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정당한 폭력은 넌센스. <디케의 눈>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시험기간이란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나는 공부를 몰아서 하는 스타일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공부라면 평소에도 틈틈히 복습하며 익혀두지만, 세상 공부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더 많았다.

 그 끔찍함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정점을 찍었다. 마치 손오반의 죽음을 본 트랭크스가 초사이어인으로 각성하기라도 하듯...
 그래서 나는 야자시간에 책을 읽었다.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고리타분한 제도가 있었지만, 대출할 수 없다면 집에서 책을 가져와 읽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재학 당시 읽은 책의 대부분은 야자시간에 읽은 것이다.

 지겨운 야자시간에는 소설이든 비소설류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나는 본래 비소설 류의 책을 더 좋아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 야자시간에도 나는 비소설 책을 골랐다. 금태섭 변호사가 쓴 <디케의 눈>. 일전에 다른 책에서 소개된 적이 있어, 눈에 띈 김에 빌려 보기로 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몰랐던 법과 처벌 이면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형제도와 폭력이다. 사형제도 역시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나중에 쓰기 위해 따로 구분했다. 아무튼 이 두 Things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은 절대 감정적으로 사고해서는 안되고,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 교훈은 지금까지 나의 매일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한번씩은 폭력을 경험한다.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이거나. 그리고 이런 말까지 듣는다. "네가 맞을 만한 짓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라고 본다.
 정단한 폭력은 넌센스다. 폭력은 절대 정당할 수 없다. 때로 어떤 이들은 정당한 폭력을 주장하면서 함무라비 법전의 예시를 들고는 하는데, 이는 함무라비 법전을 매우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다. 법전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앙갚음을 해라'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저지른 일에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무겁고 철학적인 뜻이다. 또한 당한 일 이상의 심한 보복을 막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법전을 제멋대로 가볍게 해석하지 말았으면 한다.
 폭력은 왜 정당화 될 수 없는가? 우선 폭력이 정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견들을 생각해보자. 가령 누군가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사람들은 그에게 폭력으로써 앙갚음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할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정당한 폭력을 외치는 이들은 '사회 범죄율의 감소'와 '정의 구현'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우선 폭력은 결코 사람들의 범죄 심리를 낮춰주지 못한다. 이는 너무도 저명한 사실이라서 뭐라 더 이상 설명하기도 귀찮은 대목이다. 과학적으로 폭력적 처벌이 범죄율을 낮춘다는 근거는 없다. 조금만 조사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패스.
 그리고 폭력이 정말로 정의를 구현하는가? 우선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폭력을 저질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폭행자에게 우리가 같은 폭행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 <왓치맨>에는 이러한 글이 나온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마찬가지이다. 폭행자는 누가 폭행하는가? 폭행자에게 폭행한 사람은 누가 폭행하는가? 폭력을 저지른 사람에게 폭력을 저지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다 효과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거부한 채, 감정에 몸을 맡겨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짐슴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인권'을 들이민다.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한 자는 똑같이 인권을 침해받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챙겨보아야 할 자는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피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인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사건 후 처리와 치료에 달려있다. 인권을 빌미로 피의자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피해자를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심리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이기적 행위이다. 폭력으로 되갚아 주면서 '음 그러면 피해자도 만족했을거야ㅎㅎ'라며 자신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좀 더 가까운 상황들을 보자. 정신나간 10대가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른바 '사랑의 매'를 들어 아들을 훈육한다. 아들은 매를 맞고 정신을 차린다. 해피엔딩? 전혀 아니다.
 사랑의 매는 허울 좋은 보복이다. 이름만 들었을 경우에는 아, 정말 자식을 사랑하기에, 잘 되라고 쓰는 매이구나, 하는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실은 매를 드는 이유가 따로 있다. '아버지가 화가 났기 때문에' 매를 드는 것이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화를 돋우지 않는 선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아버지는 매를 드는 대신에, 아들에게 설교함으로써 잘못을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화가 났기에, 자신의 화를 풀 방법으로 매를 든 것이다. 또 여기서 '작은 잘못은 말로써 훈계하고, 큰 잘못은 매로싸 훈계하는 것이다.'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크고 작음이 어디있는가? 크고 작음은 헌법에서 규정하는 범죄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법은 폭력적 처벌을 막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잘못은 크고 작음이 없다. 바늘 도둑에게는 설교하고 소 도둑에게는 매를 드는 것은 넌센스이다. 잘못을 저지름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악'이 움터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잘못이든지 사람이 중심이기에 같은 것이다. 

 마무리 어떻게 하지?

그간 들은 앨범들

자넬 모네 - The Electric Lady

10cm - 1.0

누자베스의 마지막 앨범

우야마 히로토

제프 버낫

나는 왜 구너인가, 축덕 연대기 2부

막상 2부를 쓰려고 하니까 자신이 없다.

나의 축구 인생의 절반은 아스날이다. 아마 앞으로는 더 많은 시간을 아스날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1부에서는 내가 왜 축구에 빠졌는가에 대하여 간략하게 풀어보았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든지 스포츠카나, 스포츠, 섹스에는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고, 나는 그 중 하나에 단단히 미쳐있었다.
만일 여자와 축구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깟 공놀이를 포기할 것이지만...

