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뒤늦은 잔혹동시 논란에 대한 소고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보는 시리즈 도서가 있다. 바로 <한니발>. <양들의 침묵>부터 시작해서(중간에 <레드 드래곤>이 있지만 읽어보질 못했다. 아쉽.) <한니발 라이징>까지 쓰여진 시리즈는 꽉 짜여진 긴장감과 강한 흡입력으로 몇 번을 읽어도 언제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 즈음에 즐겨 읽었다. 한니발 시리즈를 읽은 후에는 왜인지 이전에 읽었던 큰 글씨가 따박따박 박힌 책들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일부러 읽기 쉬운 도서들보다는 어려운 책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허나 그럴때마다 같이 간 어른이 늘 나를 말렸다. 그런 책들은 나이가 좀 더 든 다음에 보라는 말도 덧붙여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의문스러웠다. '왜 어리다고 어려운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거지?'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넌 아직 어리니까'였다. 이 무슨 궤변인지.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11039461&code=940100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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