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에피톤 프로젝트, 선인장.

https://youtu.be/x8QxsFQBjhA


 가슴 따뜻한 노래이긴 한데, 난 왜 배가 고플까.

카톡 프로필.

 카톡 프로필에 써놓는 글은 각기 다르다. 누구는 힘든 인생을 밝게 살아가기 위해 좋은 글을 써놓고, 누구는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 누구는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적기도 한다.

 나의 프로필은 수시로 바뀐다. 글 또한 수시로 바뀐다. 무거운 생각은 카톡 프로필에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가벼운 이야기를 쓴다. 그래서 수시로 바뀐다.

 프로필의 글은 자신의 감정이나 관심사를 나타낸다. 누군가는 나처럼 프로필을 수시로 바꾸고, 누군가는 몇 달이 지나도록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생각이 작은 핸드폰 화면에 드러난다. 그래서 특별하다. 가볍지만 특별하다.

 당신의 카톡 프로필에는 무슨 글이 적혀있는가.

보도 연맹과 총풍 사건.

 워낙에 안습한 역사가 많은 한반도이지만, 임진왜란 이후와 일제 강점기 이후, 이승만 정권 이후의 역사는 더욱더 눈물이 난다. 그나마도 덜 밝혀진 사건들이 많아서 제대로 된 진실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진실을 알렸다가는 현 대한민국의 수뇌부들은 대부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그게 정상이다만....

 대한민국이 건설된 후의 역사는 그야말로 태풍과도 같았다. 독재 정권이 연이어 세워지고, 병크를 터뜨려 국민들을 학살하는 일이 매번 일어났다. 그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지쳐가다 죽거나, 싸우다 죽거나, 어쨌든 많이 죽었다.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기는 했으나, 독재의 군화발에 밟힌 희생자들은 피눈물을 흘렸고, 현 경제는 완벽한 정경유착을 이루어냈다. 물론 정경유착의 경우에는 독재자의 탓만은 아니지만서도.

 그래도 많은 일들이 밝혀졌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겨우겨우 조사하여 진실이 알려졌고, 아직도 일부 몰지각하고 무식한 일당들은 진실을 부정하고 있으나,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뻔한 끔찍한 일들이 드러났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이 쉬쉬하며 말하기 꺼려하는 일들이 있다.

 제주 4.3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 치하 사건, 부림 사건 등등 많은 독재의 병크들이 드러났으나, 아직도 보도 연맹 학살 사건은 그 이름이 생소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무 죄 없는 자국의 국민들까지 학살한 최악의 사건인데도 말이다. 본래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관리하고 재교육하기 위한 활동이었으나, 공무원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반강제적으로 월남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반인들까지 가입시킨 보도 연맹. 단연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히기에 하자가 없는 이승만 시절, 북한이 쳐들어오자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한 한국군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이때 정부는 보도 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북괴이기 때문에. 그러나 보도 연맹에 가입된 많은 수의 사람들은 북한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결국 정부는 제 손으로 자국의 국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셈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총풍 사건을 찾아보다가 어이가 없어져서 끼워 쓰려고 한 것이다. 총풍 사건이란, 1997년 제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 측이 지지율을 높일 목적으로 북한측을 만나 휴전선 근처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결국 무력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가장 거대한 당 중의 하나인 한나라당과 그 당의 대표인 정치인이 고작 지지율때문에 적에게 가서 나라를 위협해달라고 한 사실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결국 선거 패배. 그런데 보나마나 ㅇㅂ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이 이 총풍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게 화가 난다. 총풍 사건은 법원에서도 유죄라고 판결이 난 사안이다. 이후 총풍 사건을 조사하는 와중에 과격한 방법으로 조사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그에 대하여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라는 판결이 난 적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풍이 무죄라는 판결이 난 적은 없고, 역시 유죄 그대로이다. 그런데 ㅇㅂ인간들은 자기네 상상속에서 총풍 사건을 조작된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설파하고 있으니, 세상 참....

2014년 3월 30일 일요일

3월에 들은 앨범 정리.



 Lost In The Trees의 Past Life. 이번달에 들은 앨범 중에서 가장 좋게 들은 앨범이다. 이런 분위기의 노래들이 점점 좋아진다.




 Beck의 Morning Phase. 솔직히 이 앨범은 좋긴 한데 내 취향이 아니라서... 조용조용한 앨범.





 다프트 펑크의 리믹스 앨범. 그냥 다펑스러움.





 더 프레이의 신보. 형님들 아직 살아계시다. 특유의 처량한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





 패럴 윌리암스의 GIRL. 잘 만든 웰메이드 앨범. 패럴은 작년부터 물이 올랐다.




 스크릴렉스의 Recess. 기대하고 들었는데 글쎄... 좀.....

얼마전 보았던 흥미로운 실험.

 자주 눈팅하러 가는 한 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한 남매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남매는 둘만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계를 맺었다. 둘은 확실한 피임도구를 사용했고, 관계를 맺은 결과 성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았고, 둘의 친밀도 또한 더욱 높아졌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문제시 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글에는 콜로세움이 열리기 마련. 많은 댓글들이 달리며 문제가 된다와 안된다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사실 이 글은 정말로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묻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설문의 결과는 이러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판단을 할 때, 이성보다는 근저에 깔린 혐오감이 앞선다는 결과였다. 사실 저 남매의 행위는 이성적으로 볼 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저 남매를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근친에 대한 혐오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

맛있는 중국집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오늘이 휴일임에도 학교에 나갔다. 동방에 가서 청소를 하기 위해서. 우선 첫번째로는 암실을 청소했다. 모든 것을 들어내 동방 밖으로 놓고서, 그 텅빈 암실에서, 우리는 물청소를 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발바닥의 물 감촉에, 남자 네명은 해운대에 놀러온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청소는 뒷전이고 물놀이를 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청소는 했다. 놀거 다 놀고 청소를 하려니, 해운대는 어디가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눈 앞에 펼쳐졌다. 둑을 풀어라. 그리고 우리는 마치 수나라의 군사들처럼 퐁퐁의 거품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그렇게 암실 청소가 끝났다.

 랩실 청소를 하는 동안에는 친구와 함께 상도역에 있는 다이소에 용품을 사러 갔으므로 청소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청소 대신에 용품을 사러 가겠다고 지원한 것이 큰 착오였다는 것은 안다. 날은 더웠고 상도역은 멀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스팔트 사막에서 우리는 여러번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했다. 스쿠터를 훔쳐 상도역까지 달아났다가 다시 돌려줄까 생각도 해 보았고, 지나가는 여자를 붙잡아 대체 다이소가 어디있는 것인지 싹싹 빌면서 물어볼까 고민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게를 찾은 뒤 나는 다시한번, 진열된 음식을 보고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했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정말 후회되었다.