아무튼 단단히 미쳐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전에 썼던 이야기 중에 내가 미처 생각나지 않아 못 쓴 이야기들도 있다.
정제되지 않은 채 막 쓴 글이라서 몇몇 기억이 숭숭 뚫려있는 상태였다. 이 블로그의 모토는 고라니와 의식의 흐름 기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축구에 빠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2002년 월드컵과 한국 A팀 때문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A팀에 관심이 없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억지로 대표팀을 맡아 팀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최강희 감독이, 숱한 몰매를 맞듯이 물러나버린 것에 매우 실망을 느껴서 대표팀에 관심을 껐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 대표팀이 강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상 한국 국대는 아시아에서만 나름 이름을 떨쳤을 뿐이지, 국제 대회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둔 적도 없다. 단순히 심판 버프를 많이 받은 2002년의 4강이나, 몇 해외파 선수들의 반짝 활약으로, 한국이 강팀이라는 이상한 의식이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최근 아시아에서도 그 용맹을 떨치고 있지 못하는 중인데...
조광래 감독이 팀을 개판으로 만든 후, 그 뒷수습을 맡아 팀을 본선에 올려놓은 영웅이 왜 욕을 먹으며 떠나야 했는지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실은, 내가 축구를 알게 된 데에는 게임도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이다.
2008년에 피파를 시작했다. 온라인이 아니라 오리진 게임이었다. 그 후 위닝으로 갈아타면서 다양한 리그의 많은 팀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팀의 선수들도 스쳐지나가듯이 조금씩 알아나갔다. 그러다가 FM과 피파를 다시 접하면서 지금의 클럽 지식이 생겨났다. 인상깊은 기억은, 피파08당시 이니에스타의 나이는 23살이었다. 능력치가 80쯤 되었는데, 23살에 80이면 좋은 유망주이겠거니 샀는데 왠걸, 거의 성장하지 않아 팔아버렸다. 지금의 이니에스타를 생각해보면 당시 피파가 그의 가치를 얼마나 낮춰 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아스날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이전에 밝혔듯이 내가 아스날의 팬이 된 계기는 에두아르도의 2골 때문이었다. 그 후 가뭄에 콩 나듯 아스날 경기를 챙겨보았다. 아는 선수라고는 에두아르도와 파브레가스 뿐. 스스로 아스날 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맨유 베스트11은 알아도 아스날 베스트는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중3 때 즈음에 갑자기 아스날에 통달하게 되었다.
내 친구 중에 이탈리안이 한 명 있는데 그 녀석은 밀란의 팬이다. 내가 중3 즈음에 아스날과 밀란이 챔스에서 맡붙은 적이 있는데, 아스날이 이겼다. 아마 그 소식을 녀석에게서 듣고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응원하기 시작한 당시, 아스날은 영광의 끝자락에 있었다.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남들은 그깟 공놀이에 뭘 그렇게 일희일비하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롤러코스터처럼 올라갔다 내려가는 리그 순위 덕분에 시즌이 끝나면 폭삭 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어떻게 챔스는 매년 진출했었다. 참 특이하게도.
샤다라빠가 그랬던가. 팀이 연승할 때보다 연패할 때, 덕력이 상승한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팀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금방 떠나는 팬들도 있었지만, 나는 아스날에게서 동질감을 느꺘다. 안타까우면 더 응원하게 되는 그런 심리. 바로 그것이었다.
돈을 쓰지 않는 벵거를 원망하고, 크론케를 욕하고...그렇게 시간을 보낼때 맨유는 계속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꼴보기가 싫었다. 그래도 다음 시즌은 나아지겠거니 매번 생각했었는데....

파브레가스가 이적했다.
나스리? 나스리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파브레가스가 떠난다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지만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팀의 에이스가 떠난다. 에이스가 아니라 아스날의 전술 그 자체인 선수였다. 세스크가 떠나고나서 한동안은 팬질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시즌에 반 페르시가 터지면서 팀을 끌러올려주더니...

페르시가 이적했다.
그때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니들이 나가서 얼마나 잘 되나 보자. 포돌스키와 지루, 카솔라가 영입되었다. 카솔라와 포돌스키의 영입은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런 세계적인 선수들이 여기에 온걸까? 이미 내 의식에서도 '우리 팀은 좀 그래'라는 생각이 박혀있던 탓이었다. 덕분에 팀은 챔스권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다음 시즌에 외질이 영입되었다.

여기서부터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은 리그 2위. 솔직히 리그는 포기했다. 맨시티가 너무 강하다. 대신에 FA컵이라도 우승하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나는 왜 구너인가, 축덕 연대기 1 부

이전에 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구너이다. 아스날 팬이다.
그런 내가 어덯게 아스날 팬이 되었는가 하면.....

내 지금까지의 축구 인생에는 3가지의 큰 계기가 있었다.

일단 이전에 먼저, 내가 축구를 접한 계기부터 생각해보자.
한국에 축구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 개화기 즈음에 선교사들이나 영국 군인들이 들어와 전파한 시점이다. 특히 영국 군인들이 많은 역할을 했는데, 뭐 사실 역할이라고 해봤자 축구를 알려준 것 밖에는 없지만 시작이 반이라니까 뭐 아무튼, 그 사실 때문에 한국 축구가 축구종가 영국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1994년에 내가 태어났다.

한국에서 축구는 큰 인기 스포츠 중에 하나이다. 야구와는 양대산맥. 사실 한국 프로축구는 그 시작때부터 인기가 있었다. 뭐 최근에 와서 관중들이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도 결코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대표 경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국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경기장에 직접 가거나, 티비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경기를 지켜본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축구라는 것을 인식하고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8살일때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2002년 한국은 축구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카오스 상태였다. 광란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나라가 축구에 미쳐있었다. 국민들은 IMF라는 힘든 고난을 버티고 마침내는 월드컵까지 개최한 조국과 자신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무튼 2002년 월드컵이 내가 메이저 축구를 접한 첫 번째 계기이다. 당시 한국은 4강에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는데, 8살이었던 나는 그냥 나의 조국이 8강쯤은 가볍게 올라가는 팀인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정말 기적이었다는 것과 석연치 않은 판정 덕도 꽤 봤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8살의 나는 프로들이 펼치는 메이저 축구를 접하였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박지성과 이영표는 각각 J리그와 K리그를 떠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에 입성한다. 그 중에서도 아약스, 페예노르트와 함께 3강을 자랑하는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PSV와 페예노르트가 꽤 강했다. 지금이야 네덜란드 리그가 스코틀랜드 리그와 함께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그중에서도 아약스가 겨우 벌어먹고 살지만...과거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꽤 강한 리그였다. 아무튼....2004년에 박지성이 밀란....그당시에는 정말 최고의 팀이었던...지금은 밀란도 아주 많이 떨어졌다. 아무튼 박지성이 챔스에서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고, 200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명문이었던 맨유로 이적하게 되면서 나의 구 번째 축구 인생이 피어난다.

