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1일 화요일

걱정 말라는 말

  '걱정마' 혹은 '쓸데없는 걱정하지마'라는 말이 무심하게 들린다. 마치 나는 귀찮으니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투같다. 아무리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도 얼음장같은 입김이 새어나온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자주 내뱉었고, 스스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남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선 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상대방을 향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면서 그 이유를 조근조근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바란 것은 공감이었고, 해묵은 상식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이런식으로 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얄미웠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대를 멋지게 안심시켜보리라 했지만, 해줄 말을 찾느라 상대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니,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공감이 될리 없었고, 진정성있는 대답을 할리 만무했다.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했다. 누군들 걱정이 쓸데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걱정을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로 다시금 힘을 얻는 것이다. 어쩌다보면 운 좋게 해답이 나오기도 한다. 걱정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무시했다. 쓸데없다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도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자아가 뚜렷할수록 그렇다. 에고가 강할 수록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고민하다가 가끔씩 무너지면 비참하다. 그래도 걱정을 한다. 걱정에는 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걱정은 결국 잊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해답이 나와서 해소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 잊혀짐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결국 해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걱정에 나는 희망을 무시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해답을 엉터리로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보니 나의 사고가 비참하다.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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