 그리고 동방에 돌아와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다. 나혼자 외로이 짬뽕을 시켜 먹었다. 이상하다. 내가 그 중국집 가게에 가서 먹은 짬뽕의 맛은 이렇지 않았는데. 배달오실 때 오토바이 기름과 함께 조미료라도 흘리면서 오셨나. 조금 실망했다. 배고프니 맛있게 느껴지긴 했었지만, 좀 아쉬웠다. 뭔가가... 제대로 된 음식은 어딜가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고민해본다.

2014년 3월 29일 토요일

변화하는 인문학.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이다 보니 날이 갈수록 살기가 빡세진다. 힘들다. 누군가 나를 일으켜줄 수 있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변화한 인문학은 이러한 이유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인문학이나 철학은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학문적인 것은 고리타분해보이고 읽기도 힘들며 재미도 없으며 배우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이제는 인스턴트 같은, 빠른 시간내에 배울 수 있는 학습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스스로 학습하기보다는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주기를 원한다. 이에 발맞추어 최근의 인문학 강사들은 이러한 강의들을 하고 있다. 빠르게 알려주어야 하다 보니 인문학도 변했다. 정확히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 강의가 변했다. 이제 학문은 주목받지 않는다. 술이 주목받는다. 술하는 능력. 술이란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학자들의 지식은 술함으로써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퍼진다. 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장소에서나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말이란 것은 말하는 화자만이 말하는 주제와 화술을 알고 있으므로, 훌륭한 화자를 모시기 위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만일 텍스트로 했다면 더욱 쉽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시간을 많이 먹는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각광받지 못한다. 같은 인문학인데도!

 인문학은 갈수록 개인적이다. 이전에는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개인의 감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일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짓기도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정말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방향으로 변한 것이다. 아 마무리 어떻게 하지.

다시 쓰는 고대 철학.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회귀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육체는 점차 자연의 일부로써 돌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를 '부패'라고 부른다. 육체는 점차 살아 생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알아보기 힘든 모양새로 바뀐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인간이 살아 생전에 가지고 있던 타인과의 소통과 기억, 인품과 같은 퍼스널 아이덴티티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죽은 이의 육체는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육체는 확실하게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기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육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죽은 기억과 지식의 찌꺼기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뇌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에서, 고대 철학자들은 이를 보고 영혼이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라진 영혼은 죽지않고 살아서, 마지막 숨과 함께 날아가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이 날아간 곳은 어디일까?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를 비롯한 (그 기록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고대 그리스의 책들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이 죽으면 하데스, 즉 지하 저승세계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은 하데스로 내려간 후 일정한 루트를 따라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가 있는 궁전으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혼들은 다섯 가지의 강을 건너게 된다. 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레테 그리고 스틱스가 그 다섯개의 강들이다. 영혼들은 이 강을 건너면서 비통과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 영혼이 정화되기도 하며, 모든 기억을 잊기도 한다. 하데스의 궁전에 당도한 영혼들은 심판을 받고 각자 가야할 곳이 정해진다. 낙원 엘리시온에 가는 자와 지옥 타르타로스에 가는 자가 있는 반면에, 다시 환생하는 자들도 있다. 환생하는 자들은 엘리시온에 갈지 타르타로스에 갈지 판단하기가 애매한 자들로써, 그저 그렇게 평범히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엘리시온에 가게 되면 이름으로만 듣던 영웅들이 살고 있다. 아무튼, 환생한 사람들은 각각 인간이나 다른 종류의 동물로 태어나 다시 인생을 산 후에 또 심판을 받게 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혼의 회귀 개념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온 뒤, 다른 동물에게로 옮겨간다고 주장하였다. 하데스의 심판따위는 개입하지 않는다. 영혼은 다른 생명체로써 태어나게 된다. 만일 내가 인간으로써 죽고, 그 영혼이 다른 종류의 개나 돼지같은 동물에게로 옮겨가 새로 태어났을 경우, 나는 다시금 인간의 몸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정한 순서로 배치된 동식물을 거쳐 인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으로 복귀할 수 없다. 정해진 순서가 지나야한다. 이 경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세계의 생명의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죽어서 개가 되고, 개는 죽어서 돼지가 되고, 돼지는 새가, 새는 식물이, 식물은 인간이 된다. 모든 영혼들이 육체를 옮겨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생명은 바로 이전에 죽은 누군가의 영혼인 셈이다. 고로 생명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 내 앞에 있는 개가 이전에 죽은 내 친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라고 해도 그 개는 언젠가 인간이었던 존재였으므로 모든 동물들이 나와 같은 부류(?)인 셈이 된다. 그러므로 동물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깊게 생각해보면 피타고라스가 운명론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들의 영혼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들이 같은 시간에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총량이 변하지 않을 뿐더러, 떠도는 잉여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 내가 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쳐보았자,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결국 어떻게든 정해진 날에 죽게 된다. 나의 자유의지는 반영 되지 않는다.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주장한 영혼의 회귀이다.

 피타고라스 편 끝.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Owl City, Fireflies




 참 좋은 노래.

나의 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인 전쟁이다. 지난달부터 아침이 되면 약 맞은 듯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오후가 지나 해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시간이 되면 격한 감정들에 사로잡힌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떤 일인가로부터 매우 더러운 감정을 받았으나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다들 나만 이상하게 쳐다볼 테니까.

 사실 나를 어떻게 볼 사람들이 없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터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초등학교 6학년의 방학은 오직 나만의 세계였다. 가족외에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었고, 가족마저도 맞벌이로 바쁘신 부모님이 전부인지라 하루의 대부분을 나 혼자서 보냈다. 매우 기분좋고 행복한 하루하루가 펼쳐졌다. 그 땐 그랬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지내는 것이 어색한 구조로써 태어난 존재인데, 억지로 복잡한 틀에 끼워 맞춰져서는 맞지도 않는 옷과 가면을 쓰고 시시덕 대야 하는 것이 버겁다. 혼자 있고 싶은데.

 그래서 요즈음은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에 빠져들면 타인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 그곳에는 오직 나 뿐이다. 생각하는 것 만큼 끝없이 넓어지는 광활한 공간속에서 티끌만한 크기로 남아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고, 가끔은 동물들과 함께 한다. 내 머리의 우주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얼마 못가서 현실이 끼어들고 만다. 아마 이 시각이 저녁즈음이다. 다시금 가라앉는다.