근데 그러고 보니 PSV나 밀란이나 맨유나 박지성과 관련된 팀들은 요즘 성적이 영 시원치 않다.

지금 한국에 있는 많은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아마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했던 그 시점부터 EPL을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도 그러하다. 심지어 부끄럽게도 맨유의 팬이기도 했다. 내 흑역사 중 하나이다. 맨유에서, 무리뉴를 보고 첼시로, 바르샤로 계속해서 팬심이 이동했다. 제대로 된 서포팅을 당연히 했을리가 없다.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그러다가 보게 된 경기가 아스날의 매치였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에두아르도가 부상 복귀 후 첫 출전하는 경기였는데, 2골이나 넣었다. 그리고 또 부상을 당한 건 함정....

아스날 이야기는 매우 길어질 것 같으니 나눠 써야겠다.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라이프 오브 파이

간략하게 말하자면 몰입도가 좋은 모험, 성장, 고난 영화



인 줄 알았으나 훼이크다 X신들아!!!!!


라이프 오브 파이. 그리고 포스터.
제목만 들어보면 수학 영화일 것 같은데 포스터를 보면 호랑이와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일 것 같은 영화.
그러나 실상은 둘 다 전혀 아닌 영화이다. 아니, 후자는 조금 해당된다.

사실 이 영화는 볼 계획이 전혀 없던 영화였다. 그냥저냥 지나가는 말들로만 들어보고 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영화였다. 그런데 하이버리에서 이 영화의 소개글을 보고는 충동적으로 호기심에 휩싸였다. 안그래도 이전에 충동적인 감성에 휘말려 아무거나 게획을 세우고는 바로 그 다음날에 전부 취소시키는 일이 잦았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 흥미가 있었던 탓이다.

영화의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가 막히다. 영상미가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초반에 파이의 동물원부터 시작하여 리차드 파커와 함께 표류한 여러 날들까지 사람을 감탄시키는 뛰어난 영상미를 뽐낸다. 그 아름다운 장면들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파이가 겪고 있는 고통들이 잊혀져버린다. 그것은 비단 관객뿐만 아니라 주인공 파이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불빛을 내는 해파리가 떠 있는 바다에 손을 휘젓는 파이의 모습이 그러하다. 곧 다시 시련을 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영화는 내내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침몰하는 배에서 떠나 구명보트에 간신히 타게 된 리처드 파커는, 표류 초반에는 내내 파이와 대립 관계를 보이며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가뜩이나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있는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더욱 두려워한다. 그래서 구명보트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다른 보트를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고는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악화되면서 파이는 평소엔 하지도 못했을 용기있는 결심을 내린다. 파커와의 공존을 택한 것이다. 파이는 이후 파커를 조련하기 시작했고, 동물원장의 아들답게 훌륭히 호랑이를 조련시킨다.
파커가 조련된 이후부터 영화는 파이와 호랑이의 관계를 마치 거울을 마주보는 사이처럼 보여주고 있다. 파이와 파커는 같은 상황에서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파이가 굶주리면 파커도 굶주리고, 파이가 섬을 찾아 신나면 파커도 미어캣들을 사냥하며 뛰놀고는 한다. 그리고 그들이 겨우 멕시코 해안에 당도했을 때, 파커는 그대로 파이의 곁을 떠나버린다.

딱 여기까지 영화를 봤다면 이 영화는 소년의 모험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는 이후 병원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다. 단순히 호랑이와 소년의 모험으로 보였던 영화가 그 초반부터 아주 끔찍한 일화를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조금만 말해보자면, 파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탑승했던 것들은 동물들이 아니라, 전부 사람들이었다.

파이는 영화 내내 신을 울부짖는다. 호랑이 그리고 신. 파이에게는 그 둘이 무엇이었을까.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여행 썰 하나 - 겨울 괴담 '고라니의 공포'

내가 이 블로그를 개설할 당시에 컨셉을 '고라니'로 잡으면서 고라니에 대해 조사했던 적이 있다. 깊게 조사한 것은 아니고 고라니의 모습과 영어 이름, 학명 정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 때 우련히 고라니 울음소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고라니 울음소리는 내가 이전에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다. 이번 썰은 그 울음소리에 관련된 것이다.

부천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그러니까 이틀 전 일이다.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안동의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동기의 물건을 가져다주려고 방을 나섰다가 돌아오는데, 앞산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매루 그로테스크한 소리였다. 여자의 비명소리와 비슷했다. 내가 방으로 돌아오자,  나 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 소리를 듣고 공포에 잠겼다. 이 깊은 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그러다 나는 어렴풋이, 그 소리를 기억해내었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

그렇다. 그것은 고라니의 울음소리였다.

내가 전에 올린 동영상 소리랑 똑같다. 진짜로.

내가 곧 그것이 고라니의 울음소리 임을 동료들에게 전했고,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잊고 그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기 위해 나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라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끝.

집으로 돌아옴

부산-경주-영덕-안동을 돌아 어제 부천으로 돌아왔다.
여름 원촬때도 느낀거지만 집 근처에 오면 참 기쁘고 반갑다. 부천이 아니라 인천이나 서울에만 도착해도 참 상쾌하다. 여행의 끝은 귀소본능.

