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을 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컵의 기능은 담는 것이다. 물을 담든 달걀을 담든 컵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를 담지 않는다고 해도 컵이 아닌 것은 아니다. 컵을 그냥 가만히 나둬도, 본도로 벽에 붙여놓아도, 작품을 위해 컵을 이어붙여 인형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컵이다. 컵의 기능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컵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컵이 제 용도로 쓰이지 않았을 뿐인데, 최근에는 이 용도마저 애매해지고 있다. 컵의 용도가 정말로 무언가를 담는 것인가? 다른 용도로 써도 컵인데, 꼭 '용도'라는 말로 컵을 한정시켜야 할까? 이 생각은 제쳐두고라도, 컵이 와장창, 깨진 상태인데도 그것을 '컵'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 이상하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컵을 놓쳐 깨뜨려버렸다고 해보자. 친구가 소리를 듣고 달려와 묻는다. '이게 뭐야?' 그러자 답한다. '응. 컵이야. 깨졌어.' 깨져서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컵'이란 칭호는 그 사물에 남아있다. 좀 운치가 있는 사람은 '깨진 컵의 조각들이야'라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컵이란 것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키위해서 그것은 컵이어야 한다. 정확히는, 과거에 한번이라도 컵이었어야 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친구가 달려와 조각들을 보고는 '컵이 깨졌네'하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이는 친구가 조각들을 보고 그것이 컵이였음을 추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컵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은 과거에 그 컵을 보았었을 수도 있다. 만일 컵을 과거에 본 적도 없고, 컵이 산산조각나서 가루만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바로 가루들을 보고는 그것이 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규정하는 힘이 계속해서 남아있으려면, 이전에 그것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기억이 남아있거나, 내가 아는 컵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조각들이 갖고 있거나. 만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이상한 이미지의 컵이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컵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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