 나와 전쟁을 일으키는 놈은 나의 가장 오래된 라이벌이다. 어렸을 때는 원수같은 놈으로 여겼지만, 생각해보면 그 녀석 만큼이나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놈도 없다. 원수라기보다는 동행자다. 다만 미운 동행자일뿐이다. 늘 나에게 싸움을 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싸움을 피할 수가 없다. 피할 길이 없다. 어렸을 적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겨왔다. 아니지, 이겨온 게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쳐 전쟁이 끝난 적이 없구나. 20년동안 전쟁중이다. 언제 끝날지, 누가 이길지 모른다. 그러나 요 근래에는 녀석이 우위를 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는 십년이 넘도록 사과 한마디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또한 나와 아는 사람들은 전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만을 골라서 한다. 물론 내 마음이 불안정한 데다가 좁은 탓이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할 수 있는 행동이, 타인을 보는 나의 옴팡한 시선에서는 금세 그릇된 행동으로 비춰지고야 마는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역시나 모든 소통을 끊고 살아가야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육학년의 그때처럼?

 모두가 우유부단하면서도 마음이 여리고, 엄청나게 가식적이다. 그들도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감출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단순한데, 그것을 가식으로 덮고 싸고 하다보니 마치 그가 세상의 모든 짐을 안고 있는 것처럼 포장되고 만다. 어떻게 아냐면, 내가 그랬거든. 사실 모두 단순한 일들인데 드라마의 주인공마냥 스스로를 안타깝게 생각하다보면 점점 더 가식적으로 변한다. 물론 모두가 가식적이라는 것은 나의 착각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확률이 무슨 소용인가. 내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라이벌에게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을때, 나는 무엇으로 다시 한번 버티고 일어섰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두번도 아니고, 몇번씩이나 다시 태어났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머리가 복잡하다. 나는 다시 역전할 수 있을 것인가. 작은 전쟁은 언제 끝나게 될까. 영원히 나의 삶과 함께하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을 이렇게 빛과 그림자를 드나들며 지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이 아프다. 나의 복제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면서 체온을 느끼고 싶은 심정이다. 타인은 필요하지 않다. 내가 있어야 해.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영혼덕후인 고대 그리스인들.

 기원은 피타고라스부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서양 고대 철학사의 근원을 피타고라스에서 찾는다. 서양 고대 철학의 시초야 플라톤이지만, 플라톤은 자연철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서양 고대 철학의 개념적? 학술적 근원은 피타고라스라고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이 자연관찰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눈을 돌리게 해 준 장본인이다.

 그러나 사실, 피타고라스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사실 피타고라스는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하지 않았다. 다만 전설적인 일화들이 신화처럼 내려져오고 있을 뿐이다. 피타고라스는 제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앞에서 '특별한 침묵'을 행했다고 알려져온다. 그 특별한 침묵이란 아마도 피타고라스가 깊게 생각하고 나서 떠오른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것을 주워담아 철학으로 만들어 낸 것은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이어싸. 사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의 제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영혼에 주목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부패하고 영혼이 빠져나와, 다른 종류의 동물로 옮겨간다고 주장하였다. 아 잠깐만 일 생겼다. 투 비 컨티뉴드.

운명과 자유의지의 경계는 어디인가.

 운명론자들은 인생이 짜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전에도 썼던 이야기이지만 조금 다른 소리를 해볼까 한다.

 운명론자들은 인생이 짜여져 있다고 주장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삶을 살다가 지쳐서, "어차피 인생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니까"라며 하던 일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 이를 운명론자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걸 운명에 맡긴채 손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숙명론자'라고 하는데, 운명론자들은 숙명론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불쾌히 여긴다. 운명론자들은 모든 일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결정해야 하는 일들에 대하여 사람의 의지가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비록 정해져 있는 인생을 살지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과 자유의지의 경계는 어디일까? 내가 선택함으로써 나의 인생이 변한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허나, 그마저도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나의 의지는 그저 그림자일뿐, 실제로는 운명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운명은 절대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몇몇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운명론자들의 말마따나 사람의 자유의지가 인생에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운명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매일 선택한다. 지금 과제로 힘들어하고 있는데, 이 과제도 결국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일 내가 숙명론자가 되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면 나는 F를 맞게 될거다. 이때 나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은 것인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동을 취할때, 나의 선택은 반영될지라고 그것을 의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 않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과제를 어떤 방향으로, 언제 할지 정한다면 그것은 의지와 선택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과제를 한다. 성적이 나온다. 성적에는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가? 만일 운명이라면 내가 어느정도로 열심히 과제를 할지와 어떤 점수를 받게 될지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나의 의지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아 갑자기 쓰다보니 피곤해지네. 운명론은 피곤하다...

 다시 써봄.

 나는 매일 의식을 가지고 선택한다. 선택함은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내가 자각을 하기 때문에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자각은 생각없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나는 매일 생각하는 셈이다. 생각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실히 할 수 있다. 내 육신이 실존하지 않는 허구일지라도, 적어도 나는 생각하고 있으니 나의 자아는 존재가 확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써 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나의 의지가 무용지물인 운명론에서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다. 모 종교에서는 운명론을 들며, 나의 존재가 신을 믿음으로써 확인된다고 하지만, 그 신이 실재하는지부터 확인이 되지 않은 마당에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만일 신이 자아를 가지고 실존한다면 우리는 그의 의식 속에서 뛰노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신의 자아는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불사함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다음에 적기로 하고...

 정녕 운명론에서는 나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운명론자들이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일단은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 것일까. 나의 의식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의식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존재는 운명의 흐름을 타고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는 걸까. 운명론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만약 방법이 없다면 나를 입증할 수 있는 자기개척을 주장하는 쪽이 운명론보다 믿을 만한 이론이라고 하겠다. 아니, 자신의 존재 입증 방법이 없다면 운명론은 허구이다. 나의 존재를 입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론이 존재 가능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오아시스, 위대한 밴드.

 나의 음악 성향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흑인 음악 쪽이었다. 재즈나 알앤비, 힙합 등의 음악을 즐겨 들어왔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아무래도 예체능반에 들어가다보니 주변에 락에 관심있는 놈들이 많았고, 자연스레 나도 락을 접하게 되었다.

 첫 시작은 스웨이드였다. 나중에 스웨이드의 곡을 올릴텐데, 이 밴드의 Beautiful Ones는 참 충격적으로 좋았다. 그리하여 다른 밴드들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붉고 매운 고추들과 화학적 로맨스, 음악의 여신, 머리가 라디오인 밴드, 살인자들 등등 조금 대중적인 밴드들의 음악을 들어보았다. 그러나 나에게 최고의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오아시스였다.

 그들의 어느 곡을 가장 처음 들어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Live Forever였나? 단순학 구성으로 이루어진 곡이 이렇게나 멋질 수가 있구나, 라는 것을 느껴보았다. 그 뒤 본격적으로 오아시스 빠돌이를 해야겠다, 노엘 사랑해요, 게이는 아니지만, 이라고 할 때쯤 오아시스는 해체해버렸다. 이유는 리암과 노엘의 사소한 싸움. 물론 예전부터 쌓였겠지만.