이번 원촬에선 바다를 굉장히 자주 보았다. 이동 경로가 동해를 따라 돌다보니 뭘 타고 어딜가든 바다가 보였다. 탈 것은 주로 버스였다. 지하철도 타기는 했는데 그건 부산에서 부산 지하철을 딱 두 번 타본게 전부였다. 나는 매일 버스를 타느라 멀미를 걱정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몇 년전부터는 차를 타면 자버리는 버릇이 생겨서 걱정만큼 많이 시달리지는 않았다.
이번 원촬의 특이점은, 먹을 건 다 먹으면서 다녀왔다는 점이다. 부산에서 밀면을 먹고, 경주에서는 찰보리빵을 먹었다. 비록 영덕 대게와 안동 찜닭은 경비 문제로 먹지 못했지만 이정도면 그래도 잘 먹고 돌아다닌 거다... 가난한 대학생의 여행은 그렇다.

여행썰을 풀고 싶은데, 일단은 킵해두고, 나중에 재미있던 거 생각나면 그 때 적어야겠다.

지금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면서 글을 적고 있는데 타밀어가 나와서 놀랐다. 인도인이 '엄마', '아빠', '형님'을 울부짖는데 순간 한국어가 나온 줄 알았다. 타밀어에 대해서도 아주 얉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좋은 영화...인지는 다 보면 알겠지.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술 마시다 쓰는 주저리

원촬의 꽃은 술자리. 매일 밤마다 알코올을 마신다. 여름에는 제주도에 간 터라 한라산 소주를 마셨는데, 이번 부산에서는 생전 알지도 못한 소주를 마시고 있다. 하기야 무슨 술을 마시던 무슨 분위기이던 뭐가 중요하랴. 취하려는 목적은 다 같은 것인데.

그러나 이번 촬영은 어째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는다. 느리게 마시는 탓인지 아니면 술이 잘 들어가는 탓인지. 전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술을 마시러 간다. 취하려는 목적은 항상 같다. 일목요연한 소설과도 같다. 간결하고 확실하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달 보고 싶다.

오늘의 고라니 in 부산

오늘 간 곳은 자갈치 시장과 태종대.
나는 본래 사람많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저 남들을 바라보며 관찰하는 것은 좋아한다.
쌍방향의 많은 교류는 피곤하지만 일방적인 관찰이야 별로 피로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시장에서 모종의 거래...들이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보는 건 나름 좋아한다.
자갈치 시장의 풍경도 마음에 들었다. 갈매기들의 격한 환영을 받은 후 짠내가 풍성한 아주머니들의 장터를 둘러보았다. 짠 소음은 정겹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정겨운 시장이었다. 사진은 죄다 갈매기 뿐이었지만.
태종대는 조금 지루했다.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몸의 피로가 더하여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그곳에 대해서는 깊은 감상이 없다. 이만.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동아리 원촬 부산행

이번 동아리 원정촬영은 경상도로 왔다.
부산은, 그 중에서도 사상구는 뉴스에서나 접해보던 지역인데 막상 와보니 정말 별거 없다. 사실 숙소를 구하느라 돌아다녀서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던 탓이다.
곧 촬영을 하러 나간다. 이 글은 이만 줄여야지.

2014년 1월 12일 일요일

양들의 침묵, 한니발 그리고 라이징

나는 다독하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책을 많이 접해왔다.
초등학교때에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도서 대출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일주일에 네권씩 책을 빌려 읽기도 했다. 방학때에는 10분을 걸어가면 있는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읽었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때 부터는 학교 도서관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면서 상당히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전까지 그리 불편했던 것도 아니지만은.

나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타국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나이별에 따른 권장도서가 있다. 학교 도서관이나 교실에는 항상 권장도서 목록을 프린트한 종이가 붙어있었다. 자식 교육걱정에 그 마음 갈대같아지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그런 것에 혹하여 아이들에게 일히기도 했다. 아마 요즘은 더할것이다. 치맛바람은 1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매일 거세지고 있으니까. 암튼, 그 권장도서에는 각 나이에 맞게 추천하는 책들이 적혀있었다. 아 이건 또 딴 이야기인데, 우리 학교에서 권하는 고등학생 권장도서의 수준은 정말 안쓰러움 그 자체였다. 아무리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기로서니, 중학교때 읽었을법한 도서를 추천하다니....애초에 나는 권장도서대로 읽는 것도 싫어한다. 무언가 틀에 짜여진대로 책을 읽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틀에 맞춰진대로 독서하는 것은 틀에 맞춰진 인간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이다. 국가에 충성하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며, 분수에 맞게 사는 그런 틀. 그래서 나는 권장도서를 오히려 기피했다. 책을 읽다가 그것이 권장도서임을 알게 되면 집어치울 정도였으니까.

아 아무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권장도서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위에서 말한대로 고등학생 권장도서 수준이 이렇게나 떨어지는데, 하물며 초등학생은 어떨까? 라고 생각해봤는데 초등학생때는 사실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을 아무거나 집어 읽어도 좋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무거나 잡어 읽었다. 예쁜 겉표지에, 큰 글씨로 적혀있는 책들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서서히 서점에 있는 책들에 눈을 돌렸다. 그 때 읽은 책이 바로 한니발 시리즈이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그리고 라이징. (사실 시리즈 한 권이 더 있는데 그건 아직도 읽어보질 않았다.) 나는 한니발을 정말로 좋아했다. 일단 책이 정말로 재미있게 쓰여졌다. 그리고 스탈링과 한니발이 벌이는 두뇌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한니발이 가지고 노는 수준.)과 긴장감이 흐르는 사건. 사람들의 이해 관게에서 나오는 다양한 반응들.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를 네번정도 읽었다. 학교 돌아와서, 학원 돌아와서 그리고 그냥 집에 있을때도 읽었다. 당시 나는 학권이 밤 11시에 끝났다. 그 때는 학원규제도 없어서 학원들이 미쳐 날뛰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쳐 돌아온 나는 한니발을 읽고 졸리면 잠이 들었다. 지금은 왜 이걸 못하는지....

