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생각난건데, 허지웅의 글을 보고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 특히 트윗글. 하긴 책들이야 몇 번 감수를 거치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일기 쉽지만, 생각나는 대로 바로 글로 쓰는 게 특징인 트위터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면 쉽게 쓸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어느샌가 다른 잡생각들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가 생각했던 주제를 멀리 보내버리고는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글을 못쓴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쓰는 것이 주제에 알맞은 글을 쓰기가 쉽다.
그리고 또 하나. 이해하기 쉽게 적어놓으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어느샌가 인터넷 곳곳에 퍼져있고, 이걸로 의견이 분분해진다. 특히나 현 세태나 누군가를 염두하고 쓴 글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이렇게 어어, 하다가 싸운건 네티즌인데 최종적으로 피해보는 건 글을 쓴 본인이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렵게 써서 소수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허지웅은 한 과오에 비해 뭇 남성들의 질타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과거에 한 일이 철딱서니가 없는 행동이었기로서니... 그리고 남도 아니고 본인 트위터에 본인이 글을 쓰는데, 트윗을 읽는 사람들을 반드시 배려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배려하건 말건 그건 허지웅 본인 마음.
2015년 4월 30일 목요일
2015년 4월 29일 수요일
기성세대의 시각 뻘소리
20대들이면 지겹게 듣는 말들 중 하나가, '너는 왜 안 그러니?'라는 말이다. 너는 왜 토익 준비를 안하니, 취업을 안하니, 왜 그러니 등등, 뇌에서 말하기 조정 역할을 담당하는 기성세대의 브로카 영역에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구비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비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요즘 거슬리는 말이 '왜 20대들은 나가서 현실에 대항하지 않나요?'이다.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벙어리인 사람들은 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로 들린다. 재밌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꼰대'질을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꼰대질을 혐호하면서 꼰대질을 한다니... 이 무슨 모순.
자, 그들이 (이미 난도질당해서 너덜너덜한)김난도 교수를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따진다. 당신이 요즘 20대들의 사정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돌아서서 20대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런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느냐고. 개탄스럽지 당연히. 그럼 왜 나가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무슨 수로 싸워..
20대들의 사고방식은 지배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뿌리 깊은 암기 교육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대학생이 되니, 혹은 취직을 하니 왠지 화가 나고 억울하다. 교과서 속 세계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따지려고 하니 막상 학점이 걱정이고, 월급이 걱정이다. 학점을 받아야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 카드 대금을 내거나 월세를 내거나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일은 대부분 암담하다. 싸웠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더라도 반짝,일뿐이다. 대중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20대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20대이기 때문에 분노를,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3,40대들도 안싸웠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엉.
결국 누가 안싸운다고 화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솔직히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빠지는 추세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윗에게 힘을.
내가 이런 글을 왜 쓰냐고? 재보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요즘 거슬리는 말이 '왜 20대들은 나가서 현실에 대항하지 않나요?'이다.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벙어리인 사람들은 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로 들린다. 재밌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꼰대'질을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꼰대질을 혐호하면서 꼰대질을 한다니... 이 무슨 모순.
자, 그들이 (이미 난도질당해서 너덜너덜한)김난도 교수를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따진다. 당신이 요즘 20대들의 사정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돌아서서 20대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런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느냐고. 개탄스럽지 당연히. 그럼 왜 나가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무슨 수로 싸워..
20대들의 사고방식은 지배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뿌리 깊은 암기 교육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대학생이 되니, 혹은 취직을 하니 왠지 화가 나고 억울하다. 교과서 속 세계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따지려고 하니 막상 학점이 걱정이고, 월급이 걱정이다. 학점을 받아야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 카드 대금을 내거나 월세를 내거나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일은 대부분 암담하다. 싸웠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더라도 반짝,일뿐이다. 대중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20대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20대이기 때문에 분노를,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3,40대들도 안싸웠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엉.
결국 누가 안싸운다고 화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솔직히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빠지는 추세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윗에게 힘을.
내가 이런 글을 왜 쓰냐고? 재보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뻘소리
1. 최근 연이어 불거지고 있는 연예계 문제 이야기
2. 휴학생은 알바를 하지 않으면 할 것이 컴퓨터 뿐이다. 물론 알바를 한다고 해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튼 오늘도 네트 상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티아라의 팬이 하소연하는 글을 보았다. 아직도 여전히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까이고 있다는 하소연. 음, 그럼 이쯤에서 그만 용서해줘야 하나? 그런데 누가 누굴 용서해주지?
3. 티아라 사건(?)의 주 대상은 탈퇴한 멤버와 현 몇 멤버들이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문제는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은 당연. 내가 친구와 싸웠다고 해서 남이 화해를 시켜주지는 않듯이. 전 멤버와 현 멤버가 화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 두 대상에 끼어들어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은지? 이전에 장동민 글에도 썼었으나, 그런 사람들은 요상하게도 자신이 정의의 편인 것처럼 생각한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건당위를 정확히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지을 수 있는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4. 그런데 한편으로는 맞는 행동인 것도 같다. 아니, 잘못을 한 사람이 사회에 떳떳하게 나와서 잘만 사는 게 말이 돼? 안된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동화로 배워온 권선징악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이것은 유치원생도 안다. 그런데 권선징악은 헌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다. 법률, 규칙, 제도 모두 권선징악을 해야 한다고 정해놓지는 않았다.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이다. 누군가가 (법에 어긋나지는 않는 일상적 형태의)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못되보이고, 미워진다. 권선징악은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대부분 비슷하므로 못된 행동과 착한 행동을 가릴 줄 알고, 또한 그것에 공감하거나 혐오를 느낄 줄도 안다.
5. 자,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벌을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법률에는 없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티아라 팬은 하소연을 한다. '당신들 언제까지 미워해야 직성이 풀릴 겁니까?' 그리고 대중의 대답은 '잘못해놓고는 무슨 선처를 바람? 노어이' 티아라 팬은 권선징악의 기간을 보다 짧게, 대중은 보다 길게 생각하는 탓에 이런 괴리가 생긴다. 허나 여기서 대중이 팬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생각하는 기간과 (대중의)처벌이 다를 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사실 처벌이란 말을 쓰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마땅히 다른 말이 안떠올라서 그냥 쓰도록 한다(..)
6. 그럼 문제를 일으킨 연예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냥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 좋아하려면 좋아하고, 싫어하려면 싫어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남에게 화를 내거나 비웃는 것은 옳지 않다. 서로 성격이나 기호가 다른 문제일 뿐이다.
7. 그렇지만 자숙을 하지 않은 연예인은? ...자숙은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대중의 피(..)를 먹고 산다. 대중의 사랑, 대중의 돈, 하다못해 연관검색어 순위에 오른다면, 그건 인터넷을 쳐하고 사는 나와 같은 잉여들의 덕이다. 대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대중과는 거래관계에 있다. 즐거움을 팔고 돈을 얻는다. 만일 거래상대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면 사과해야 맞는 일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바이어의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법이다. 시용을 회복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안좋은 말들을 듣게 되는 법이다. 거래 상대에게 예의는 지킵시다. 우리도 지킬 터이니.
8. 그래서 양현석의 '아티스트는 크리에이티브 해야 한다'라는 소리가 우습다. 아니, 그리에이티브 한 거랑 사과하고 자숙하는 것이랑 무슨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 자숙하면 덜 크리에이티브하게 되는지..? 아니면 사과를 크리에이티브하게 하겠다는 뜻인지, 참...
2015년 4월 28일 화요일
2015년 4월 26일 일요일
하이데거의 정리 두번째
1. 도구가 손 안에 있을 때의 무의식과 손 안에 없을 때, 즉 제 기능을 구현하지 못할 때의 의식은, 결국 스스로가 '손 안에 없음'을 자각해야 손 안에 목표하려는 것을 쥐려는 의지를 갖고, 이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자면, 한 때 열풍했던 장미칼이 그 특유의 톱날 모양으로 인해 식재료를 썰기에는 부적합하고, 오히려 공구로 이용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식칼이라고 나온 상품이 식재료 앞에서는 젬병인데 공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칼로서의)기능이 구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칼로 고기 대신 나무를 자를 때 드디어 깨닫는다. '뭐 이딴게 있어?' 그리고 새 식칼을 사러 간다. 식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장미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스스로 한계를 인식해야만 의지가 생긴다. 그 후 목표가 생기고, 아 내가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더 이롭겠구나,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Profit!
그런데 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기에? 이는 후에 말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1번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장자는 도가 사상의 중요 인물로서, '마음을 비움'을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사상은 간단히 말해, '비운 자리에 도가 자리잡는 것'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비워야 주스를 따를 수 있다. 물을 버리지 않고 주스를 따르게 되면 맛이 이상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와갤요리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기심, 관념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이를 '허심'이라 하는데,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심을 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로서'와 '~로써'가 너무 헷갈린다...
3. 인간은 대對존재 관계를 지배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먼 옛날 둘리가 엄마와 함께 있었을 당시에는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던 인간이, 여러 혁명을 거쳐 세계의 중심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지배자가 되었다. 숲을 도려내어 집을 짓더니 요즘은 골프장 등의 여가시설을 짓는다. 필수시설도 아닌 여가시설을 짓는다. 게다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부동산 시장을 위해 잉여주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은 공생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된지 오래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자신을 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폐증이다. 타 존재가 하는 말이, 언어의 소통으로 들리지 않고 소음으로 들린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를 새로이 성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칸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객체에 의거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천적 형식으로 인해 객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특징들을 찾아내어 그 나무를 인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생각한 그 나무의 특징으로써 우리가 나무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눈에 비친 나무의 본질 중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인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는 흡사 모 만화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중2병'과 같다.지나가던 타존재가 인간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나 인간은 몸을 뒤로 빼며 (상대에게 다 들리도록)읖조린다. "건드리지마. 죽.여.버.릴.수.도.있다구?" 크큭... 흑염룡이 날뛰고 있어서 말이지... 유우타 갓
자기-존재(세계-내-존재)는 내일.