 오아시스하면 제 2의 비틀즈라는 수식이 따라 붙고는 하는데, 비틀즈 세대가 아닌 나는 비틀즈 음악을 들었을 때, 남들이 말하는 것 많큼의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언하여 말하건대, 오아시스의 모든 곡들은 훌륭하다. 내 취향에서는 비틀즈보다도 더 훌륭하다. 흔히 오아시스하면 리암이나 노엘이 나와서 "이건 미국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 "그러니까 엿같은 우리 티셔츠나 사라고." 등등 자만심 넘치는 인터뷰가 유명하지만, 이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음악을 했다.

 밑에 글에 Stand By Me를 올렸으니 여기에는 다른 곡들을 소개해본다.




 Wonderwall.





 Whatever.





 Live Forever.

 세곡만.

 리암과 노엘은 현재 각자 다른 밴드로 활동중이다. 개인적으로는 노엘의 음악이 매우 훌륭하다고 느낀다.

우울할때는 락 러쉬



 내가 제일 좋아라 한 밴드, 오아시스의 Stand by me.




 오래간만에 듣는 더 프레이의 You Found Me. 사실 이건 더 프레이 신보 발매 기념.....




 국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더 스크립드의 Breakeven.




 원 퍼블릭의 대표곡인 Good Life.

우와 과제랑 시험이랑 겹친당

 기분이 좋다ㅎㅎㅎㅎㅎㅎㅎ아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이걸 어쩌짛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죽일수도없곻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가을방학, 취미는 사랑




 난 영문과가 아닌데도 영어 번역이 과제로 나왔다. 심지어 전공과제가 영어책 번역.

 지금 과제하는 중인데 빡쳐서 좀 말랑한 노래 들으려고 올리는 곡.

 살려줘여 으헝ㅎ헣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물 흐르듯 생각해야지

 요즘 예민했던 것 같다. 고집을 줄여나가야겠다. 동들동들하게.

Enya, Only If




 중학교 때 많이 듣던 노래.

 한때 뉴에이지에 빠져서 바라캇은 물론이고, 엔야와 야니 음악을 듣던 때가 있었다.

 http://pann.nate.com/video/213279312

관심종자의 유구한 역사.

 sns가 흥하는 이 시기에 누군가는 sns의 과도한 주목성을 비판했다. 열린 공간이라는 특성상 누군가가 나를 원하기만 하면 나의 일과를 살펴볼 수 있는 sns. 그곳에서는 타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현실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든지 살피고, 살핌을 받을수도 있는 특성이 관심을 갈구하는 뜨거운 욕망을 만나 관심종자를 배양하였다. 관심종자는, 줄여서 관종은 그 수위가 귀여운 것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세마치장단으로 나오는 심각한 것에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끝내 심각한 수준에 이른 후에 많은 이들의 질타를 받고 저 아래 루시퍼가 사는 세계로 곤두박질친다.

 그러나 실은 이 관종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인터넷의 산....증인이다. 많은 관종들은 이전부터 자신의 블로그나(관종 블로거는 이웃이 많다.) 대형 사이트의 게시판, 그리고 놀랍게도 현실에서 종종 발견되었다. 사견으로써, 현실에서 출몰하는 관종은 qt 중의 qt, The Emperor of qt, qt열사 등의 명칭을 붙여주고 그를 기리는 앞담, 뒷담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 sns나 인터넷상에서만 주먹을 부르는 이들은 그저 찌질이지만, 현실에서까지 진짜 주먹을 부르는 이는 용사라고 할 수 있다. qt의 용사.... 아무튼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겼다.

 악성댓글을 씀으로써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특성상, 나의 정체를 들킬 일이 거의 없는데다가, 네티즌들은 (현실에서 아닐지라도) 적어도 인터넷에서만큼은 불의를 보고 넘어가려하지 않는다. 간단한 방법으로 많은 어그로를 끄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악성댓글은 지금까지도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다만 창의성이 떨어진다. 악성댓글의 단어 선택이나 어휘 구사력은 다 거기서 거기 수준이기 때문에 점차 악성댓글은 쇠퇴하였다. 그 결과 요즘은 보통 네티즌들이 악성댓글을 보아도 '어그로 ㅉㅉ'하고서는 그냥 넘어가버린다.

 유명인을 공격하는 방법도 잘 먹힌다. 이 경우 초반에는 팬들이 달려들었다가, 이후에는 점차 세력이 커져서 아예 온 네티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내 생각에, 이 방법을 쓰는 관종들은 멍청한 인간들임에 자신을 갖는다. 유명인을 디스할 경우, 초반 팬들과 싸우다가 그 디스 수위를 높여나가는데, 이후 해당 유명인이 이를 알고 고소를 할 경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하는 일이 생긴다. 기사들을 보면 어떤 유명인이 선처를 했다, 그러는데 그걸 믿고 이 방법을 썼다가는 대를 이어서 망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누군가를 공격하는 방법 보다는,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방법이 흥하고 있다. 이는 특히 sns의 등장으로 발에 날개를 단듯이 퍼져나가고 있다. 응급실에서의 눈물셀카나 자신이 쓴 오그라드는 문구를 자랑스레 올리는 것은 매우 귀여운 수준이다. 그정도야 그냥 봐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관심을 받기 위해 일부러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간다거나, 다중의 계정을 만들어서 다중이 놀이를 하며 남들을 조롱한다던가 하는 소름끼치는 수준도 꽤 많다. 쓰고보니 이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하지만 난 관종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자신을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기아 수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 당장 굶어죽어가는 그들을 위해 따뜻한 욕설과 고소미를 먹여주자. 그러하면 그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는 농담이고 관종들이 계속 생겨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확실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이다. 어딘가 텅 비어 있는 공허함은, 어릴때부터 긴가민가한 애정을 받아온 이들에게서 보이는 흔한 특징이다. 관종들은 그 빈 공간을 남들의 관심으로 채운다. 자신이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많은 이들의 관심은 그들을 황홀하게 한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관심이 정말로 필요한 이들이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주저리.

 사진전 준비로 블로그에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이 사진전 마지막 날인데, 지금 내 몸상태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지 않으면 오늘 염색이나 하고 옷 수선이나 맡겨두어야지.