책의 내용만 보면 끔찍한 천재 살인마와 강하지만 여린 수사관이 펼치는 괴기한 살인극의 추리지만, 나에게는 어릴적 동심으로 이끌어주는 그런 책이다. 책의 리뷰라고 쓸 것도 없다. 그냥 읽으면 재밌는 책이다. 구태여 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양들의 침묵 영화도 훌륭하다. 책과 비교를 하자면, 한니발 박사의 면모가 깊이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화면의 구성이나 효과가 좋다. 

2014년 1월 9일 목요일

말은 내뱉은 순간 사라진다.

그렇지만 내뱉은 말들은 그림자처럼 우리 뒤를 쫓아다닌다.

말을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하고 해야겠다.
내 기분이 산산조각났다고 막 행동했다가, 그 파편에 다른 누군가가 다치면 참으로 억울할텐데.

찰리 채플린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2014년 1월 8일 수요일

이번엔 알바하다가 든 생각

내가 하는 알바는 극히 단순한 업무라서
일을 하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동시작업이 된다.
참 죠은듯.

암튼 알바하다가 든 생각이 인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우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자살.
자살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자살을 한다고 해서 사후에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자살은 삶의 포기이지, 인권의 포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
그리고 사후에도 사람에 대한 예우를 갖춘다는 것은 인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다면 사후에 누구에게나 온갖 비난과 욕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인권을 포기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겠다.
대표적 인물은 히틀러나 괴벨스. 전쟁을 일으키고 대랑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인권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때에 사라지는 것일까?

그러나 인권은 존재로써 가치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인권은 존중받음으로써 가치를 지닌다. 다시말해, 존중받지 않는 인권은 그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들의 인권 문제를 놓고 큰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인권이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그에게는 인권이 있으니까. 대신 그 인권을 존중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싸움이 더 바람직하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자는 마땅히 그의 권리도 앗아야 하는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과 비슷한 주장이다. 그러나 일단 처벌이라는 것이 무엇이든 인권을 일부 침해하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렇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 자는 어느정도까지 인권을 존중해야 할까? 이를 두고 법은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형량을 늘릴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처벌법을 개정할것인가?

개인적으로는 형량을 늘리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선량한 이웃은 될 수 있지만, 스스로 사도임을 자청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뚜렷하지도 않은데다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책임조차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저 법을 고쳐 적용하는 것이 낫다.

홍진호는 대체 왜 까이는가

콩은 그렇게 까는 게 아니야
콩은 그렇게 까는 게 아니야

2014년 1월 7일 화요일

모름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른 말로는 소크라테스의 '무의 인지'나 델피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이 실로 잘나고 똑똑한 사람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무지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무식한 거 알고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은 포함 안됨.

사람들, 특히나 남성들은 이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 뵌다. 나도 남자라 잘 아는데, 남자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다. 가끔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넙죽넙죽 엎드리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도 결국 일정한 위치에 서게 되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무딘 애를 쓴다. 특히나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 아는 체를 하고 싶은 마름이나, 누군가 자신을 논파했을 때 입는 마음의 쓰라린 상처 등... 자존심 없이는 살기 힘든 생물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때로 혼동하는 이가 있는데, 자존감이 센 사람은 그 누가 자신에게 충고하여도 결코 짜증을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정말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존심은 좀 다르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에 확신이 없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굉장히 신경을 쓰기 때문에,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창피를 주거나 하면 매우 화를 낸다. 그러면 분위기는 금세 식어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불통.

다시 말해,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통이다. 남이 사실을 말해줘도 믿으려 하지를 않는다. 자신이 잘못된 걸 알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우리는 모름을 인정할 때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 가령 내가 동양의 화폭에 대하여, 얄팍한 지식으로 아는 체를 할 때에는 누군가가 진리를 말해주면 나도 아는 거였다면서 얼버무리거나, 무시하고는 할 것이다. 더 웃긴 것은 그런 사람이 나중에 비슷한 자리에서는 자신이 논파당했던 그 사실을 아는 체하며 떠벌린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렇다. 그러나 내가 모름을 인정하고 자문을 구할 때, 비로소 나는 더 깊고 많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지를 인정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난데없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요즘 나라꼴때문에 그렇다. 나락갈대처럼 대통령한테 이쁨받는 만화라도 그려야할런지 원....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모름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불통이다.

추신으로, 노무현을 찬양하는 쪽이든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쪽이든 고인은 곱게 좀 놔줬으면 좋겠다. 그가 뭐 그렇게 칭찬받을 만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괴롭힐 만큼 못한 것도 아니다. 우리 집은 노통당시 집값이 올라서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능지처참을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인생사 새옹지마

월콧 시즌 아웃

새옹지마......

나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가끔은 이렇게 주문을 거는......

내가 좋다......

하....

뜬금없이 든 생각인데

노래 '거의위 꿈'은 정말 잔인한 노래인 것 같다.

최근 무도에서 밀라노를 가느니 마느니 하면서 노홍철과 정준하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던데, 솔직히 말해서 밀라노에 서려면 1. 훌륭한 모델이거나 2. 옷 잘입는 슈퍼스타이거나 할 텐데 둘 중 누구도 전자나 후자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밀라노 가겠다고 살을 그렇게 많이, 그렇게 빨리 빼는 것은 건강은 물론이고 피부도 많이 상하게할텐데.... 그리고 밀라노에 서건 안서건, 지금의 그 호리호리한 모습은 이후 사라져버릴 것 아닌가? 물론 둘이 열심히 몸을 유지하면 또 모르지만 그럴거 같지는 않고....