다시 예를 들자면, 한 때 열풍했던 장미칼이 그 특유의 톱날 모양으로 인해 식재료를 썰기에는 부적합하고, 오히려 공구로 이용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식칼이라고 나온 상품이 식재료 앞에서는 젬병인데 공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칼로서의)기능이 구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칼로 고기 대신 나무를 자를 때 드디어 깨닫는다. '뭐 이딴게 있어?' 그리고 새 식칼을 사러 간다. 식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장미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스스로 한계를 인식해야만 의지가 생긴다. 그 후 목표가 생기고, 아 내가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더 이롭겠구나,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Profit!
그런데 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기에? 이는 후에 말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1번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장자는 도가 사상의 중요 인물로서, '마음을 비움'을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사상은 간단히 말해, '비운 자리에 도가 자리잡는 것'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비워야 주스를 따를 수 있다. 물을 버리지 않고 주스를 따르게 되면 맛이 이상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와갤요리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기심, 관념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이를 '허심'이라 하는데,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심을 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로서'와 '~로써'가 너무 헷갈린다...
3. 인간은 대對존재 관계를 지배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먼 옛날 둘리가 엄마와 함께 있었을 당시에는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던 인간이, 여러 혁명을 거쳐 세계의 중심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지배자가 되었다. 숲을 도려내어 집을 짓더니 요즘은 골프장 등의 여가시설을 짓는다. 필수시설도 아닌 여가시설을 짓는다. 게다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부동산 시장을 위해 잉여주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은 공생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된지 오래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자신을 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폐증이다. 타 존재가 하는 말이, 언어의 소통으로 들리지 않고 소음으로 들린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를 새로이 성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칸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객체에 의거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천적 형식으로 인해 객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특징들을 찾아내어 그 나무를 인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생각한 그 나무의 특징으로써 우리가 나무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눈에 비친 나무의 본질 중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인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는 흡사 모 만화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중2병'과 같다.
자기-존재(세계-내-존재)는 내일.
새뮤얼 애덤스
Samuel Adams Boston Lager
새뮤얼 애덤스는 미국의 정치철학가이며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사촌이자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 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새뮤얼 애덤스는 맥주다.
GS에서 구입했으며, 병맥주밖에 없다. 330ml정도에 4,800원! 이라는 놀라운 가격... 다른 수입 맥주보다 천원정도 비싼지라 여러번 외면했다가 이번에 한 번 마셔봤다.
맥주 이름은 위에서 말한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인 새뮤얼 애덤스의 이름에서 땄다. 맥주에 대놓고 'Boston Lager'라고 써져있다시피, 미국산 라거 맥주이다. 세계사 시간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등 보스턴은 옛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당시 존,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을 건국한 건 역사 상식. 그리고 나는 대학교 교양 과목을 청강한 덕에 알게 되었지!
맥주의 맛을 보면 4,800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아주 조금은 아까웠지만...). 라거 맥주답게 청량감이 좋고, 첫 맛이 개운하며 목을 넘어간 후에는 깊은 향이 입안에서 퍼진다. 과일 향 같으면서도 시럽 향 같은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먹어본 맥주 중에서는 가장 맛 좋은 맥주. 가격만 조금 더 싸면 실컷 마실텐데 크흑......
새뮤얼 애덤스는 미국의 정치철학가이며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사촌이자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 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새뮤얼 애덤스는 맥주다.
GS에서 구입했으며, 병맥주밖에 없다. 330ml정도에 4,800원! 이라는 놀라운 가격... 다른 수입 맥주보다 천원정도 비싼지라 여러번 외면했다가 이번에 한 번 마셔봤다.
맥주 이름은 위에서 말한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인 새뮤얼 애덤스의 이름에서 땄다. 맥주에 대놓고 'Boston Lager'라고 써져있다시피, 미국산 라거 맥주이다. 세계사 시간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등 보스턴은 옛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당시 존,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을 건국한 건 역사 상식. 그리고 나는 대학교 교양 과목을 청강한 덕에 알게 되었지!
맥주의 맛을 보면 4,800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아주 조금은 아까웠지만...). 라거 맥주답게 청량감이 좋고, 첫 맛이 개운하며 목을 넘어간 후에는 깊은 향이 입안에서 퍼진다. 과일 향 같으면서도 시럽 향 같은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먹어본 맥주 중에서는 가장 맛 좋은 맥주. 가격만 조금 더 싸면 실컷 마실텐데 크흑......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하이데거 짤막한 정리
1. 정보의 흐름은 정보의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령 정보의 흐름을 Information으로 잡았을 경우, 어떤 데이타의 특정한 형상, 즉 Form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많은 매스미디어와 비슷하게, 그 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에 있다.
그러나 개념을 다르게 잡는다면, 정보는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흐름(말이 이상한데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을 띄게 된다. 이때 목적은 타인과 협력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권가 찌라시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내용 -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
함축적으로 말하다보니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으로 표현했으나, 실상은 그 사물이 원래 목적대로 쓰이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쓰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비껴나간다면 '손 안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보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언맨이 신나서 울트론을 창조했다. 그러나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세계평화의 수호자는 커녕 빌런의 길을 걷는다. 이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손 안에 없는'상태이다. 심지어 울트론이 스스로 '나는 줄에 묶여있지 않아요'라고 노래까지 부르며 확인사살을 시켜주는 판에....
이런 경우도 있다. 만일 울트론이 토니의 뜻대로 수호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울트론이 약해 빠졌다면? 울트론은 토니가 만들어놓은 목적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구를 아예 잘못 쓰거나 도구의 질이나 상태가 안좋거나-우리는 도구와 도구를 이용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식한다. 식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식칼에 대하여, 썰고 다지는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행하지만, 식칼이 남을 죽이는 것에 쓰인다면 그 행위와 식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적' 의미를 강하게 띄므로 위와 같은 의식이나 자각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어젯밤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그 주제로 실컷 이야기하는 어머님들을 보라. 이분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소통과 공유를 넘어 유흥이다. 그러나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에 목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스스로 내가 남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은 내가 아는 정보밖에 알 수 없다. 다른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경우 우리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보다 타인과 소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맛집을 찾을 때도 타인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고자 하지 않는가.
3. 맥주 마셔서 그런지 나른하다. 3은 내일......
가령 정보의 흐름을 Information으로 잡았을 경우, 어떤 데이타의 특정한 형상, 즉 Form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많은 매스미디어와 비슷하게, 그 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에 있다.
그러나 개념을 다르게 잡는다면, 정보는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흐름(말이 이상한데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을 띄게 된다. 이때 목적은 타인과 협력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권가 찌라시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내용 -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
함축적으로 말하다보니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으로 표현했으나, 실상은 그 사물이 원래 목적대로 쓰이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쓰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비껴나간다면 '손 안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보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언맨이 신나서 울트론을 창조했다. 그러나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세계평화의 수호자는 커녕 빌런의 길을 걷는다. 이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손 안에 없는'상태이다. 심지어 울트론이 스스로 '나는 줄에 묶여있지 않아요'라고 노래까지 부르며 확인사살을 시켜주는 판에....
이런 경우도 있다. 만일 울트론이 토니의 뜻대로 수호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울트론이 약해 빠졌다면? 울트론은 토니가 만들어놓은 목적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구를 아예 잘못 쓰거나 도구의 질이나 상태가 안좋거나-우리는 도구와 도구를 이용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식한다. 식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식칼에 대하여, 썰고 다지는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행하지만, 식칼이 남을 죽이는 것에 쓰인다면 그 행위와 식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적' 의미를 강하게 띄므로 위와 같은 의식이나 자각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어젯밤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그 주제로 실컷 이야기하는 어머님들을 보라. 이분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소통과 공유를 넘어 유흥이다. 그러나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에 목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스스로 내가 남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은 내가 아는 정보밖에 알 수 없다. 다른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경우 우리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보다 타인과 소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맛집을 찾을 때도 타인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고자 하지 않는가.
3. 맥주 마셔서 그런지 나른하다. 3은 내일......
스텔아 아르투아
Stella Artois. 유로 페일 라거. 청량감이 좋아 목넘김이 톡 쏘면서 부드럽고, 마시고 난 후에는 작은 향긋함이 일어난다. 새콤한 맛. 내가 마신 캔맥주는 5.0%.
http://beergle.tistory.com/entry/%EC%97%90%EC%9D%BCAle%EB%A7%A5%EC%A3%BC-%EB%9D%BC%EA%B1%B0Lager%EB%A7%A5%EC%A3%BC
위 링크는 맥주에 대한 간략한 정보글.
칸트 다시 공부하다 너무 열이 나서 맥주 한 캔을 땄다. 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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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링크는 맥주에 대한 간략한 정보글.
칸트 다시 공부하다 너무 열이 나서 맥주 한 캔을 땄다. 하핳.
조스 웨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강스포)
내 블로그는 어차피 오는 사람이 없을테지만 만일 그 누군가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왔는데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1. 액션이 전작보다 많고 화려하다. 그리고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면 영화 장면을 놓치기 쉽다. 액션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라 하겠으나, 빠른 전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할만하다.