 지난 삼일간 몸 관리가 허술했다. 운동은 당연히 안했고 몇시간동안 몸에 술을 채우며 시간을 보냈다. 재밌고 즐겁기는 했는데 술자리 이후가 문제다. 머리는 아프고 몸은 늘어지고. 배는 왜 이렇게 고픈지 모르겠다. 배가 너무 고파서 술도 음식도 계속 들어간다. 절제하고는 있지만 이성이 풀리는 순간 내 입에서 카오스가 벌어질 것이다. 술과 음식의 광란의 파티는 고대 로마 제국의 그것을 연상시킬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 파티는 자연스레 돈지랄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이어폰을 새로 샀다. 전에 쓰던 것은 어디에 둔 것인지, 분명 집 안에 있을텐데 찾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찾으면 고이 보관해서 계속 들을 것이지만, 일단은 몇일동안 찾지 못했으므로 새 이어폰을 하나 샀다. 젠하이저의 보급형 이어폰을 샀는데, 역시 이름값을 하는 기기다. 음질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격에서도 이름값을 했다. 뭐 어쩌겠어, 이미 질러버린 걸...

 초밥을 먹고 싶다. 요 근래 회랑 초밥이 눈에 아른거린다. 얼마전부터는 짜장면도 이들과 합류하여 내 눈앞에서 나를 약올리듯이 떠오르고 있다. 사실 초밥은 얼마전에 먹었는데, 같이 먹은 친구가 초밥을 싫어하여 결국 장어초밥밖에 먹지 못했다. 친구야, 나는 초밥중에서 장어초밥을 제일 싫어해.... 물론 소심한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알바를 물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썩씨딩유 파더.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아버지.

 아 배고프다...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나치에 대한 단상들.
























 배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막 놓은 포스터들. 이 영화들은 모두 나치들과 관련한 영화들이다. 나치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그린 <몰락>에서부터, 나치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의 삶을 그린 <인생은 아름다워>나 <피아니스트>까지 그 분야는 다양하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는 나치가 아닌, 나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조명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감동적이고 서정적인 서사를 보여줌과 동시의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피해자이면서도 끝까지 삶을 영위하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들과, 그런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세 영화에서, 그들의 노력은 확실한 결실을 맺고 끝이 난다.

 반면 <몰락>과 <바스터즈>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몰락>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치의 몰락을 다룬 영화이고, <바스터즈>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재해석하여, 나치를 때려잡는 특공대를 그린 작품이다. 두 영화는 감동적이거나 서정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나치가 행한 폭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바스터즈>같은 경우레는 폭력을 때려잡는 폭력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나치는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 영화판의 양분이 된 것이다.

개화산, Somebody Loves You.




 십대 중반에 많이 듣던 노래.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그냥 갑자기 머릿속에서 노래가 툭 튀어나왔다. 잊고 있던 십대 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나보다.

난 페이스북을 안하는데 난감하다.

 다들 페이스북으로 소통을 많이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보니, 내가 소외된채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근데 내가 페이스북을 안하는 거니까, 소외된게 아니라 부러 소외를 당하도록 스스로 만든 것이군....

 하는 건 이 블로그 뿐인데 많은 지인들은 내가 블로그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참 편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것이라 예상하고 쓰는 글에는 자유로움이 덜하다. 보다 신중해지고 재미는 덜해진다. 하지만 혼자 쓰고 보는 공간에서는 나만 재밌으면 그만이니, 글의 진지함은 떨어지더라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어서 좋다. 내가 페이스북을 안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과한 개방성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암튼 난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다.

세상에 내가 동철짱이라니

 묵자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동철짱이라니....


 옥새를 받았습니다...

 내가 동철짱이라니.....

 14학번이 들어온다니 아 아스트랄한 기분이다 얏호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시네마 천국의 Love Theme.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시네마 천국. 몇번을 봤지만 아직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말 훌륭한 영화라서 뭐라고 글을 쓰기도 어려운 작품이다. 오늘은 노래를 많이 올리네...

 곡의 작곡가는 엔니오 모리코네.

Billy Joel, Just The Way You Are




 http://danced.co.kr/xe/index.php?mid=translation&search_keyword=billy&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1927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빌리 조엘 형님. 지금도 활동중이신데, 가창력이 여전하시다. 이 곡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존 아담스.

 전에 프로파간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후 나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군중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들을 통솔하는 방법이나, 민주주의의 잘못된 예시 등. 확실하게 느낀 것은, 사람은 여럿이 모였을 때 보다 거리낌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함익병 이라는 사람이 박정희의 독재를 긍정하면서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예로 든 적이 있다. 내가 누누히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 무식은 죄가 아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배우면 된다. 그러나 무식을 티내는 것은 죄가 된다. 그렇다. 함익병씨는 죄를 저질렀다. 플라톤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인가. 아무튼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했음은 사실이다. 다만 그 철인이라는 존재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어야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게 아니고, 최근 교양수업에서 존 아담스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이자 미국독립의 영웅. 그가 생각한 방식들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존 아담스는 군중의 폭력적인 심리를 가장 경계했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보스턴 차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많은 보스턴 시민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영국 무역상을 폭행했을때 아담스는 이성을 지키며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억울한 규제를 당했다고 해서 야만적인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상임을 느낀다. 사회가 분노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 이성을 지켜가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이다.

나는 멘토 현상이 불편하다.

 늘 살기가 점점 각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수입은 늘상 그대로이다. 사회계급이 크게 생산자들, 소비자들, 감시자들로 나뉘던 것이 이제는 방임자들이라는 계급이 추가되었다. 취직을 포기하고 속세를 등져 사는 사람들이나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러한 와중에 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재벌그룹을 위시한 부자들이야 당연한 것이고, 학원 강사들처럼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입에 풀칠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최근 추가된 고소득 직업이 있으니, 멘토 되시겠다. 사실 멘토란 것은 직업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지혜를 조금씩 알려주는 인생의 길라잡이 같은 존재였고, 댓가로 돈을 바란다거나 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멘토가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멘토는 이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니고, 책을 출판하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많은 돈을 번다. 수요가 점점 증가하면서 우후죽순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멘토라는 사기를 치려는 경향이 꿈틀댄다. 그러나 대중은 아직도 진실을 가려내지 못한채, 멘토에 목마르기만 하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나.

 기이한 멘토앓이 현상은 최근의 것이지만, 사실 멘토라는 존재는 오래전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짧게 본다면 지혜로운 어르신들부터 예수나 붓다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까지 멘토는 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며,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그들은 직업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해주고 감사를 받는 식이었다. 그들은 다른 직업이 있었다. 멘토는 쉽게 말해, 부업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멘토를 직업으로 삼아도 될 만큼 많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왜 사회는 멘토에 안달이 난걸까. 왜 내 앞길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일까. 이유는 당연하다. 앞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인생을 열심히 살아간다고는 하는데 도저히 인생의 앞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것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나 취업이다. 돈을 벌 능력은 있는데, 채용이 되지 않으니 날마다 어떻게 살아갈지 불안하고, 나같은 능력자를 채용하지 않는 사회가 밉고 야속하면서 억울하다. 나는 무엇때문에 열심히 살아온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이 경우 몇몇 사람들은 두가지의 부류로 나뉘게 된다. 자신이 좌절하는 원인을 사회탓으로 돌리는 사람들과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전자는 파쇼가 되어 찌질이의 극을 달릴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질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회의 거침없는 양발태클에도 부상을 딛고 일어서는 정말 대단한 부류이다.

