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예를 들자면, 한 때 열풍했던 장미칼이 그 특유의 톱날 모양으로 인해 식재료를 썰기에는 부적합하고, 오히려 공구로 이용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식칼이라고 나온 상품이 식재료 앞에서는 젬병인데 공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칼로서의)기능이 구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칼로 고기 대신 나무를 자를 때 드디어 깨닫는다. '뭐 이딴게 있어?' 그리고 새 식칼을 사러 간다. 식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장미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스스로 한계를 인식해야만 의지가 생긴다. 그 후 목표가 생기고, 아 내가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더 이롭겠구나,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Profit!
그런데 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기에? 이는 후에 말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1번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장자는 도가 사상의 중요 인물로서, '마음을 비움'을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사상은 간단히 말해, '비운 자리에 도가 자리잡는 것'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비워야 주스를 따를 수 있다. 물을 버리지 않고 주스를 따르게 되면 맛이 이상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와갤요리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기심, 관념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이를 '허심'이라 하는데,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심을 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로서'와 '~로써'가 너무 헷갈린다...
3. 인간은 대對존재 관계를 지배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먼 옛날 둘리가 엄마와 함께 있었을 당시에는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던 인간이, 여러 혁명을 거쳐 세계의 중심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지배자가 되었다. 숲을 도려내어 집을 짓더니 요즘은 골프장 등의 여가시설을 짓는다. 필수시설도 아닌 여가시설을 짓는다. 게다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부동산 시장을 위해 잉여주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은 공생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된지 오래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자신을 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폐증이다. 타 존재가 하는 말이, 언어의 소통으로 들리지 않고 소음으로 들린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를 새로이 성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칸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객체에 의거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천적 형식으로 인해 객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특징들을 찾아내어 그 나무를 인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생각한 그 나무의 특징으로써 우리가 나무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눈에 비친 나무의 본질 중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인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는 흡사 모 만화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중2병'과 같다.
자기-존재(세계-내-존재)는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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