2. 분위기가 보다 심오해졌다.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잘 안된 느낌이다. 철학을 하다가 말았다. 히어로 영화이니 심도있는 철학을 하기 어려웠겠지만, 이 때문에 울트론의 역할이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본인에 대한 자아 확립과 목표가 굉장히 단순... <공각기동대>나 <아이로봇> 비슷하게 철학을 하려다가 만듯한 모습. 또한 토니 스타크도 마찬가지. 시리어스한 아이언맨3에서의 토니 스타크의 모습과 다르다. 다시 단순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3. 블랙 위도우나 호크아이, 헐크 등 영화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의 비중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까지 챙기다보니 스토리 상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다. 조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루 조명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완벽하지 못했다'.
4. 퀵 실버가 너무 일찍 팽 당했다.... 아직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그냥 아웃되어버렸다. 스칼렛 위치 또한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벤져스 합류 후 매력 발산할 기회는 몇 번 더 있을터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듯. 따로 영화를 만들 것 같지는 않고 캡틴 아메리카에서 출연할 듯하다.
5. 새로운 히어로 비전의 탄생. 비전이 나온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야 알았다. 울트론과는 다른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오묘한 존재로써, 인피니트 젬 중 하나를 소유하였다. 비전의 성격은 정말 모호하다. 신체 외관은 인간이지만 실상 내부는 기계에 가까우며, (아직) 단순한 사고밖에 하지 못한다. 이후 마블 영화가 나오면서 점차 고민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은 새로운 히어로라는 것 빼면 활약은 그닥.... 강하기는 참 강하다.
6. 이 영화는 그냥 호크아이 하나로 정리된다. 호크아이에서부터 시작해서 호크아이로 끝났다. 호크아이만 봐도 영화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7. 스토리가 불친절하다. 이전의 MCU영화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마블 코믹스에 대해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은 이게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조스 웨던이 자른 부분이 많다고 했으니, 감독판이 나온다면 명확하게 이해가 가능할 듯.
1. 액션이 전작보다 많고 화려하다. 그리고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면 영화 장면을 놓치기 쉽다. 액션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라 하겠으나, 빠른 전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할만하다.
2. 분위기가 보다 심오해졌다.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잘 안된 느낌이다. 철학을 하다가 말았다. 히어로 영화이니 심도있는 철학을 하기 어려웠겠지만, 이 때문에 울트론의 역할이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본인에 대한 자아 확립과 목표가 굉장히 단순... <공각기동대>나 <아이로봇> 비슷하게 철학을 하려다가 만듯한 모습. 또한 토니 스타크도 마찬가지. 시리어스한 아이언맨3에서의 토니 스타크의 모습과 다르다. 다시 단순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3. 블랙 위도우나 호크아이, 헐크 등 영화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의 비중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까지 챙기다보니 스토리 상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다. 조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루 조명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완벽하지 못했다'.
4. 퀵 실버가 너무 일찍 팽 당했다.... 아직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그냥 아웃되어버렸다. 스칼렛 위치 또한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벤져스 합류 후 매력 발산할 기회는 몇 번 더 있을터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듯. 따로 영화를 만들 것 같지는 않고 캡틴 아메리카에서 출연할 듯하다.
5. 새로운 히어로 비전의 탄생. 비전이 나온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야 알았다. 울트론과는 다른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오묘한 존재로써, 인피니트 젬 중 하나를 소유하였다. 비전의 성격은 정말 모호하다. 신체 외관은 인간이지만 실상 내부는 기계에 가까우며, (아직) 단순한 사고밖에 하지 못한다. 이후 마블 영화가 나오면서 점차 고민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은 새로운 히어로라는 것 빼면 활약은 그닥.... 강하기는 참 강하다.
6. 이 영화는 그냥 호크아이 하나로 정리된다. 호크아이에서부터 시작해서 호크아이로 끝났다. 호크아이만 봐도 영화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7. 스토리가 불친절하다. 이전의 MCU영화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마블 코믹스에 대해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은 이게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조스 웨던이 자른 부분이 많다고 했으니, 감독판이 나온다면 명확하게 이해가 가능할 듯.
2015년 4월 22일 수요일
늑대아이 유키와 아메
호소다 마모루의 역작. 작화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분이라 더 좋았던 영화...
1.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영화가 '남성'이 주인공인 데 반해, 늑대아이는 철저한 여성 중심의 영화이다. 그 중에서도 싱글맘의 이야기인데, 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작중 주인공 '하나'가 엄청나게 강인해서 현실성은 조금 떨어진다. 게다가 늙지도 않는다.
2. 싱글맘의 이야기지만 이를 떠나서 모든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마지막에, 자아를 확립하고 숲으로 향해 떠나는 아들에게 "엄만 아직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라고 말하는 하나의 말은 부모들의 가슴을 대변하는 명대사.
3. 보통과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살아가는데 힘든지,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어머니의 위대함과 동시에 이런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핀트를 맞주고 있는데, 그 시선이 날카롭기 보다는 안타까워서 영화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4.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유키와 아메가 각각 자신의 자아를 성립하고 그 길로 나아갈때,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하나의 심정이다. 유키야 인간의 삶을 살기로 했으나, 아메는 늑대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으로, 결국 아메와는 헤어져야 하는데 이에 어머니로서의 마음과 충고가 슬픔에 범벅이 되어 드러나는 후반부가 압권.
5. 아이들을 키우는 긴 세월을 영화에 무리없이 개운하게 담아냈으며, 한 사람의 일생을 나즈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힘 있게 들려주는 영화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6. 늑대아이를 보면서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같이 보면 좋을 듯.
7. 그러고보니 등장인물들 이름이 스포일러.....
2015년 4월 21일 화요일
왜 포르노는 한국에서 불법이어야 하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들을 수 있으면서도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어가 바로 ‘야동’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닐 때나 그 뒤 교수생활 초기만 해도 음담패설만 ‘EDPS’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야동’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이 단어를 모르면 간첩이 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범국민적 속어로 자리잡은 야동의 정식 명칭은 ‘포르노’이다. 야동이 ‘야한 동영상’의 준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성행위를 연기하는 영화는 따로 ‘에로’라는 고상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볼 때, 야동은 역시 포르노의 속어로 봐야할 것 같다. 몇 년 전에 김본좌라는 사람이 야동 유포죄로 구속되었다. 하루에 야동을 무려 20기가씩 올리는 왕성한 정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할 때 김본좌 씨의 구속은 참으로 우스운 짓이었다. 이슬람 권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한국에서 포르노물을 배급했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하다니 말이 되는가. 그것도 지적 재산권 침해로 외국 포르노 제작사 측에서 고소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고 범죄라는 사실 하나로 구속을 한 것을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포르노를 굳이 금지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이웃 나라 일본을 음란물만 들입다 찍어내고 있는 한심한 나라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 특수한 케이스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다 포르노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시각도 아주 관대하다. 과거 일본 최고의 AV 배우였던 이이지마 아이가 연예계에 진출한 적도 있고 최근엔 아오이 소라가 가수활동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포르노 배우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하여 당선된 적도 있고 (이탈리아의 여성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는 편이다. 분명한 점은 포르노 배우가 당당한 직업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배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엔 AV 촬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분야는 서양이 하면 다 좋다고 사대주의적으로 따라가는 한국이, 왜 유독 포르노의 합법화만큼은 필사코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포르노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포르노가 사랑 없이 단순히 성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 먼저 사랑을 동반한 섹스만이 옳은가하는 문제이다. 사실 급속도로 서구화가 진행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섹스의 목적은 오로지 쾌락이라는 사실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이른바 변태적 섹스, 즉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개성적 취향의 섹스에 ‘옳다/그르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원 나잇 스탠드가 행해질 뿐만 아니라, <러브 퍼레이드> 등의 축제에서는 거리에서 섹스 행위가 벌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나라인 독일에서는 매년마다 <포르노 축제>가 열린다.
한국도 이제는 몇몇 종교 단체나 보수 단체가 외치는 ‘순결지상주의’가 그들끼리만의 이론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엔 왜 아직까지 그런 단체의 사람들만 초빙되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필요한 피임 교육 등에 관한 교육효과가 제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好不好)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사 사랑 없는 섹스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더라도 그것만으로 포르노의 금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수없이 많은 ‘옳지 않은’ 것들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중 어떤 조폭 영화는 유사살인 사건까지 일으켰고, 그밖에 여러 폭력물들은 어린 학생들의 꿈이 조폭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영화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우수한 예술영화들이란 건 또 어떤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예술영화가 현실사회의 윤리적 잣대를 벗어나는 것을 미화한 것도 많다. <불륜의 사랑>을 단골 메뉴로 삼는 텔레비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타 매체들과 비교해볼 때, 포르노는 오히려 대놓고 허무맹랑한 픽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훨씬 덜하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라서, 조폭 코메디물을 보고 조폭이 멋있다고는 떠들어도 포르노물을 보고 포르노 속의 인물이 멋있다고 떠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사 멋있다고 떠들며 그것을 모방한다고 해도 살인이나 폭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매체의 장르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반해 포르노만큼은 유독 범죄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중잣대는 마치 혼외정사 비율과 성 접대비 비율이 세계 1위를 달리면서도 늘 순결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이중성으로만 보인다.
사실 먼 옛날부터 성은 권력자들이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 서양 중세기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며 불어야 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스의 68 혁명 때 성에 대한 획일적인 윤리적 잣대를 타파하자고 외쳤던 것도 종교적인 위선의 역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가끔씩 외설 사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낄낄대며 가십꺼리로나 삼지만, 문화적 선진국에서 그런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해쳤다고 해서 민중적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잣대조차 애매모호한 외설이라는 이유로 포르노를 범죄시하기에는 논리의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포르노 유포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디오를 사용하던 시절만 해도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포르노를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된 현재에 있어 포르노 유포를 막으려는 행위는 마치 MP3 시장을 인정하지 않고 자멸의 길로 향해가는 음반업계에 비유될 수 있다. 파일 공유 사이트 아무데나 들어가서 아는 일본 여자 포르노 배우 이름 하나만 입력해 보라. 파일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 우리 집 애만은 안 볼 거라고?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착각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둔한 짓이다.