 아무튼 사회는 인생의 앞길이 어두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앞길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인데,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의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걸어줄 사람을 찾는다. 또한 등불을 들고 나를 앞서 걸어가줄 존재를 깊이 갈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멘토를 원한다. 나의 길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존재. 지금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를 똑바로 잡아줄 존재.

 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지 마라.

 많은 사람들은 멘토가 인생의 만능키라고 착각하고 있다. 절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멘토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같이 손을 잡고 걸어주는 멘토와, 등불을 들고 앞을 밝혀주는 멘토이다. 전자는 그래도 괜찮은 멘토이다.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회노애락을 같이 겪어줄 멘토는 인생에 있어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 경우 멘토는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멘토가 인생의 끝까지 손을 잡고 걸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오산이다. 손을 잡고 도와주는 것은 멘토가 해줄 수 있지만, 걸음마를 떼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그리고 등불을 들고 앞을 밝혀주는 멘토. 최근에 성행하는 직업적 멘토의 부류이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겠다. 그럴때 홀연히 나타나 네가 힘든 이유는 무엇이고...그래서 이렇고...참고 걸어가렴...이라고 말한뒤 다시 홀연히 사라진다. 이 경우는 멘토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생의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등불은 들고 앞장서 걸어가는 존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은 일직선으로 된 일차선 도로가 아니다. 가끔 양갈래 길이 등장하고는 한다. 그럴때 등불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이 그 뒤를 걷는 것은 후회할 일이다. 그 길에 대한 선택의 책임을 멘토가 물어주지는 않는다. 그런 멘토는 그저 책 속이나 동영상 속에서, 당신의 물음에 늘 같은 대답을 할 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철학 때문이다. 최근들어 철학의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철학이 마치 인생에 대한 길라잡이로써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문학이 인생에 대한 힌트를 줄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증가한다. 그러나 인문학도 철학도 그런 학문이 아니다. 인생에 대한 배움은 인문학처럼 전문적인 배움이 있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다. 나는 학문을 배우는 것이지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그 학문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깊이 성찰하느냐에서 오는 것이지, 배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김난도나 강신주같은 멘토들이 계속 나오고는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두 사람은 탐탁치 않다. 김난도는 정말 말도 안되는 억지를 책으로 펴냈고, 강신주는 철학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도 없는 사람인데 철학자를 자처하고 다닌다. 화가 난다. 이 힘든 기회를 틈타 명예를 얻으려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많은 젊은이들을 어지러운 사회속으로 내던진 이들에게 화가 난다.

Lily Allen, Littlest Things




 굿 송.

 릴리 알렌을 접한 것이 중학교때였는데, 시간 참 빠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ak93&logNo=10169116131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요즈음 우후죽순 생겨나는 사업이

 치킨집과 상조업체인데,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게 될 경우 혹은 직장에 취직하지 못할 경우, 결국 지금 제일 잘 나가는 음식인 치킨을 팔아 돈을 버는 쪽으로 선회하고는 한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자살을 하게 된다. 혹은 사업이 힘들어 가족을 신경쓸 여유가 없어진다. 이것이 상조업체가 늘어나는 원인.

 어느 만화가 웃자고 말한건데, 웃어 넘길 수 있는 말은 아닌듯이 보인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Kanye West, Touch The Sky




 신나는 노래를 틀고 싶어서.

 http://danced.co.kr/xe/index.php?mid=translation&search_keyword=kanye&search_target=title&page=3&document_srl=5783

교환학생 입부 딜레마.

 학교가 교환학생을 받았다. 철학과에는 없는 듯 한데.... 다른 과들에 골라서 배치가 된 듯 하다. 그러나 결국 철학과로 온 학생은 없으니 마주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에콰도르 학생이 동아리에 가입 희망의사를 표명했다. 이것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학생을 받아줄 것이냐 말 것이냐.

 단순히 생각하면 안될거야 없다. 세계는 현재 국경이 무색한 월드와이드.. 상태이고, 에콰도르에서 교환학생이 왔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단은 재미가 있다. 외국인과 함께하는 이색적인 경험. 에콰도르의 문화는 어떠한지 묻고 따지며 한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글로벌한 동아리. 왜인지 격이 높아지는 느낌. 그러나 나는 결국 반대표를 던졌다.

 우선 찬성의견을 종합해보면
 1. 활동을 같이 하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다.
 2. 동아리에 대한 열정이 있어 보인다.
 3. 에콰도르 학생의 사교성이 좋으면 된다.
 4.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될 부분이다.

 인데, 일단 하나씩 말해보자면...

 
 활동을 하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조금 회의적이다. 그 학생은 시한부 동아리 활동을 한다. 1학기만 하고 모국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과연 그 1학기동안 얼마나 많은 영어를, 단 한명의 학생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뜩이나 지금 동기의 숫자는 열명이 넘고, 후배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더욱 많아질 것이다. 당연히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훨씬 많이 쓰일 것이다. 해외로 홈스테이를 나가서 많은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영어를 배우는 상황하고는 다르다. 여기서는 한국인이 다수고, 외국인은 단 한명이다. 그 한명이 많은 숫자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물론 외국인 한명이 다수의 학생을 가르치는 회화 수업 방식도 있다. 그러나 그곳은 전문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어를 목적으로 클래스를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아리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사진을 배우러 다니는 곳이다. 자연스레 영어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학기동안 영어를 얼마나 배우고 실력이 얼마나 늘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 학생은 동아리에 대한 열정이 있어 보인다. 몇번이나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꼭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진심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다른 동아리를 들어간다고 했을때, 그 동아리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운 앞날을 상상하면서 가입원서를 쓸 것이다. 어느 동아리던지 힘들어 보이는 티를 내는 동아리는 없고, 가입하는 새내기 또한 동아리의 힘든 활동을 깊이 고려해보면서 들어가지는 않는다. 딱 보기에 재밌고, 즐겁고, 흥미로워 보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야 누구든지 당연히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보면 생각과는 좀 다르다. 누군가가 이런 부분이 힘들다고 귀뜸해줬던 것과도 다르다. 그러면 점점 동아리에 대한 열정이 줄어들고, 자연 나가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 학생은 더하다. 한국 문화에 대해 철저히 연습해 온 한국인들도 힘들어하는 상황이 종종 일어나고는 하는데, 가치관이 전혀 다른 외국인이 이를 견딜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교환학생의 사교성이 좋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사교성이 좋으면 된다. 근데, 안좋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학생이 사교성이 좋다고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데. 좋은지 안좋은지 모르는 상황에서 막연히, 사교성이 좋을거야, 좋으면 만사형통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이다. 또한 만일 교환학생이 사교성이 좋다고 한들, 그 학생과 함께 활동할 다른 후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생 뿐만이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사교성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 잘 어울릴 수 있을 테니까.  만일 후배들이 어떤 사소한 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오해가 생기게 된다면, 일단 언어가 다르므로 말로써 오해를 풀기가 힘들 것이고, 자연스레 오해는 점점 자라나게 될 것이다. 또한, 아예 '쟤는 외국인이니까'라는 사고를 가지게 될 것도 우려스럽다. 같은 동아리의 같은 부원인데, 특별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무시를 한다면 그것은 같은 부원으로써의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끼리 와해되기 딱 좋은 케이스이다.

