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보의 흐름은 정보의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령 정보의 흐름을 Information으로 잡았을 경우, 어떤 데이타의 특정한 형상, 즉 Form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많은 매스미디어와 비슷하게, 그 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에 있다.
그러나 개념을 다르게 잡는다면, 정보는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흐름(말이 이상한데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을 띄게 된다. 이때 목적은 타인과 협력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권가 찌라시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내용 -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
함축적으로 말하다보니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으로 표현했으나, 실상은 그 사물이 원래 목적대로 쓰이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쓰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비껴나간다면 '손 안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보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언맨이 신나서 울트론을 창조했다. 그러나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세계평화의 수호자는 커녕 빌런의 길을 걷는다. 이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손 안에 없는'상태이다. 심지어 울트론이 스스로 '나는 줄에 묶여있지 않아요'라고 노래까지 부르며 확인사살을 시켜주는 판에....
이런 경우도 있다. 만일 울트론이 토니의 뜻대로 수호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울트론이 약해 빠졌다면? 울트론은 토니가 만들어놓은 목적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구를 아예 잘못 쓰거나 도구의 질이나 상태가 안좋거나-우리는 도구와 도구를 이용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식한다. 식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식칼에 대하여, 썰고 다지는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행하지만, 식칼이 남을 죽이는 것에 쓰인다면 그 행위와 식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적' 의미를 강하게 띄므로 위와 같은 의식이나 자각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어젯밤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그 주제로 실컷 이야기하는 어머님들을 보라. 이분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소통과 공유를 넘어 유흥이다. 그러나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에 목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스스로 내가 남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은 내가 아는 정보밖에 알 수 없다. 다른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경우 우리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보다 타인과 소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맛집을 찾을 때도 타인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고자 하지 않는가.
3. 맥주 마셔서 그런지 나른하다. 3은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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