어차피 과거 봉건시대의 성윤리를 들이대기도 힘들고, 외설을 처벌하는 것이 고무줄 잣대일 뿐만 아니라, 포르노의 범람이 이미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면, 차라리 포르노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눈을 가리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조차 나올 수 없다. 과거에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도 위험성이 크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음성적 유포 상태에서는 문제 제기도,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는 포르노를 현실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국내에서도 제조할 수 있게 한 후, 사람들이 이를 자유롭게 즐기고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피임교육 등의 실질적인 성교육을 제공해주면서 말이다. 맨날 생물학적 공부에 순결만 강조하는 지금의 성교육은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겐 전혀 실효가 없다.
포르노가 성범죄를 유발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OECD 가입국 중 성범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의 하나다. 유럽에서는 포르노 유포 허용 후에 성범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다. 포르노가 성범죄율을 높인다는 연구 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보기에 포르노는 오히려 대리배설과 대리만족 효과를 낳아 성범죄를 감소시킨다.
-마광수 교수
포르노 이야기와는 별개로, 얼마전 간통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애슐리 매디슨'이라는 회사가 국내에 재진출했다. 이전에도 진출했었으나 그 때 당시에는 간통죄가 형사건이었으므로 얼마 못가 철수했었다. 그러나 철수하기 전까지 상당한 회원을 받아들이며 꽤나 높은 실적을 올렸다. 이에 회사 대표는 '한국이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봐라, 많은 이들이 외도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슐리 매디슨 회사 자체는 외도를 '건강한 가정'을 위한 것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에 위 발언은 비꼼이라기 보다는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애슐리 매디슨은 재진출 후 (당연하게도) 높은 수치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마광수 교수의 포르노 이야기와는 핀트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한 주제인 듯 해서 같은 페이지에 적는다.
내가 생각할 때 김본좌 씨의 구속은 참으로 우스운 짓이었다. 이슬람 권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한국에서 포르노물을 배급했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하다니 말이 되는가. 그것도 지적 재산권 침해로 외국 포르노 제작사 측에서 고소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고 범죄라는 사실 하나로 구속을 한 것을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포르노를 굳이 금지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이웃 나라 일본을 음란물만 들입다 찍어내고 있는 한심한 나라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 특수한 케이스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다 포르노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시각도 아주 관대하다. 과거 일본 최고의 AV 배우였던 이이지마 아이가 연예계에 진출한 적도 있고 최근엔 아오이 소라가 가수활동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포르노 배우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하여 당선된 적도 있고 (이탈리아의 여성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는 편이다. 분명한 점은 포르노 배우가 당당한 직업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배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엔 AV 촬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분야는 서양이 하면 다 좋다고 사대주의적으로 따라가는 한국이, 왜 유독 포르노의 합법화만큼은 필사코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포르노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포르노가 사랑 없이 단순히 성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 먼저 사랑을 동반한 섹스만이 옳은가하는 문제이다. 사실 급속도로 서구화가 진행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섹스의 목적은 오로지 쾌락이라는 사실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이른바 변태적 섹스, 즉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개성적 취향의 섹스에 ‘옳다/그르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원 나잇 스탠드가 행해질 뿐만 아니라, <러브 퍼레이드> 등의 축제에서는 거리에서 섹스 행위가 벌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나라인 독일에서는 매년마다 <포르노 축제>가 열린다.
한국도 이제는 몇몇 종교 단체나 보수 단체가 외치는 ‘순결지상주의’가 그들끼리만의 이론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엔 왜 아직까지 그런 단체의 사람들만 초빙되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필요한 피임 교육 등에 관한 교육효과가 제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好不好)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사 사랑 없는 섹스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더라도 그것만으로 포르노의 금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수없이 많은 ‘옳지 않은’ 것들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중 어떤 조폭 영화는 유사살인 사건까지 일으켰고, 그밖에 여러 폭력물들은 어린 학생들의 꿈이 조폭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영화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우수한 예술영화들이란 건 또 어떤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예술영화가 현실사회의 윤리적 잣대를 벗어나는 것을 미화한 것도 많다. <불륜의 사랑>을 단골 메뉴로 삼는 텔레비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타 매체들과 비교해볼 때, 포르노는 오히려 대놓고 허무맹랑한 픽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훨씬 덜하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라서, 조폭 코메디물을 보고 조폭이 멋있다고는 떠들어도 포르노물을 보고 포르노 속의 인물이 멋있다고 떠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사 멋있다고 떠들며 그것을 모방한다고 해도 살인이나 폭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매체의 장르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반해 포르노만큼은 유독 범죄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중잣대는 마치 혼외정사 비율과 성 접대비 비율이 세계 1위를 달리면서도 늘 순결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이중성으로만 보인다.
사실 먼 옛날부터 성은 권력자들이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 서양 중세기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며 불어야 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스의 68 혁명 때 성에 대한 획일적인 윤리적 잣대를 타파하자고 외쳤던 것도 종교적인 위선의 역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가끔씩 외설 사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낄낄대며 가십꺼리로나 삼지만, 문화적 선진국에서 그런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해쳤다고 해서 민중적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잣대조차 애매모호한 외설이라는 이유로 포르노를 범죄시하기에는 논리의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포르노 유포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디오를 사용하던 시절만 해도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포르노를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된 현재에 있어 포르노 유포를 막으려는 행위는 마치 MP3 시장을 인정하지 않고 자멸의 길로 향해가는 음반업계에 비유될 수 있다. 파일 공유 사이트 아무데나 들어가서 아는 일본 여자 포르노 배우 이름 하나만 입력해 보라. 파일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 우리 집 애만은 안 볼 거라고?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착각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둔한 짓이다.
어차피 과거 봉건시대의 성윤리를 들이대기도 힘들고, 외설을 처벌하는 것이 고무줄 잣대일 뿐만 아니라, 포르노의 범람이 이미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면, 차라리 포르노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눈을 가리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조차 나올 수 없다. 과거에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도 위험성이 크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음성적 유포 상태에서는 문제 제기도,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는 포르노를 현실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국내에서도 제조할 수 있게 한 후, 사람들이 이를 자유롭게 즐기고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피임교육 등의 실질적인 성교육을 제공해주면서 말이다. 맨날 생물학적 공부에 순결만 강조하는 지금의 성교육은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겐 전혀 실효가 없다.
포르노가 성범죄를 유발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OECD 가입국 중 성범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의 하나다. 유럽에서는 포르노 유포 허용 후에 성범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다. 포르노가 성범죄율을 높인다는 연구 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보기에 포르노는 오히려 대리배설과 대리만족 효과를 낳아 성범죄를 감소시킨다.
-마광수 교수
포르노 이야기와는 별개로, 얼마전 간통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애슐리 매디슨'이라는 회사가 국내에 재진출했다. 이전에도 진출했었으나 그 때 당시에는 간통죄가 형사건이었으므로 얼마 못가 철수했었다. 그러나 철수하기 전까지 상당한 회원을 받아들이며 꽤나 높은 실적을 올렸다. 이에 회사 대표는 '한국이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봐라, 많은 이들이 외도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슐리 매디슨 회사 자체는 외도를 '건강한 가정'을 위한 것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에 위 발언은 비꼼이라기 보다는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애슐리 매디슨은 재진출 후 (당연하게도) 높은 수치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마광수 교수의 포르노 이야기와는 핀트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한 주제인 듯 해서 같은 페이지에 적는다.
걱정 말라는 말
'걱정마' 혹은 '쓸데없는 걱정하지마'라는 말이 무심하게 들린다. 마치 나는 귀찮으니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투같다. 아무리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도 얼음장같은 입김이 새어나온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자주 내뱉었고, 스스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남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선 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상대방을 향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면서 그 이유를 조근조근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바란 것은 공감이었고, 해묵은 상식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이런식으로 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얄미웠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대를 멋지게 안심시켜보리라 했지만, 해줄 말을 찾느라 상대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니,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공감이 될리 없었고, 진정성있는 대답을 할리 만무했다.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했다. 누군들 걱정이 쓸데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걱정을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로 다시금 힘을 얻는 것이다. 어쩌다보면 운 좋게 해답이 나오기도 한다. 걱정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무시했다. 쓸데없다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도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자아가 뚜렷할수록 그렇다. 에고가 강할 수록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고민하다가 가끔씩 무너지면 비참하다. 그래도 걱정을 한다. 걱정에는 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걱정은 결국 잊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해답이 나와서 해소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 잊혀짐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결국 해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걱정에 나는 희망을 무시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해답을 엉터리로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보니 나의 사고가 비참하다. 반성.
언제나 남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선 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상대방을 향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면서 그 이유를 조근조근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바란 것은 공감이었고, 해묵은 상식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이런식으로 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얄미웠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대를 멋지게 안심시켜보리라 했지만, 해줄 말을 찾느라 상대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니,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공감이 될리 없었고, 진정성있는 대답을 할리 만무했다.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했다. 누군들 걱정이 쓸데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걱정을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로 다시금 힘을 얻는 것이다. 어쩌다보면 운 좋게 해답이 나오기도 한다. 걱정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무시했다. 쓸데없다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도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자아가 뚜렷할수록 그렇다. 에고가 강할 수록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고민하다가 가끔씩 무너지면 비참하다. 그래도 걱정을 한다. 걱정에는 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걱정은 결국 잊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해답이 나와서 해소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 잊혀짐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결국 해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걱정에 나는 희망을 무시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해답을 엉터리로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보니 나의 사고가 비참하다. 반성.