 마지막으로 교환 학생에게 신경을 쓰면 된다는 부분은, 다른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 너무 확실해보인다. 만일 그 학생을 따로 지도한다면 다른 후배들은 그로 인해 이질감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도 있다. 동아리 특성상,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는데, 으레 술자리하면 분위기가 고조되기 마련이다. 분위기가 고조될 수록 사람은 감정적이 되고, 미처 타인을 신경쓸 겨를이 없어진다. 이 상황에서 누가 교환학생을 챙겨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말이 안통하니 분위기에 섞이지도 못할 것이고, 어색한 웃음만을 짓다가 집으로 갈 것이 눈에 선하다... 술자리의 분위기도 깨질까 우려된다.

 이건 정말 깊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우리만 좋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CB Mass, Shout Out Remix




 다이나믹 듀오의 전신인 cb mass의 3집 마지막 트랙. 커빈이 남긴 마지막 유산....

 이라고 쓰면 커빈이 굉장히 선자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 인간이 돈을 들고 튀는 바람에 당대 최고의 힙합 트리오 그룹이었던 cb mass는 해체를 하게 된다. 커빈은 해외로 튀었고..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른다.
 결국 빈털터리로 남겨진 개코와 최자는 다이나믹 듀오를 결성하고, cb mass와 같은 레이블이던 에픽하이와 TBNY는 일년을 더 기다려서야 고대하던 첫 앨범을 내게 된다. 다들 실력있는 양반들이라 망하지 않고 성공해서, 지금은 꽤나 유명해졌다.

 cb mass의 동네 한바퀴라는 곡의 뮤비를 보면 한참 옛날의 에픽하이와 TBNY가 나온다. 근데 TBNY는 몇년전에 해체했으니...

언니네 이발관, 산들산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건 어디에도 없었지
 하지만 잊을 수 없는게 어딘가 남아있을 거야

 인디씬 역대 최고의 앨범으로 꼽히는 언니네 이발관 5집의 마지막 트랙이자 5집 앨범 중 최고의 노래.

간첩조작사건이라니 ^오^

 국정원의 간첩조작이라니 ^오^

 정말 다이나믹한 대한민국 ^오^

 기껏 증거물로 제시한 공문서가 가짜였다는게 들통나다니 ^오^

프로파간다에 대한 글이 밀리고 있다.

 등교길 지하철 안에서 읽으려고 매번 다짐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하다보면 까먹고 챙기질 못했다. 밤에 읽어야지, 라고 다짐하면 늘 사진작업이나 기타 등등의 유흥으로 인해 집에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다짐을 하질 말아야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말이야.

 얼마전 인터넷으로 어느 정치성향 자가진단을 해봤다. 내가 아나키스트라니. 가끔 나라의 총통이 되는 꿈을 꾸는 내가 아나키스트라니. 이 설문조사는 잘못되었다.

2014년 3월 9일 일요일

Bill Withers, Just The Two Of Us




 언제들어도 좋은 명곡.

 가사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mss2176&logNo=10159292260

프로파간다 pt.1

 프로파간다가 없는 세상은 어떠할까? 대중속에서 선전이란 의미는 어느새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다. 본디 교황청의 종교적 운동의 일환으로써 쓰여진 선전은, 이제는 그 순수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그들의 국민들을 전선으로 내몰기 위해 프로파간다를 도입한 이후로, 대중은 프로파간다는 물론이요 선동과 같은 운동에 대해서도 눈살을 찌뿌린다. 선전은 왠지 정치적인 속임수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전은 실제로 속임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선전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이제 절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가지의 선택권을 부여받는다. 지금 어디로 갈지,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등등의 고민은 늘 따라온다. 우리는 많은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렇기에 프로파간다가 필요하다.

  언뜻 보기에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정부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나쁜 의도로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수많은 정보들과 상품들의 바다에서 혼란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를 조종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선전이 없다면 어떨까. 매일 다른 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매일 다른 정보가 흘러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중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수만가지나 되는 선택의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효율적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 모든 선택지들을 일일히 살펴보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지들을 다 살펴보고 있노라면, 또다른 선택지들이 쏟아져 나온다. '브랜드 뉴'이다. 이런 작업이 반복되다보면, 생산성은 줄어들고 경제나 사회가 망가지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정부는 선전을 도입했다. 어떤 특정 선택지들을 더 많이, 더 자주 선전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대중의 생각을 조종하여 선택의 폭을 좁히고, 효율성을 증가시켰다. 덕분에 사회는 큰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통제의 방식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허나 선전을 통한 통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Jason Mraz, Love For A Child




 제이슨 므라즈 노래중 두번째로 좋아하는 노래. I'm Yours는 너무 달달해서 싫다. Lucky도 좀 그래.

2014년 3월 8일 토요일

Breakbot, Baby I'm Yours




 브루노 마스가 이 곡을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는데, 지금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르겠네.

