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은 참으로 허무하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판으로 짜여져 있고 우리는 그저 그대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사람이 능동적으로 무엇을 할 이유가 없다.
그저 길거리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운명의 연극이 성립된다면 대체 누가 스스로 모험을 자처할까. 만약 그 연극을 봐줄 관객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배우들이 아니니까. 우리는 대본대로 행동하려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론은 자기위안을 하는 방패의 용도로 쓰인다. 능동적으로 무엇을 행하는 창과같은 공격적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호하는 방어의 방법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어떤 중요한 일이 틀어졌을 때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운명론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준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이런 운명이었어.
이런 운명이었어. 이 말에는 두가지 선택지가 따라붙는다.
'나는 원래 이 일을 못할 운명이었어' 그리고 '난 원래 몇번 실패할 운명이었어'
전자라면 그대로 자신을 실패의 쇠사슬에 속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후자라면 몇번의 실패쯤은 마땅히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볼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그는 성공의 원인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것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건 이렇게 될 운명이야'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것.
그리고 잘못으로 피해를 본 피해자들에게 이 말을 전해준다. 운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과정에서 '내가 잘못을 저지를 운명'이란 것은 생각치도 않고 '이렇게 망쳐질 운명. 여러분이 피해를 볼 운명'이라고만 생각하는 방식도 있다. 고소당할 운명이다. 법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운명론은 다시 '사람이 실패하여 노력을 쌓을 운명'을 주장할 수도 있다. 참 피곤한 주장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을 운명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그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나 간단하고 가벼운 것일까. 모든 살아있는 자들은 숨을 쉬어서 산소를 소비할 운명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 숨을 쉬면 안될 운명이었나. 죽음을 이렇게 가볍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섭다. 자기 가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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