Tuxedo의 Tuxedo
2인조 그룹 턱시도의 앨범, <Tuxedo>. 턱시도의 턱시도라니. 멋지게 보이려고 아우터위에 아우터를 입고는 뻘뻘 땀을 흘리는 사내가 상상된다. 허나 심히 버거워보이는 상상 속 사내와는 다르게 턱시도의 음악은 경쾌하며 시원하다.
재즈 그루브와 일렉트릭 악기가 잼과 토스트처럼 딱 붙은 앨범이다. 트랙은 전체적으로 경쾌하나 중간 중간 살짝 템포가 느려지기도 한다. 앨범 표지처럼 정렬적인 춤을 추다가도, 블루스를 추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좋은 앨범.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빌 비올라
빌 비올라 전시회에 다녀왔다. 장소는 국제 갤러리. 마침 서울 시내 골목골목을 걷고 싶었는데 잘 된 참이었다. 그렇게 길이 꽉 막힐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서울 중심부의 골목길은 참 예쁘다. 광화문부터 종로, 안국역 근처, 인사동의 거리는 현대 서울의 정수를 담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다.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큰 길거리로 나서기에, 큰 길가에는 주로 비싼 용품이나 음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있고, 돈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영은 건물의 뒷골목으로 향한다. 낮의 뒷골목은 각종 장신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상품등이 전시되어 있고, 저녁에는 비교적 값싼 술집이나 음식점들이 눈에 뜨인다.
아무튼, 갤러리에 가가 전 카페 마마스에 들러 점심을 먹고(이상하게 빵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밥은 조금만 먹어도 배부른데. 신기.) 개운한 느낌으로 갤러리에 당도했다. 1관은 전시 준비중이었고, 2관과 3관에서 빌 비올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빌 비올라의 전시를 감상한 느낌은 대략 이러하다.
1. 작가는 시간을 물로써 표현한다. 빌 비올라는 스스로 시간을 물질로써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시간이란 것은 개인이 물질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물질을 빌려와 설명해야 한다. 빌 비올라는 그 물질로써 물을 선택한 듯 싶다. 남자의 몸과 그가 서 있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줄에 매달린 남성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 모습을 보일때 물은 시간에 맞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여 시간이 물질임을 주장한다.
2. 넓은 대지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난해하다. 작가 본인은 대지의 웅장함과 함께, 사람을 작은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위대함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대신 자연 속에서 걷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것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았다.
3. 마지막으로 남녀의 영적 사랑을 표혔했다는 작품. 여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남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 결국 두 카메라는 같은 시점에서 만나는 남녀를 보여준다. 이 때 '불'이 둘의 매개가 되어 이어주는 역할을 돕는다.
예술은 어렵다. 그것도 머리 나쁜 트롤에게는...ㅠ
그래도 서울 중심부의 골목길은 참 예쁘다. 광화문부터 종로, 안국역 근처, 인사동의 거리는 현대 서울의 정수를 담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다.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큰 길거리로 나서기에, 큰 길가에는 주로 비싼 용품이나 음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있고, 돈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영은 건물의 뒷골목으로 향한다. 낮의 뒷골목은 각종 장신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상품등이 전시되어 있고, 저녁에는 비교적 값싼 술집이나 음식점들이 눈에 뜨인다.
아무튼, 갤러리에 가가 전 카페 마마스에 들러 점심을 먹고(이상하게 빵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밥은 조금만 먹어도 배부른데. 신기.) 개운한 느낌으로 갤러리에 당도했다. 1관은 전시 준비중이었고, 2관과 3관에서 빌 비올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빌 비올라의 전시를 감상한 느낌은 대략 이러하다.
1. 작가는 시간을 물로써 표현한다. 빌 비올라는 스스로 시간을 물질로써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시간이란 것은 개인이 물질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물질을 빌려와 설명해야 한다. 빌 비올라는 그 물질로써 물을 선택한 듯 싶다. 남자의 몸과 그가 서 있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줄에 매달린 남성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 모습을 보일때 물은 시간에 맞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여 시간이 물질임을 주장한다.
2. 넓은 대지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난해하다. 작가 본인은 대지의 웅장함과 함께, 사람을 작은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위대함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대신 자연 속에서 걷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것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았다.
3. 마지막으로 남녀의 영적 사랑을 표혔했다는 작품. 여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남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 결국 두 카메라는 같은 시점에서 만나는 남녀를 보여준다. 이 때 '불'이 둘의 매개가 되어 이어주는 역할을 돕는다.
예술은 어렵다. 그것도 머리 나쁜 트롤에게는...ㅠ
15년 18일 광화문 시위와 진압
1. 15년 4월 18일, 광화문에서 시위가 열렸다. 나는 갤러리에 가기 위해 그 현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내가 광화문을 지난것이 오후 1시 즈음이었다. 당시 세월호 유가족을 포함한 시위자들이 경복궁 정문 앞에 백여명 좀 안되게 있었고, 건너편 광화문에도 시위자들이 10명 남짓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 인도를 따라 경찰버스가 죽 길을 막고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시위자들이 경복궁 쪽으로 건너가 합류하려 하자, 이를 경찰들이 막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합류를 막기 위해 버스를 줄지어 세운 것으로 보였다. 그덕에 나를 포함한 시민들은 길을 건너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2. 고작 백여명 남짓한 시위자들을 막자고 그 거대한 버스를 한두대도 아니고, 몇대씩이나 동원하여 길을 틀어막아햐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후 있을 시행법 반대와 세월호 인양 시위에서 교통불편을 해소하고,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취를 취한다고 한 것이지만, 글쎄. 이후 사건을 살펴보니 시위자들이 만명 가까이 모인 듯 했고, 경찰과 경찰버스는 그의 몇배나 되는 인원이 모였다. 교통은 물론이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는 마당에 시민안전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않나.
3. 누군가는 이 시위를 보고 '변질'되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애초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엄숙한 세월호 추모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항의하려고 모인 것이다.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목적이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시위를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애당초 세월호 침몰 후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유가족들의 순수한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한 쪽이 어느쪽인지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순수를 더럽혔는가? 또한 순수의 개념과 범위가 너무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시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변질된 시위인가.
4. 그리고 그 사람 말마따나 시위가 조용해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3번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이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인원을 대거 모으지도 않고, 경찰과 대치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은 채 한동안 얌전히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정부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나 했는지. 오히려 종북 빨갱이라며 특례입학 및 배상금 루머를 퍼뜨린 것은, 정부와 친한 언론 및 지지자들이 아니었나. 그럼 그 때 그 루머에 맞서 정부가 제대로 된 사실관계를 밝혀주기라도 했는가. 한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대놓고 빨갱이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얌전히 있어봐야 나아지지 않으며,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시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사실이다.
5. 누군가는 순수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민주사회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소수의 인원이 아닌 다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다수가 순수하게 한 맥락의 말을 가지고 한 가지의 뜻과 의견으로 모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가 불가능하다. 이는 왕권군주제에서는 가능하다. 왕 하나의 의견으로 끝을 보면 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애초에 순수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순수는 민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이다.
6. 이전까지 나는 시위와 진압에 대해 긴가민가 했었다. 시위자들의 말도 맞는 것 같고, 경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도 있었고,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다시말해 꿈틀하려면 먼저 밟혀야 한다. 이 경우 분명 사건제공의 원인은 밟은 쪽이다. 누가 먼저 상대를 밟았는지, 과도한 행동을 취했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확신했다. 이번은 명백히 경찰이 밟은 쪽이었다. 강물을 우물에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반드시 새어나오게 마련이고, 경찰은 새어나오면서 터지는 시위대의 감정적 행위를 유도했다.
7. 개중에 태극기를 태운 시위자가 있다고 한다. 유가족은 아니고, 시위꾼인 것으로 아는데,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와 별개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냐 묻는다면, 그것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호와 불호로 나눌 문제이지, 올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으로써 이루어진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다. 국민은 국가의 부모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거슬렀을때, 국민이 이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한 방법이 태극기를 불로 태운 것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를 태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므로.
8. 그러나 의경버스를 털어간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시위를 하러 왔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9. 의경이 미워서, 경찰이 미워서 그들에게 화를 푸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가족과 시위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경찰보다는 정부쪽이다. 정부는 이 전 대통령 이래로 같은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의경과 경찰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푸는 것은 감정과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이다. 소모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게 되면 포기하기에 이른다.
2. 고작 백여명 남짓한 시위자들을 막자고 그 거대한 버스를 한두대도 아니고, 몇대씩이나 동원하여 길을 틀어막아햐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후 있을 시행법 반대와 세월호 인양 시위에서 교통불편을 해소하고,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취를 취한다고 한 것이지만, 글쎄. 이후 사건을 살펴보니 시위자들이 만명 가까이 모인 듯 했고, 경찰과 경찰버스는 그의 몇배나 되는 인원이 모였다. 교통은 물론이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는 마당에 시민안전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않나.
3. 누군가는 이 시위를 보고 '변질'되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애초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엄숙한 세월호 추모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항의하려고 모인 것이다.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목적이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시위를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애당초 세월호 침몰 후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유가족들의 순수한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한 쪽이 어느쪽인지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순수를 더럽혔는가? 또한 순수의 개념과 범위가 너무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시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변질된 시위인가.
