벤젤룰, 서칭 포 슈가맨
죽은 영웅을 찾아 나서는 여정.
1. 낭만적인 영화다. 영화는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한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와,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여준다. 고작 한 장의 앨범으로 시작되었던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어느새 남아공 전역을 휩쓴 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등의 각종 규제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로드리게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지.
허나 로드리게즈의 상황은 낭만적이지 못했다. 70년대,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남아프리카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미국 가수였으므로 해외에서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 수가 없었다. 1970년대는 전화기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미국과 남아공은 소식을 주고 받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결국 남아공 사람들은 루머를 만들어낸다. 로드리게즈가 공연장에서 자살을 해 일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남아공 국민들은 그들의 영웅이 죽은 줄 알고 있었다.
2. 그런데 한 덕후가 로드리게즈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다며 뒷조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로드리게즈는 미국에서 완전히 실패한 가수였고,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덕후는 위대하다. 끈질기게 정보를 추적해서 로드리게즈의 프로듀서였던 사람까지 알 게 되었고, 그에게 로드리게즈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3. 드디어 찾아낸 로드리게즈는 가난하지만 성실히 살고 있었다. 밥 딜런과 어깨를 나란히 할 뻔 했던 가수는 아버지가 되어 묵묵히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덕후는 그에게 남아공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로드리게즈는 다시 기타를 잡고 콘서트를 위해 남아공으로 향한다.
4. 로드리게즈의 인생과 그의 음악, 한 인간의 집념 그리고 로드리게즈의 노래를 부르며 규제에 저항했던 70년대. 이들은 참 낭만적이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당시에는 낭만이란 단어가 멀어 보였겠지만, 아픔을 뒤로 하고 곱씹어보는 과거는 낭만적이다. 향긋하고 고소하고.... 가슴을 울렁인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낭만적인 영화다.
2015년 5월 6일 수요일
2015년 5월 5일 화요일
다음 클라우드는 나의 원수
카카오톡 서버 열람 사태가 터진 후 정보 보호 시스템이 더 강화되었는지, 지금의 다음 클라우드는 상당히 삼엄한 꼰대 보초를 연상케 한다. 이전에 썼던 아이디가 있으면 반드시 예전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서 그 아이디를 통과시켜야 한다 ^오^. 하기사 개인정보를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한 사람에게 50GB 이상 주지 않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해결책을 찾아 파일을 업로드 중인데, 업로드 속도가 ^오^.... 고작 800메가짜리 올리는 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지 모를 일이다. 아악!
2015년 5월 4일 월요일
TMZ의 인종자별?
미국 매체인 TMZ에서 인종 차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영상을 확인해보았는데,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 만큼 노골적인 비하 발언이 있었다. 다만 이를 '인종차별'이라고 보면 약간 지나칠 정도로 거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논란에 대한 포커스가 흐려질 수 있다. TMZ 스탭들이 한 발언은 정확히 인종차별보다는 영어 발음을 비꼰 것이다. 두 개가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탭이 '영국 발음이었어도 다라했을거야'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미시적으로 정확히 찝어내자면, 인종차별 아래 하위항목으로 발음을 비꼰 것이라는 말이다. 허나 다른 스탭들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스탭에게 '쟤가 말하면 인종차별이 아니야'라고 하는 부분이나, 동양인 스탭이 본인의 출신지를 세탁하는 모습은, 히히덕거리고 있는 스탭 본인들이 이것이 인종차별의 뜻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뱉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각이 있음에도 행동을 했다는 것은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고, 사과를 해야 마땅한 일이다.
2015년 5월 3일 일요일
알약 두 개, 물 없이 삼켜
이센스는 '독'에서 스스로의 고뇌를 가사로 풀어쓰는 능력이 출중함을 보여줬다. 가사 속에 녹아있는 이센스의 상황은 사실 지금의 젊은 층이 가지고 있는 것과도 흡사하다. 아넥토트 앨범에서 기대했던 것도 더 성숙하고 훌륭한 리릭이었다.
그러나 이 음악이 표지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
만년필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만년필들을 보며, 저게 있으면 보기 좋은 필기체를로 글씨를 쓸 수 있겠구나, 라고 그만 착각을 해버린 나는 만년필에 대해 묘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년필이 내 손 안에 들려있다. 생일선물로 원하던 것을 받아 기분은 좋은데, 막상 생기고 나니 언제 써야할 지 난감하다. 그래서 일단은 무작정 써보기로 했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감상평을 적을 때. 아니면 공책에 생각나는 말들을 그대로 끄적일 때 쓰면 좋겠지. 만년필이 쓰는 맛은 대단해서 한 번 글을 쓰면 엉뚱한 말이라도 계속 쓰고 싶어지게 한다. 때문에 굳이 영화 리뷰가 아니더라도 가끔 낙서하면서 재밌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음! 의식의 흐름.