그러다가 생각이 '거위의 꿈'에까지 미쳤다. 노랫말대로라면 세상은 참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다. 자신이 게속해서 노력하면 결국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노래의 허점은, 노래의 주인공이 결국 꿈을 이루었는지 어떤지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위는 어쩌면 날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끝없이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도 이와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은 분명히 있다. 물론 어떤 일이든지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가장 중요한 열쇠이지만, 아무리 열쇠 구멍에 맞추어 잘 갈고 닦은 열쇠일지라도 분명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문들은 애초에 그에 맞는 열쇠를 지니고 태어난 이가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맞지도 않는 열쇠를 계속해서 들이밀며 세월을 허비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결국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아야 한다.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러하듯, 꿈도 그 이면에는 비극을 숨기고 있다. 현실과 꿈. 인생을 살아가다 선택의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언제, 어떤 것을 취해야 할까?

2014년 1월 6일 월요일

피버피치는 언제봐도 좋은 영화이다.

원작은 닉 혼비의 소설인데 아직 그것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영화만 몇번을 봤는데 볼때마다 사람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십수년간의 기다림이 그 결실을 맺는 순간, 그것을 지켜보는 팬의 마음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세상을 손에 쥔 듯한 기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런 기분을 못느껴보았다.
나 역시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하게 이 클럽을 암흑기때부터 응원해왔기 때문에 우승은 커녕 절망적인 매 시즌을 지켜봐야했다.
이번 시즌에 그 열매를 볼지 어떨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인간적으로 이제는 우승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나 클럽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냐고 의아해한다. 좋은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좋아졌고, 적어도 내 인생 중 절반을 함께 한 클럽인데 좋은 게 당연한거 아니겠는가.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황금 물고기>를 완독한 것은 이제 작년이 되어버린 2013년도 12월의 일이지만,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10년 여름 무렵이다. 당시의 나는 정말로 글을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끈질기게 글을 찾아 읽는 소양이 부족해졌다. 반면 고1의 나는 모든 책을 읽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도서부에 입부할 만큼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글쓰는 일도 좋아했었던터라 단편소설도 몇 개 지어보고는 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책은 읽는 것과 쓰는 것이 다르구나.
아무튼 2010년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한 <황금 물고기>는 얼마 안가서 내려놓아야 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보다 내용과 필체가 가벼운 책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의 내가 일본과 서양 소설 특유의 유머러스한 책에 빠졌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때문에 <황금 물고기>는 내 기억으로는 아마 주인공 라일라가 공주님들(이라고 라일라가 불렀던 여인들)이 있던 숙박소에 머물렀던 것에서 책을 놓은 걸로 안다. 나는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 책을 다 읽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은 순간 그 3년이라는 시간동안 이어져 온 이야기를 끝내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라일라'라고 하는 소녀가 유괴되어 '랄라 아스마'라고 하는 노인에게 팔려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이후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의 집을 떠나 여러 곳을 떠돌게 된다. 때로는 쫓기기도 하고, 때로는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행복해하기도 한다. 그녀의 여행지는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 모로코로,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미국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정체성이 깃들어있는 고향의 땅에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간략한 줄거리의 내용이다.

책을 읽어보면 라일라라고 하는 소녀의 기구한 인생과 함께, 그녀의 삶에서 오는 드라마틱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라일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코드인 '음악'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음악은 그녀를 유혹하는 치명적 매개로 등장한다. 그러나 음악이 그녀를 해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만남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써 혹은 그녀의 삶을 보다 빛나게 해주는 존재로써 등장한다. 또한 그 음악과 함께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개성있고 하나씩 장기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다들 한 가지씩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라일라는 그들과 관계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때로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아간다. 그 길의 끝은 그녀의 조상이 숨쉬는 땅이었다.

이러한 라일라의 인생을 르 클레지오는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덤덤하면서도 라일라가 껵은 일들과 그녀의 심리를 미세한 부분까지 써 내려간다. 나는 문학동네의 번역본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글쎄 원어로 읽었으면 더 감미로웠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2014년 1월 4일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잠긴 생각

이건 내가 이전에도 했던 탐구와 망상인데, 혜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저히 할 것이 없어 다시 간추려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용은 자본주의와 개성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서로가 정비례 관계인지 반비례 관계인지 골똘히 망상에 잠겨보는 것이다.

지구가 한바퀴를 돌때마다 개인의 개성은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만큼 다양한 개성이 존중되던 시기가 있었을까 싶다. 현대는 그 어떤 과거의 시기와 비교해보아도 개인의 특출난 탤런트와 생각을 보다 존중해주는 시기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정관념에서의 계속된 탈피와 여유로워진 사람들의 생각이 주 원인이 될 것이다. 특히 사람들의 여유는 개성을 뒷받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이라야 비로소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생각의 여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의 여유는 대부분 좋은 경제 환경에서 꽃피어난다. 과거 희랍 철학이 만발했던 그리스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철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유한 지중에 상권에서 오는 경제적 넉넉함이었다. 물론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지금만큼이나 개성을 존중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로 누군가는 여유로운 경제력이 개성의 존중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의 경제력은 그 시기의 다른 나라들의 경제상황과 비교하였을 때 여유로운 것이지, 현대의 경제력과 비교하면 한참 미미한 수준이다. 다시 말해, 경제력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여유도 단계별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의 고정관념, 이를테면 여성의 참정권 부정이나 노예제 등은 당시 그리스 경제력의 한계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멀고 먼 과거 그리스까지 가지 않고 과거의 한국을 생각해보아도 쉽게 경제력의 여유와 생각의 여유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괴멸하다시피 한 경제상황에서 생각의 여유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고, 독재정권이 들어섰음에도 크게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경제력이 상승하자 깨어난 지식인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은 피를 흘리며 싸운 결과, 민주주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경제력의 여유는 생각의 여유와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보이는 근거이다. 이렇듯 경제력이 생각의 여유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생각의 여유는 마침내 그동안 사회를 속박했던 고정관념들을 깨부수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동성애나 남녀평등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권위주의의 부정 등이 있다. 자본의 발달이 마침내 고정관념의 타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현상은 마침내 개인의 개성 존중에 이르게 된다.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은 획일화를 부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은연중에 그렇다고 믿고 있는  획일화된 사고를 부수고 자신의 신념을 갖는 것이 바로 개성이다. 때문에 역사속에서 개성이 가장 존중되는 현대가 바로 역대에서 경제력이 가장 높은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현 세계 경제가 매우 좋다고 말하는 바는 아니다. 경제력에서 오는 삶의 여유라는 것은 금방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여유롭게 사고해 본 사람은 이후에도 계속 그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경제력이 좋아졌다가 나빠진다고 해서, 삶의 여유가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개인의 생각또한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사고는 물질보다 빠르고 오래가는 법이다.