4. 그리고 그 사람 말마따나 시위가 조용해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3번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이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인원을 대거 모으지도 않고, 경찰과 대치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은 채 한동안 얌전히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정부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나 했는지. 오히려 종북 빨갱이라며 특례입학 및 배상금 루머를 퍼뜨린 것은, 정부와 친한 언론 및 지지자들이 아니었나. 그럼 그 때 그 루머에 맞서 정부가 제대로 된 사실관계를 밝혀주기라도 했는가. 한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대놓고 빨갱이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얌전히 있어봐야 나아지지 않으며,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시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사실이다.
5. 누군가는 순수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민주사회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소수의 인원이 아닌 다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다수가 순수하게 한 맥락의 말을 가지고 한 가지의 뜻과 의견으로 모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가 불가능하다. 이는 왕권군주제에서는 가능하다. 왕 하나의 의견으로 끝을 보면 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애초에 순수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순수는 민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이다.
6. 이전까지 나는 시위와 진압에 대해 긴가민가 했었다. 시위자들의 말도 맞는 것 같고, 경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도 있었고,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다시말해 꿈틀하려면 먼저 밟혀야 한다. 이 경우 분명 사건제공의 원인은 밟은 쪽이다. 누가 먼저 상대를 밟았는지, 과도한 행동을 취했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확신했다. 이번은 명백히 경찰이 밟은 쪽이었다. 강물을 우물에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반드시 새어나오게 마련이고, 경찰은 새어나오면서 터지는 시위대의 감정적 행위를 유도했다.
7. 개중에 태극기를 태운 시위자가 있다고 한다. 유가족은 아니고, 시위꾼인 것으로 아는데,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와 별개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냐 묻는다면, 그것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호와 불호로 나눌 문제이지, 올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으로써 이루어진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다. 국민은 국가의 부모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거슬렀을때, 국민이 이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한 방법이 태극기를 불로 태운 것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를 태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므로.
8. 그러나 의경버스를 털어간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시위를 하러 왔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9. 의경이 미워서, 경찰이 미워서 그들에게 화를 푸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가족과 시위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경찰보다는 정부쪽이다. 정부는 이 전 대통령 이래로 같은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의경과 경찰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푸는 것은 감정과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이다. 소모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게 되면 포기하기에 이른다.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네트 상에서의 조직화와 네티즌의 암
1. 네트 상에서는 조직화가 오프라인보다 훨씬 쉽다. 90년대 만화 극장판에 나온 인형사의 말마따나 네트는 광대하고, 매우 빠르고 간편하다. 사람이 모여들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으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만한 흥미를 지어내고, 퍼뜨리는데에도 좋은 환경이다. 때문에 조직화가 쉽다. 또한 조직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 구별도 모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최근 연예계 최고의 이슈였던 장동민의 팟캐스트 방송을 예로 들어보면, 우선 장동민의 방송을 듣고 이 사람이 너무나 미워진 나머지, 네트 상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조직을 꾸려 계획을 세우고, 장동민이라는 사람에게 불리한 글을 꾸준히 그리고 널리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후 역풍이 일어난 뒤, 해당 사람들은 부인하거나 침묵했지만 이미 캡쳐까지 나돌아다니는 일이, 모른척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조직을 꾸렸다. 그리고 계획에 맞게 일을 했다. 이 사람들의 조직의 핵심이다. 그러나 핵심 이외에도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직이 올린 글을 다른 곳으로 퍼뜨린, 조직 외 사람들이다. 조직과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조직원과 조직 외 사람들간의 차이는 직접 서로 소통을 하여 계획에 참여했느냐, 아니냐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3. 조직 외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생각해보면 이용당한 피해자이니까. 그러나 그들 스스로 다시 생각해볼진대, 본인이 이용당하기를 원하진 않았는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4. 일련의 장동민 사건은 '장동민'이라는 사람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면서 그 사람의 과거 행적과 (조금이나마)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위 사건을 접하면서 장동민에게 숱한 매질을 했다. 분명 방송은 누가 들었어도 여성비하적인 내용이 농축되어 들어 있었다. 옹꾸라를 들어온 사람들은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은 아니라거나, 음성으로 듣는 것과 텍스트 상의 어감은 많이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이든, 어감이 다르던간에 그것은 분명한 여성비하였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매질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동안 분위기상 움츠려있던 네티즌들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장동민과는 별개로, 네티즌에 관한 문제였다. '과연 매질을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5. 사실 네티즌에게는 권력이 없다. 검사처럼 누구를 기소할 힘도, 판사처럼 판결을 내릴 권리도 없다. 검사나 판사가 헌법의 수호 아래 권력을 가진다면, 네티즌들은 다수의 힘의 수호 아래서 '가짜권리(력)'를 갖는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으로써, 누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여러사람의 고심 끝에 나온 철학적 결과물도 아니다. 정당성도 물론 없다. 가짜권리는 무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나온다. 사실 건달과 다를 바가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니, 무시를 넘어서 칼로 푹 찔러버리는 일도 대수다. 네티즌의 가짜권리는 건달의 사시미 칼과 다를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폭력 농축액이다.
6. 매질을 하는 것은 분명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분위기와 사람에 휩쓸려 매질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분위기 상에서는 반대 의견을 제시해봤자 금세 묻히거나 욕을 먹을 뿐이었다. 장동민을 향한 사시미 칼이,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자 의견을 낸 한 네티즌의 배때지로 향한다. 네트 상에서는 하주 흔한 일이지만,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어쟀거나 그렇게 매질을 시원하게 하고 나니, 이제야 시야가 맑게 개이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생각치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역풍이 일어났다.
7. 장동민은 팟캐스트 방송 이후 몇차례 사과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첫사과는 영 시원치 않은 것이었지만, 당시 팟캐스트가 '듣는 사람만 듣는' 마니아들을 위한 방송이었고, 그 마니아들이 받아들이고 넘어갔다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많은 대중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재차 다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는 매질이 끝난 뒤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매질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몰랐기 때문에, 사과를 한다고 장동민을 용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본인을 정당화하는 중이다. 허나 정당한 폭력따위는 없다. 또한 사과를 한 사람에게 무시라면 몰라도, 폭력을 행하는 것이 어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8. 한 매체 편집장은 장동민이 했던 발언에 대해 '사람부터 되라'고 말했다. 그렇다. 장동민은 사람부터 되야 했다. 그래서 사과 후 팟캐스트 방송을 전부 삭제하고 광고도 전부 컷했으며, 유재석을 찾아가 새출발을 다짐했다. 그 후 그가 폭력적 언어로 누군가를 비하한 적은 없다. 적어도 사과 한 뒤에는 제정신을 차린듯 싶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다. 안타깝게도 편집장은 사과를 했던 것에 대해서까진 조사를 하지 않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편집장의 태도를 매우 존중한다. 장동민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이런식으로 했어야했다. 그냥 칼로 푸욱 찌르는게 아니라.
9. 이전에 걸그룹 '러블리즈'의 한 멤버에 대한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간적이 있다. 결국 루머일 뿐,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멤버는 매우 큰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대중은 사실이 밝혀진 후 무엇을 했는가? 그 멤버에게 찾아가 울며 사죄라도 했을까? 답은 '아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울며 무릎꿇고 사죄해도 모를 판에 떳떳하다고 비판을 한다. 인간의 도리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럼 네티즌들은 어땠는가? 집단 린치를 가한 사람들이 사실이 밝혀지자 모르쇠한다. 어차피 자신이 사실을 왜곡한 '조직'에 알게 모르게 관여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대중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지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10. 최근에는 또 이상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간의 싸움으로 붙은 것이다. 하기야 예상된 것이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자였고, 위에서 언급한 '조직'은 여초 사이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애당초 '여성'비하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싸움은 매우 무의미하다. 그 시간에 본인에 대한 반성이나 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다고 전부 꼴마초인 것은 아니며, 조직을 꾸려 계획적으로 사건을 과장하고 음해한 사람들이 여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 분들께 '너나 잘하세요..'라고 읖조려주고 싶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해야겠고.
2015년 4월 15일 수요일
나는 편안한 작품이 좋다.
나는 만화나 드라마 등의 작품은 평온한 일상을 담은 것을 좋아한다. 영화라면 한 번 보고 끝나거나, 다음 후속작을 보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긴장감이 넘치는 스릴러나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 만화 혹은 액션 만화 아니면 드라마들은 나오는 텀도 훨씬 짧아 초반엔 재밌지만 화를 거듭할수록 보는 내가 지쳐버린다. 그래서 만화든 영화든 편안한 것을 선호한다. 러브 코미디 물까지는 괜찮다, 그래도....
해서 내가 즐겨보는 일드는 '고독한 미식가'이고, 가장 부담없이 보는 만화는 '요츠바랑!'이다. '아즈망가 대왕'도 그렇고 아즈마 키요히코의 작품은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 좋다.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소재를 찾아내서 그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평범함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테고...
생각해보면 나는 요리를 만드는 것도 편안한 것이 좋다. 화려함에 치중하는 것도 물론 보는 맛이 있지만, 보기에도 편안한 요리는 마음까지 진정시켜주는 느낌이다. 수프와 빵이 먹고 싶다.
벤 스틸러의 트로픽 썬더
잘도 이런 정신나간 영화를!
트로픽 썬더의 굵직한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감독이자 주연인 벤 스틸러, 잭 블랙, 로버트 나우니 주니어, 매튜 매커너히, 톰 크루즈.....
그러나 이 배우들이 정상적인 인간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뭐 매커너히가 맡은 릭 정도면 괜찮다 싶겠지만...
