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끔찍함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정점을 찍었다. 마치 손오반의 죽음을 본 트랭크스가 초사이어인으로 각성하기라도 하듯...
그래서 나는 야자시간에 책을 읽었다.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고리타분한 제도가 있었지만, 대출할 수 없다면 집에서 책을 가져와 읽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재학 당시 읽은 책의 대부분은 야자시간에 읽은 것이다.
지겨운 야자시간에는 소설이든 비소설류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나는 본래 비소설 류의 책을 더 좋아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 야자시간에도 나는 비소설 책을 골랐다. 금태섭 변호사가 쓴 <디케의 눈>. 일전에 다른 책에서 소개된 적이 있어, 눈에 띈 김에 빌려 보기로 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몰랐던 법과 처벌 이면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형제도와 폭력이다. 사형제도 역시 폭력의 범주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나중에 쓰기 위해 따로 구분했다. 아무튼 이 두 Things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은 절대 감정적으로 사고해서는 안되고,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 교훈은 지금까지 나의 매일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한번씩은 폭력을 경험한다.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이거나. 그리고 이런 말까지 듣는다. "네가 맞을 만한 짓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라고 본다.
정단한 폭력은 넌센스다. 폭력은 절대 정당할 수 없다. 때로 어떤 이들은 정당한 폭력을 주장하면서 함무라비 법전의 예시를 들고는 하는데, 이는 함무라비 법전을 매우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다. 법전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앙갚음을 해라'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저지른 일에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무겁고 철학적인 뜻이다. 또한 당한 일 이상의 심한 보복을 막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법전을 제멋대로 가볍게 해석하지 말았으면 한다.
폭력은 왜 정당화 될 수 없는가? 우선 폭력이 정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견들을 생각해보자. 가령 누군가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사람들은 그에게 폭력으로써 앙갚음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할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정당한 폭력을 외치는 이들은 '사회 범죄율의 감소'와 '정의 구현'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우선 폭력은 결코 사람들의 범죄 심리를 낮춰주지 못한다. 이는 너무도 저명한 사실이라서 뭐라 더 이상 설명하기도 귀찮은 대목이다. 과학적으로 폭력적 처벌이 범죄율을 낮춘다는 근거는 없다. 조금만 조사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패스.
그리고 폭력이 정말로 정의를 구현하는가? 우선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폭력을 저질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폭행자에게 우리가 같은 폭행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 <왓치맨>에는 이러한 글이 나온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마찬가지이다. 폭행자는 누가 폭행하는가? 폭행자에게 폭행한 사람은 누가 폭행하는가? 폭력을 저지른 사람에게 폭력을 저지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다 효과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거부한 채, 감정에 몸을 맡겨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짐슴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인권'을 들이민다.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한 자는 똑같이 인권을 침해받아야 한다는 말.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챙겨보아야 할 자는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피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인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인권은 사건 후 처리와 치료에 달려있다. 인권을 빌미로 피의자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피해자를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심리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이기적 행위이다. 폭력으로 되갚아 주면서 '음 그러면 피해자도 만족했을거야ㅎㅎ'라며 자신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좀 더 가까운 상황들을 보자. 정신나간 10대가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른바 '사랑의 매'를 들어 아들을 훈육한다. 아들은 매를 맞고 정신을 차린다. 해피엔딩? 전혀 아니다.
사랑의 매는 허울 좋은 보복이다. 이름만 들었을 경우에는 아, 정말 자식을 사랑하기에, 잘 되라고 쓰는 매이구나, 하는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실은 매를 드는 이유가 따로 있다. '아버지가 화가 났기 때문에' 매를 드는 것이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화를 돋우지 않는 선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아버지는 매를 드는 대신에, 아들에게 설교함으로써 잘못을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화가 났기에, 자신의 화를 풀 방법으로 매를 든 것이다. 또 여기서 '작은 잘못은 말로써 훈계하고, 큰 잘못은 매로싸 훈계하는 것이다.'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크고 작음이 어디있는가? 크고 작음은 헌법에서 규정하는 범죄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법은 폭력적 처벌을 막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잘못은 크고 작음이 없다. 바늘 도둑에게는 설교하고 소 도둑에게는 매를 드는 것은 넌센스이다. 잘못을 저지름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악'이 움터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잘못이든지 사람이 중심이기에 같은 것이다.
마무리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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