더하여,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 생각의 여유만이 개성을 꽃피운 것은 아니다. 경제적 여유는 곧 물질적인 여유를 말한다. 세계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많고 다양한 물질을 생산해 내었다. 이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물품이 더욱 많아졌음을 뜻한다. 가령 산업혁명 당시에는 개인이 스웨터를 사려고 한다면 공장에서 많은 수로 찍어낸 흰 직모 스웨터만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경제력의 상승에 따른 다양한 상품의 등장으로 개인의 선택이 다양해졌으며 취향을 보다 확실히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긴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지친다. 책이나 영화 포스팅은 내일로 또 미뤄야 할 것 같다.

다니엘레 갓 로시 "맨유 갔으면 지금쯤 자살했을 것"





역시 로마의 후예는 다르다.

갓 로씨.

2014년 1월 3일 금요일

데자와 먹어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것도 6캔 묶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더럽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맛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은 5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사약먹는 기분이다.
장희빈이다. 장희빈이 된 기분이야.

Canon eos 30

동방을 뒤적거리다가 새로운 카메라를 발견했다.

사실 내가 발견한 건 아니고 친구가 발견해서 추천해줌.

암튼 그렇게 canon eos30을 손에 넣었는데 일단 쓰는 법부터 알아가야 할 판이다.
뭐 이렇게 버튼이 많고 돌아가는 것이 많은지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처음 느꼈을 심정을 몇백년이 지난 내가 느끼고 있다.

내일 혜화로 사진을 찍으러 가야하는데, 이 기계덩어리를 데리고 가야겠다.
조심스레 제2의 펜탁스 ZX-5n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저 반짝반짝 작은별에 빌어본다.

사실 오늘 책 한권을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음
내일해도 지구가 멸망하거나 하진 않겠지.

What does the water deer say?

http://www.youtube.com/watch?v=chCQAz0nQ8A

그로테스크


다시는 고라니를 무시하지 마라

2014년 1월 2일 목요일

이상하다 난 분명 한국에 사는데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알고보니 시간 설정이 잘못되어있었음
사스가 구글!

오늘의 고라니


중국에 사는 베프

사진빨 ㄷㄷ하다
이정도까진 아닌데

The Stanley Parable


어느 길로 들어설 것인가?

더 스탠리 패러블은 신선하고 재밌는 게임이었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플레이어에게 목표를 정해주고 행동을 지시한다. (그러고보니 데드 스페이스의 경우는 특히나 매우 그러하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다. 나레이션으로 직접 목표를 설명해주고, 플레이어가 어디로 가야 할 지 정해준다. 지시를 그대로 따라가면 엔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간단한 게임이 아니다.
나레이션의 목소리를 순한 고라니마냥 따라가다보면, 스탠리가 회사로부터 감시당하고 정신을 조종당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탠리가 회사 업무를 의심없이 충실히 이행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진실을 깨닫게 된 스탠리는 이제 나레이션의 지시에 따라 회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다.
이는 겉보기엔 참 좋은 엔딩이지만 가장 비극적인 엔딩이다. 스탠리는 회사가 자신을 조종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도, 나레이션이 지시한 사항들은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다시 나레이션에게 조종당하는 순한 고라니가 된 것이다.

만약 나레이션의 지시사항을 단 하나도 따르지 않는다면, 나레이션은 스탠리가 아닌 '플레이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스탠리가 아니기 때문에 나레이션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 다시말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 경우, 또 다른 엔딩이 스탠리와 플레이어를 맞이한다.

게임의 엔딩은 다양하고 많다. 하나씩 루트를 공략해가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운명론은 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판으로 짜여져 있고 우리는 그저 그대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사람이 능동적으로 무엇을 할 이유가 없다.
그저 길거리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운명의 연극이 성립된다면 대체 누가 스스로 모험을 자처할까. 만약 그 연극을 봐줄 관객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배우들이 아니니까. 우리는 대본대로 행동하려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론은 자기위안을 하는 방패의 용도로 쓰인다. 능동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창과같은 공격적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호하는 방어의 방법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어떤 중요한 일이 틀어졌을 때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운명론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준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이런 운명이었어.