최고의 배우들로 이루어진 B급 영화...를 디스하는 액션 코미디 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냥 생각없이 보기에 좋은 킬링 타임 영화이다. 4chan이나 9gag, reddit등을 슬쩍 건드려본 사람이라면 이 미국식 유머 코드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길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이 웃기다.
이 모든 백미를 장식하는 것은 아무래도 톰 크루즈.... 인데 욕을 지껄이는 것이나, 춤을 추는 것이나 뭐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연기가 없다. 씬 스틸러의 충격을 선사한다. 여하튼 재미있는 작품.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히어로란 어떤 존재인가?
'원펀맨'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아마 두,세번째쯤으로 꼽을(
무면허 라이더는 히어로의 존재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히어로는 무릇 적의 위협으로부터 시민과 세계를 수호해야 한다. 설령 자신이 지거나 심지어 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히어로이다. 이것이 무면허 라이더의 히어로관이다. 이는 다른 만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가 그러한 존재. 적의 위협에 맞서 시민과 세계를 수호하는 '빛의 히어로'이다. 캡틴의 이미지는 바르기 그지없다. 또한 그는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맞써 싸우던 자로, 그 정의로운 명분마저 충분하다. 그러나 캡틴이 당도한 현재에서는 어떤가? 전쟁은 끝났고, 나치도 없다. 히어로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무면허 라이더의 세계에는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시민들을 죽이고 건물을 부순다. 그렇게에 분명한 '악'이다. <원펀맨>의 세계에는 과거에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비극적 운명을 거쳐 악당이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산파의 이야기가 (아직까지는)없다. 소년만화 of 소년만화이기 때문. 그러나 다른 히어로의 세계는 어떤가?
앞서 말한 무면허 라이더 외에, '다크나이트'로 대표되는 배트맨과 외톨이같은 로어셰크가 있다. 이 외 마블의 대표적 두 히어로인 캡틴과 아이언맨. 이들의 세계는 어떤가? .... 이렇게 내가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또 늘었다. 언제 다 보느냐가 문제.....
모노반, 청산
밴드 '모노반'의 앨범, <청산>. 앨범명이 대놓고 앨범 스포. 1번 트랙이 교과서에서 이과인들을 괴롭히던 고려시대의 '청산별곡'을 노래로 재해석한 것이다.
2015년 4월 12일 일요일
벚꽃놀이 후기
이번주가 벚꽃놀이의 끝물인 것 같아, 더 늦기전에 벚꽃을 구경하러 다녀왔다. 장소는 경기도청. 좀 더 한적한 물향기 수목원이나 광교호수공원을 갈까 하다가, 이 두 곳에는 벚꽃이 없거나 적은 관계로... 사람이 많은 경기도청으로 향했다. 가기 전, 수원역 AK에서 먹을 걸 샀다. 츄러스와 에끌레어는 사서 바로 먹어버리고, 롤과 만두는 포장해서 챙겨갔다. 나는 역시 초딩 입맛인지라 달달한 디저트들을 질리지도 않고 잘 먹어치웠다. 달콤함에 흡족해하며 버스를 탔다.
길이 밀렸는데도 10여분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걸어서 갔어도 되었을 법한 거리. 내려서 보니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사람도 많고 개도 많고... 오늘이 경기도청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 많이 온 듯 했다. 역시 벚꽃놀이는 평일에 가야 한적하게 놀 수 있구나. 그 때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늦은터라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경기도청 주변에는 벚꽃나무들이 굉장히 많다. 길을 따라 화성으로 쭈욱 내려가는데도 벚꽃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인도에는 벚꽃나무, 산과 맞닿은 도로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이어져 피어있었다. 비록 사람들에 치이기는 했지만 예쁜 풍경이었다. 이래서 벚꽃을 보러 오는구나. 동행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초입까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돗자리가 하나 둘씩 펴지더니, 대부분이 잔디밭에 누워버렸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 수록 사람들이 적어져서 나중에는 제법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시간 즈음 걷다보니 문득 목이 말라져서 아 음료수 사올걸, 하고 후회할 즈음 화성을 통과했다. 아래턱에 편의점이 있길래 음료수를 사러 들어갔는데, 원래는 순수하게 음료를 사려고 했던 것이 그만 아이싱을 사고 말았다. 결국 3시부터 술을 한 캔 마셨다. 챙겨간 롤과 만두도 괜찮았다. 특히 만두는 불 맛이 났다. 표면을 보니 센 불에 볶은 것 같지는 않고, 시즈닝을 넣은 것 같은데 아무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맛있게 먹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데 새벽에는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도 혹시나 비가 올까 싶어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볼 벚꽃도 다 봤기도 하고.
그래도 꽃이 지기 전에 봐서 다행이야.
길이 밀렸는데도 10여분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걸어서 갔어도 되었을 법한 거리. 내려서 보니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사람도 많고 개도 많고... 오늘이 경기도청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 많이 온 듯 했다. 역시 벚꽃놀이는 평일에 가야 한적하게 놀 수 있구나. 그 때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늦은터라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경기도청 주변에는 벚꽃나무들이 굉장히 많다. 길을 따라 화성으로 쭈욱 내려가는데도 벚꽃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인도에는 벚꽃나무, 산과 맞닿은 도로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이어져 피어있었다. 비록 사람들에 치이기는 했지만 예쁜 풍경이었다. 이래서 벚꽃을 보러 오는구나. 동행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초입까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돗자리가 하나 둘씩 펴지더니, 대부분이 잔디밭에 누워버렸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 수록 사람들이 적어져서 나중에는 제법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시간 즈음 걷다보니 문득 목이 말라져서 아 음료수 사올걸, 하고 후회할 즈음 화성을 통과했다. 아래턱에 편의점이 있길래 음료수를 사러 들어갔는데, 원래는 순수하게 음료를 사려고 했던 것이 그만 아이싱을 사고 말았다. 결국 3시부터 술을 한 캔 마셨다. 챙겨간 롤과 만두도 괜찮았다. 특히 만두는 불 맛이 났다. 표면을 보니 센 불에 볶은 것 같지는 않고, 시즈닝을 넣은 것 같은데 아무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맛있게 먹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데 새벽에는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도 혹시나 비가 올까 싶어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볼 벚꽃도 다 봤기도 하고.
그래도 꽃이 지기 전에 봐서 다행이야.
프롬, MOONBOW
가수 '프롬'의 2집 앨범. 1집이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직 안들어본지라 프롬이라는 가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 <MOONBOW>가 프롬을 처음으로 접하는 앨범이었다.
1번 트랙 '달빛댄싱'에서 흫러나오는 멜로디는 프롬과 다른 솔로 여가수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천천히 전개되다가 후렴구에만 빨라지는 평범하고 뻔한 곡 전개가 아니라, 아예 후렴의 전개를 뒤바꾸어 버리는 방식을 사용한다. 전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독특하다. 발랄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느낌.
그러나 이후 트랙들은 다소 진부한데, 산뜻하고 신선한 멜로디이기는 하나, 꼭 어디선가 들어본 곡처럼 뻔하게 들리기 때문.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고 평범하게 좋다. 앨범의 볼륨을 맞추려다보니 일반적인 진행을 택한 듯 싶다.
진부한 분위기는 6번트랙부터 다시 뒤바뀐다. 다시금 색채가 다양해지고 '봄'에 맞춘 상쾌한 멜로디들이 재생된다. 좀 더 밝은 분위기를 띄면서 독특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후 앨범이 끝날때까지 이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 이제 좀 더 들으면 질리겠다 싶을 즈음에 적절히 끝낸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벤 스틸러,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of Walter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영화. 이미 이전에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사하면서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예전 작품을 찾아보니 고전이라 그런지 찾기가 힘들다. 안타까울 따음.
내 추억 속 벤 스틸러는 그저 코믹한 아저씨인데, 이런 진지한 연기를 보자니 괴리감이 들었다...
1. 주인공 월터 미티의 대범하지 못한 성격은 작품이 앞으로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 초반의 월터는 전형적 소시민의 모습으로, 기껏 용기를 내어 짝사랑 상태에게 어필을 하려 해도 에러가 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매우 평범한 인물.
2. 이런 소시민적 모습은 그의 상상으로 인해 더욱 비참하게 보이는데... 말이 상상이지 월터의 그것은 판타지아의 영역이다. 이런 판타지와 상반되는 현실은 월터의 소심함을 부각시킨다.
3.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라이프'지의 모토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라이프'지의 모토 그 자체이고, 하나는 월터의 '삶의 목표', 즉 월터가 나아갈 방향이다. 영화 초반에는 라이프지의 모토와 월터의 삶이 동떨어져 있으나 이후 중첩된다.
4. 생일날 받은 것은 여동생을 통해 엄마가 보내준 클레멘타인 케이크. 그리고 '숀 오코넬'이 보낸 지갑 뿐. 축하해주는 동료 사원은 없다. 회사에서의 월터의 지위를 알 수 있음.
5. 영화는 숀 오코넬의 사라진 25번 필름을 찾아다니며 전개된다. 카메라가 탑 뷰로 월터의 이동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기자기 하면서도 영화가 마치 필름의 현상, 인화 과정처럼 보이도록 한다.
6. 중간중간 걸려오는 'e-하모니'의 '토드'의 전화는 영화를 환기시켜 주며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사실 이는 복선의 한 종류인데, 사소하기 때문에 가볍게 영화의 긴장감을 해소시켜주는 역할 정도로 쓰인듯.
7. 월터의 삶은 오코넬을 찾으며 점차 풍요로워 진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윙크를 300개나 받는데, 이미 월터는 필요가 없어진 후.
8. 화면에 문자 텍스트등을 표시하는 기법으로 영화와 관객간의 거리감을 줄이는 방법을 썼다.