Hold that thought, don't let me go
이번 앨범 수록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While The Song Remains The Same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내 블로그는 본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는 것이었는데
자꾸만 글쓰기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갖게 된다. 그럼으로써 글을 쓸때마다 조금씩 더 고민하게 되는데, 이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글쓰기래봤자 초등학생 때 일기장 몇 권 쓰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와서는 짧은 글이나 끄적이던 내가 글쓰기에 욕심을 갖게 되니 난감하다. 욕심을 갖게 되면 이상을 이루기 위해 고민을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만의 개인 블로그에서조차 글을 쓸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기 위한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도 들고.
앞으로는 보다 논리적으로 써보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망설임이 서린다. 아, 글쓰기 참 어렵다. 그런데도 계속 써야만 머릿 속을 정리할 수 있으니 마약과 같다. 여기저기서 마약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의 글쓰기는 정말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병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기야 이 정도로 병들었을거면 진작에 다른 일로 몸져 누웠을 것이다.
밤이 깊었다, 방향을 위해 컴퓨터 옆에 놓아둔 디퓨저가 새콤한 시트러스 향을 낸다. 자야할 시간이라고 코를 간질인다. 그래, 이만 자야지. 로그오프.
앞으로는 보다 논리적으로 써보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망설임이 서린다. 아, 글쓰기 참 어렵다. 그런데도 계속 써야만 머릿 속을 정리할 수 있으니 마약과 같다. 여기저기서 마약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의 글쓰기는 정말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병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기야 이 정도로 병들었을거면 진작에 다른 일로 몸져 누웠을 것이다.
밤이 깊었다, 방향을 위해 컴퓨터 옆에 놓아둔 디퓨저가 새콤한 시트러스 향을 낸다. 자야할 시간이라고 코를 간질인다. 그래, 이만 자야지. 로그오프.
우리들이 돈을 내고 소비하는 것
나는 선물을 구매할 때 '프리미엄'이 붙어있으면 못사고는 못배길 정도로 (심각한)구매욕을 느낀다. 내가 구매욕을 느끼는 프리미엄들은 유니크한 디자인이나 선물을 구매할 시 유니세프에 기부금이 전달된다는 것 등등 여럿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이 '한정판'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구매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정판이라고 하면 왜인지 더 멋져 보이고, 더 쓸모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리셀까지 고려하면서 구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프리미엄이란 것은 무시무시한 나름의 광고효과를 낸다.
얼마 전 들었던 '안나 와인오프너'의 이야기도 프리미엄의 한 종류에 관한 것이다. 이 와인오프너에 얽힌 이야기는 소비자의 구매욕을 증가시킨다. 제작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소비자들은 혹시라도 내일, 아니 다음주나, 언젠가는 쓸일이 있겠지, 혹은 장식용으로 둘 목적으로 해당 물품을 구매한다. '안나 와인오프너'가 얽힌 이야기 하나 없는, 그저 귀여운 디자인의 오프너였다면 이만큼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프너 너머에 있는 제작자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보고 돈을 지불한 것이다.
조금 다른 예시이긴 하지만, 열기가 좀 식긴 했어도 아직 열풍을 몰고다니는 '허니버터칩'도 이와 흡사한 판매방식을 보인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허니버터칩의 맛은 특출나지 않다. 팬에 버터를 녹여 얇게 썬 감자를 튀기고 꿀을 넣어 조린, 딱 그맛이다. 처음 출시될 당시에는 생소한 맛이었겠지만 이제는 각종 '허니버터'가 난무하며 꿀벌이 고통받는 상황일 정도로 흔한 맛이 되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허니버터칩은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것일까? 답은 과자의 '희귀성'에 있다. 제품을 만든 회사는 현명하게도, 생산 라인을 많이 늘리지 않고 적은 수량으로 제품을 파는 방식을 택했다. 그럼으로써 허니버터칩은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려고 찾아보니 없는' 상품이 되었다. 프리미엄이 붙은 허니버터칩은 광풍을 몰고 다녔다.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것'에 현혹되고는 하는데, 적당히 높은 수준의 질을 가진 운동화나 옷, 화장품 등에 보다 높은 가격이 적용되면 과시용으로라도 구매하려 하는 것이나, 도저히 재고량이 늘어나지 않는 에어조던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구매자들이 그 예다.
이처럼 사람들이 돈을 주고 소비하는 것은 해당 상품의 질이나 디자인 뿐만 아니라, 그것에 얽힌 이야기나 화제 등의 프리미엄도 있다. 안나 와인오프너를 사면 오프너 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사랑 이야기 또한 구매하는 것이고, 허니버터칩은 과자와 질소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과 의식을 먹어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프리미엄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써 프리미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최대한으로 마케팅 수단을 분석하여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이 지갑의 돈을 지키는 좋은 길일 것이다. 마무리가 어설프지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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