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7일 수요일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古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김수영, 시집『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지금 상황과 잘 맞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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