이런 운명이었어. 이 말에는 두가지 선택지가 따라붙는다.
'나는 원래 이 일을 못할 운명이었어' 그리고 '난 원래 몇번 실패할 운명이었어'
전자라면 그대로 자신을 실패의 쇠사슬에 속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후자라면 몇번의 실패쯤은 마땅히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볼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그는 성공의 원인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것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건 이렇게 될 운명이야'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것.
그리고 잘못으로 피해를 본 피해자들에게 이 말을 전해준다.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과정에서 '내가 잘못을 저지를 운명'이란 것은 생각치도 않고 '이렇게 망쳐질 운명. 여러분이 피해를 볼 운명'이라고만 생각하는 방식도 있다. 고소당할 운명이다. 법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운명론은 다시 '사람이 실패하여 노력을 쌓을 운명'을 주장할 수도 있다. 참 피곤한 주장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을 운명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그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나 간단하고 가벼운 것일까. 모든 살아있는 자들은 숨을 쉬어서 산소를 소비할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 숨을 쉬면 안될 운명이었나. 죽음을 이렇게 가볍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섭다. 자기 가치 부정.  

2014년 1월 1일 수요일

오늘의 고라니


브런치를 즐기는 내 친구

Yeezus


칸예 웨스트의 2013년도 앨범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듣고는 이 앨범이 올해의 앨범이다! 라고 확언했는데
나윤선의 앨범을 듣고 아.....무튼 훌륭한 앨범.

The College Dropout 때와 비교하면 스타일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칸예의 음악은 갈수록 힙합이란 장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Yeezus만 해도 앨범의 대부분의 트랙이 전자음이 깔려나온다. 노래 중간에 갑자기 흐름을 바꿔버리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랩이 전작들보다 훨씬 적다. 그냥 심심할까봐 찍어먹는 간장같은 존재감..

그러나 생각치도 못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실험은 훌륭하다. 귀를 찢는 사운드가 맘에 든다.
클래식한 비트는 아니지만 그래서 굉장히 신선하다.



그리고 Bound 2 MV를 봤는데 와우.

여기까지.

Dead Space


데드 스페이스

쉽게 다가가기 힘든 공포물이라는 특성상, 공포물 마니아가 아닌 나 역시 공포게임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다른 이름난 게임들은 다 해보려고 노력해봤으나 데드 스페이스만은 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난 멘탈이 연약한 것이다.
그렇게 결코 약속이 ㅇ벗어가 아니라 연약한 유리 멘탈이 부서질까 세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집 안에만 틀어박혀 각종 서적이나 음반, 장난감 등을 가지고 놀던 중에, 좀비우스라는 분께서 올린 리뷰를 보고 마침내 나는 내 멘탈을 괴롭히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거 별로 안무섭다. 안무서운게 더 무서움.)

그래서 시작한게 데드 스페이스.

Dead Space란 이름답게 세기말 패왕 아이작이 지나다니는 길에는 모두 시체가 널부러져 있다.
또한 그 공간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공간이며, 남아있는 조금의 생명체들은 풍전등화와 같다. 이는 게임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이 끔찍한 공간에서 주인공 아이작께서는 오직 연인을 만나야한다는 목적만으로 지옥의 불구덩이를 헤쳐나가니, 사람의 목적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데드 스페이스를 하면서 느낀 몇가지는 우선 이 게임은 목적지를 알려 준다는 것.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장소 이동은 문을 열거나 승강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특히 1편의 경우) 게임 내 장소가 다 같은 구조로 지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항상 낯설지 않은, 헤메기 좋은 장소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가 올바른 길인지 모르고 길 잃은 고라니처럼 헤멜 수 있는데, 친절하게도 이 게임은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아주 명확하게.
게다가 1편에서는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스토리 상의 방향만 잡아주지만, 2편 이후부터는 게임 저장소나 업그레이드 등 아주 노골적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두번째 특징은 플레이어가 맞서 싸워야하는 괴물, 네크로모프들에 관련된 것이다.
대부분의 공포게임이 영화 엑소시스트처럼 근본적인 인간의 공포를 살살 간질이는 것 보다는, 플레이어를 깜짝 놀래켜서 짜릿한 공포를 심장에 그대로 박아버리는 느낌의 방법을 취한다.
데드 스페이스도 마찬가지로써, 네크로모프들은 홍길동 뺨치는 신출귀몰한 존재들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는 환풍구를 통해 등장하지만, 가끔은 죽은 척을 하다가 달려들기도 하고 눈 속에서 뛰쳐나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위한 깜짝 파티를 열어주고는 한다.
근데 죽은 척을 하는 애는 티가 난다.....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특징은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인물들은 배신을 한다는 것.
모두는 아니다. 그러나 가장 처음으로 헬프 유를 자처한 사람은 무조건 배신때린다. 아이작: (부들부들...)
이런 패턴이 3편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누가 배신때릴지를 짐작하기가 매우 쉽다.
또한 배신때린 사람들은 결코 좋게 죽지 않는다....
(노턴이 총 한방 맞고 죽기는 하지만, 그 시체를 능욕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마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게임의 스케일이 후속작을 거듭할 수록 점점 커진다.
1편에서는 고작 우주선의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다니는 데에 그쳤지만 3편까지 간다면 행성 하나에서 고삐풀린 고라니마냥 자유롭게 노니는 아이작을 플레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데드 스페이스의 설정이 바이오쇼크와 겹치기도 하는데, 미지의 공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과, 미쳐날뛰는 괴기한 적들...이 그렇다.
또한 데드 스페이스에서 마커의 최종 목적이 '합일'이라는 것은 에반게리온의 제레와 비슷히기도 한데...과연 그 합일이라는 것이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하여, 우리는 모두가 균등히 잘먹고 잘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모두가 균등한 능력과 경제능력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떠오른다.

아무튼 그렇다.


구글 블로그

이전에는 일기를 꾸준히 써(보려고 해)왔는데 잘 되질 않아서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블로그도 얼마 안가서 귀찮다고 때려 치울 것이 뻔하다.
난 그런 고라니다.

원래는 네이버 블로그를 개설하려고 했으나 ,
네이버가 영 미덥지 않고 내 정보를 언제 캐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치 추운 날 물에 젖은 작은 고라니 새끼처럼 벌벌 떨다가 구글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거 글쓰는 거 좀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