9. 월터가 그토록 험하게 구르면서 숀 오코넬을 찾았건만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맥거핀... 혹은 월터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장치였다. 애초에 가게에서 멍때리지만 않았어도 개고생은 안했겠지만, 삶의 다른 방식이나 목적 역시 찾지 못했을 것이다.
10. 결말까지 보고나면 전형적 미국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중간 과정이 스릴있기 전개된 미국 영화.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켄드릭 라마의 신보를 듣고
신보 앨범 사진을 찾아보니 앨범사진보다 라마 본인의 사진이 훨씬 많다. 고로 앨범 사진 생략.
이전작보다 비트가 경쾌해지고 빨라졌다. 라마 특유의 분위기가 얕게 베어나온다. 그만큼 분위기가 가볍다. 전작이 화려한 어두움을 나타낸 것 같다면 이번작은 가볍게 잽을 툭툭 던지는 느낌. 그러나 라마가 만들었기에 잽이 어퍼컷만큼의 강력함을 지닌듯.
근데 내 취향은 아님.
이전작보다 비트가 경쾌해지고 빨라졌다. 라마 특유의 분위기가 얕게 베어나온다. 그만큼 분위기가 가볍다. 전작이 화려한 어두움을 나타낸 것 같다면 이번작은 가볍게 잽을 툭툭 던지는 느낌. 그러나 라마가 만들었기에 잽이 어퍼컷만큼의 강력함을 지닌듯.
근데 내 취향은 아님.
예전에도 썼던 주제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을 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컵의 기능은 담는 것이다. 물을 담든 달걀을 담든 컵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를 담지 않는다고 해도 컵이 아닌 것은 아니다. 컵을 그냥 가만히 나둬도, 본도로 벽에 붙여놓아도, 작품을 위해 컵을 이어붙여 인형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컵이다. 컵의 기능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컵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컵이 제 용도로 쓰이지 않았을 뿐인데, 최근에는 이 용도마저 애매해지고 있다. 컵의 용도가 정말로 무언가를 담는 것인가? 다른 용도로 써도 컵인데, 꼭 '용도'라는 말로 컵을 한정시켜야 할까? 이 생각은 제쳐두고라도, 컵이 와장창, 깨진 상태인데도 그것을 '컵'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 이상하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컵을 놓쳐 깨뜨려버렸다고 해보자. 친구가 소리를 듣고 달려와 묻는다. '이게 뭐야?' 그러자 답한다. '응. 컵이야. 깨졌어.' 깨져서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컵'이란 칭호는 그 사물에 남아있다. 좀 운치가 있는 사람은 '깨진 컵의 조각들이야'라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컵이란 것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키위해서 그것은 컵이어야 한다. 정확히는, 과거에 한번이라도 컵이었어야 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친구가 달려와 조각들을 보고는 '컵이 깨졌네'하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이는 친구가 조각들을 보고 그것이 컵이였음을 추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컵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은 과거에 그 컵을 보았었을 수도 있다. 만일 컵을 과거에 본 적도 없고, 컵이 산산조각나서 가루만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바로 가루들을 보고는 그것이 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규정하는 힘이 계속해서 남아있으려면, 이전에 그것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기억이 남아있거나, 내가 아는 컵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조각들이 갖고 있거나. 만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이상한 이미지의 컵이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컵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다른 경우도 있다. 친구가 달려와 조각들을 보고는 '컵이 깨졌네'하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이는 친구가 조각들을 보고 그것이 컵이였음을 추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컵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은 과거에 그 컵을 보았었을 수도 있다. 만일 컵을 과거에 본 적도 없고, 컵이 산산조각나서 가루만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바로 가루들을 보고는 그것이 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규정하는 힘이 계속해서 남아있으려면, 이전에 그것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기억이 남아있거나, 내가 아는 컵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조각들이 갖고 있거나. 만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이상한 이미지의 컵이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컵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뒤늦은 <초속 5cm> 리뷰
아니 분명 지난글에서 '초속 5센티미터나 봐야겠다'라고 써놓고 신나게 룰루랄라 영화를 봐놓고는 왜 아직까지 리뷰를 안쓴것일까. 안타깝게도 지금 내 기억속엔 당시 영화를 보았던 감상의 단편이 얼마 없다. 이래서 바로 써야하는데. 멍청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봤던 게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려고 했던거라 분석해둔 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단편적인 느낌밖에 생각이 안난다.
영화는 그 내부에서 3편으로 나누어진다. 나이로 따지면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연애기로 따지면 연애초기, 중기, 말기이다. (사실 말이좋아 연애 중기, 말기이지 실상은 권태기나 다름없다.) 1편의 내용은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오면서 전개된다. 두 초등학생이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를 이야기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등학생이 수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낭만을 뿜어낸다는 것이, 참 대견하다. 아무튼 1편의 전개는 그 낭만적인 대사가 표현하듯, 귀엽고 예쁜 사랑의 이야기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아름답고 예쁜 1편의 사랑을 화사한 봄의 색깔과 새벽 어스름의 청아한 파란빛으로 감싼다. 관객은 그 색깔로 하여금 이 두 학생의 사랑을 머릿속에 좀 더 깊이 각인시킬 수 있다. 분홍과 파랑. 1편의 사랑은 이 두 색깔이다.
2편에서부터는 바로 내리막을 걷는데, 1편과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난다. 여자애야, 남자애가 편지를 보내다가 뚝 끊어버렸으니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지만, 남자애가 편지를 갑자기 끊어버린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 때문에 남자의 태도에 거센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게다가 이런 남자의 성격은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동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를 더욱 애처롭게 하는 것은 남자 곁에서 맴돌며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여동급생. 고백을 하려 하지만 남자의 시선에 자신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해버리고 만다. 궁금증은 증대된다. 남자는 주변의 여자애를 보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에게 편지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단편적으로만 보면 남자의 행동이 답답한데서 그칠 수 있지만, 더욱 깊숙히 들어가보면 나름의 이유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2편에서 나오는 우주가 바로 남자의 마음상태를 대변하는 부분. 그녀와 함께 우주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그녀와 닿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는 말을 대변하듯이 2편의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3편은 엇갈리는 둘을 보여준다. 남자는 졸업 후 다른 여자와도 연애를 해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나. 그 내면만은 무언가 텅 비어버린 채 인형처럼 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이미 남자를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건설한 상태. 이 둘의 엇갈림은 그 옛날 둘이 어렸던 시절 함께 벚꽃을 보고 돌아가던 기찻길에서 이루어진다. 기찻길은 1편에서나 3편에서나 헤어짐의 길이다. 1편에서는 여자애가 '다음에 또 보러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기차가 지나가버려 모습을 가린다. 3편에서는 서로 엇갈려 걷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열차가 지나가버려서 결국 재회하지 못한다.
생각이 나지않아서 주섬주섬 억지로 기억을 모아가며 쓴거라 글이 좋지 않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한때의 실수로 헤어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전개에 나사가 하나 빠져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스토리와 그림이 잘 맞아떨어져 입소문을 탄 듯.
영화는 그 내부에서 3편으로 나누어진다. 나이로 따지면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연애기로 따지면 연애초기, 중기, 말기이다. (사실 말이좋아 연애 중기, 말기이지 실상은 권태기나 다름없다.) 1편의 내용은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오면서 전개된다. 두 초등학생이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를 이야기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등학생이 수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낭만을 뿜어낸다는 것이, 참 대견하다. 아무튼 1편의 전개는 그 낭만적인 대사가 표현하듯, 귀엽고 예쁜 사랑의 이야기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아름답고 예쁜 1편의 사랑을 화사한 봄의 색깔과 새벽 어스름의 청아한 파란빛으로 감싼다. 관객은 그 색깔로 하여금 이 두 학생의 사랑을 머릿속에 좀 더 깊이 각인시킬 수 있다. 분홍과 파랑. 1편의 사랑은 이 두 색깔이다.
2편에서부터는 바로 내리막을 걷는데, 1편과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난다. 여자애야, 남자애가 편지를 보내다가 뚝 끊어버렸으니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지만, 남자애가 편지를 갑자기 끊어버린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 때문에 남자의 태도에 거센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게다가 이런 남자의 성격은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동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를 더욱 애처롭게 하는 것은 남자 곁에서 맴돌며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여동급생. 고백을 하려 하지만 남자의 시선에 자신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해버리고 만다. 궁금증은 증대된다. 남자는 주변의 여자애를 보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에게 편지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단편적으로만 보면 남자의 행동이 답답한데서 그칠 수 있지만, 더욱 깊숙히 들어가보면 나름의 이유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2편에서 나오는 우주가 바로 남자의 마음상태를 대변하는 부분. 그녀와 함께 우주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그녀와 닿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는 말을 대변하듯이 2편의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3편은 엇갈리는 둘을 보여준다. 남자는 졸업 후 다른 여자와도 연애를 해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나. 그 내면만은 무언가 텅 비어버린 채 인형처럼 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이미 남자를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건설한 상태. 이 둘의 엇갈림은 그 옛날 둘이 어렸던 시절 함께 벚꽃을 보고 돌아가던 기찻길에서 이루어진다. 기찻길은 1편에서나 3편에서나 헤어짐의 길이다. 1편에서는 여자애가 '다음에 또 보러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기차가 지나가버려 모습을 가린다. 3편에서는 서로 엇갈려 걷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열차가 지나가버려서 결국 재회하지 못한다.
생각이 나지않아서 주섬주섬 억지로 기억을 모아가며 쓴거라 글이 좋지 않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한때의 실수로 헤어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전개에 나사가 하나 빠져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스토리와 그림이 잘 맞아떨어져 입소문을 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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