맹신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맹신. 무언가에 홀린듯이 그것만을 바라보며, 그것만의 존재를 믿으며, 그것만을 말하고 다니는 행위는 정말 시간이 아까운 일이다. 맹신은 종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사이에서나 정치에서나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어떤 정치인을 맹신하는 집단을 보고 '종교같다'라고 하지만 사실 맹신이라는 게 종교만의 특성인 것은 아니므로, 종교가 그런 말을 들으면 서운할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으로는 역시나 종교가 있다. 종교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고, 그 나무의 곁다리로 창조론이나 동성애 금지등이 자라난다. 신자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라고 물으면 일정 수준의 대답을 해준다. 다시 근거를 들어 그 말에 반박을 하면 그 이후부터 맹신 모드로 변한다. 아뇨, 그건 틀렸습니다. 왜죠? 이게 틀렸어요. 그건 이것입니다. 그것도 틀렸어요. 어디가요? 틀렸다구요. 의 반복.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지각하는 것이 앎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아마 소크라테스는 맹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었을 것이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종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도 있다. 보수라고 우기는 꼴통들과 진보를 표방하는 맹신세력이 있다. 전자는 뭐 말하면 입아픈 부류이니 넘어가고, 후자는 할 말이 많다. MB시절 나꼼수가 크게 유행했었다. 나도 꽤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 방송이 흥하면 흥할수록 어째 맹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누군가가 이에 대하여 비판을 하면, 그 사람은 곧 무더기의 비난세례를 받고는 했다. 사실 나꼼수는 틀린적이 생각보다 많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기획이었으나, 그 수준을 넘어서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경우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본인들을 깨어있다고 말하는 몇몇 깨어있지 못한 시민들이 잘못된 루머를 양산해내었고, 보기 좋게 여권의 먹잇감이 되었다. 셀프디스리스펙트.
친노세력도 이와 비슷한데, 솔직히 말해서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겨엦가 나빠진건 사실이다. 그리고 대기업은 강해졌고,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막지 못했다. 국민들은 이에 크게 실망했다. 기대치가 컸으니까. 이건 사실인데 이를 자꾸 부정하면, 결국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밖에는 안된다.

 무언가에 맹신하지 말자. 확신과 맹신은 다르다. 제발 좀 깨어나라 제발.


자움 콜렛 세라, 논스톱.




 이 영화는 총 3단계로 설명된다. 1. 빠르게 넘어가는 시퀀스로 속도감있는 초반. 2. 본격적인 액션과 함께 긴장이 더해지는 중반. 3. 영화를 갈아엎어버려도 시원찮을 마무리.

 의문점이 많이 남는 영화다. 아니, 승객을 어떻게 죽인 것일까? 화장실에 분명히 아무도 안들어갔다고 나온다. 들어갔던 이는 어느 할머니와, 제이미 밖에 없는데, 이 둘은 (스포) 범인이 아니다. 화장실 대목은 그저 제이미의 과거를 밝히기위한 도구로 쓰여진다. 결국 범인을 찾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범인은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승객을 죽였네? ^오^

 그리고 기껏 이리저리 뛰면서 범인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힘들게 뛰면서도 결국 못찾는듯 하다가, 막판에 전화 한통 받고 승객 휴대폰 빼앗아서 손쉽게 범인을 찾아낸다. 맥이 탁 풀린다. 그럼 진작에 동영상을 보던가. 대놓고 자신을 찍어댔는데도 그걸 몰랐나.

 액션 좋아하는 사람이면 봐도 좋은데, 왠만하면 보지 말아라.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영화다. 너무 전형적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하기야 나는 영화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가서 본거였지만. 영화는 별로였어도 같이 본 사람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근데 진짜 보지마라. 솔로라면 허무해질 것이고, 커플이라면 누가 영화를 추천했느냐며 싸울 것이다.

10cm, 그게 아니고.




 좋은 가사와 좋은 멜로디. 밤에 들으면 괜스레 감정이 북받혀오는 노래.

 그리고 김동률이 보일러를 놓아주고 싶다고 한 그 노래....

블로그가 다시 열렸다.

 구글이 나의 블로그를 스팸으로 간주하여 차단했었다. ^오^

 에릭 슈미트야 잘 보고 있니?? 홧김에 네이버로 갈아타려던 것을 차분하게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말렸다. 네이버는 곧잘 털리기도 하고... 신용을 빼갈거야... 참자....

 암튼 블로그를 되찾았다. 바닷가를 떠다니다가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의 심정이다.

자본주의 발달과 중국의 몰락.

 현 중국은 세계 경제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거대한 시장국가이다. 몇 십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그늘 아래서 허덕이며 힘들어하던 그들의 모습은 어느새 높은 빌딩과 많은 숫자들로 뒤바뀌어 있다. 물론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예전과 비교해 봤을때 지금 중국은 굉장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 굉장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발전이란 것은 시장의 발전일 뿐, 중국은 오히려 몰락을 하는 중이다.

 몇백년전의 중국을 생각해보자.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도시와, 수많은 영웅담에서 알 수 있는 영웅들, 지혜를 전파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학자들. 중국은 경제면에서나 예술면에서나 그리고 학식면에서나 최고의 국가였다. 그러한 중국이 서서히 서양 세력의 군화 아래 짓밟히면서 그 화려한 문화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은 자신을 짓밟았던 서양 문화를 답습하여 자본주의의 거대한 탑을 쌓고 있다. 고전적인 중국의 웅장함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가 발달될수록, 옛날 중국의 예의범절이나, 도, 성인과 같은 단어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우리는 종종 중국에서 칼부림이 일어난다거나, 나무젓가락으로 가짜 버섯을 만든다거나, 의자가 폭발하고 짝퉁이 난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이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선진국화 되기 이전에 겪는 통과의례같은 것이다. 대한민국도 중국만큼이나 짝퉁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튼, 지금 중국은 돈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다. 굳이 돈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피폐해진 자본주의의 그림자에서 도덕이나 윤리같은 것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중국은 몰락하는 중이다. 중국뿐만이 아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가 발전 되어 기본적인 인간생활을 할 수 있어야 윤리나 도덕을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서 무조건 인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예시로 중국을 들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높은 경제 수준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후진국처럼 지나가는 배를 잡고 인질극을 벌이는 해적같은 범죄는 없을지라도, 선진국 역시 강도가 넘쳐나고, 살인이 종종 일어나며, 사기는 두말하면 입아픈 일이 되었다. 모두 돈의 마력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성의 몰락을 가져왔다. 인심이나 덕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인간성의 재고 없이 국민 소득을 억지로라도 끌어올리려는 경제 정책은 옳지 못하다. 그리고 그런 정책은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근 10년이 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때는 정말로 도덕적인 사회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찼던 국민들이, 이제는 먹고 살기위해 무슨 짓이든 나서는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자격은 점점 낮아지고, 인류는 점차 몰락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서는 인간성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진짜 사람다움은 돈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진짜 인간을 전파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깨달음 전파 작업은 이미 자본주의 시장의 승자가 된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갈망하던 것을 손에 넣은 후에, 거대한 허무함이 밀려온 것이다. 돈을 벌었다. 그래서 뭐? 돈을 벌기 위해 그동안의 힘든 마라톤을 뛰어온 것인가? 그러나 고개를 들어보니, 돈은 거쳐가는 과정일 뿐, 돈 너머에 더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돈 너머의 세상을 본 사람들은 다시 인간성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고 있다. 나는 아직 돈의 노예인지라, 그들처럼 활발히 좋은 활동을 하지는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평생가도 돈에 속박되어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무소유는 소유하기 가장 힘든 것이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2014년 3월 5일 수요일

매트릭스와 진짜 세계.

 이제는 남매가 된 워쇼스키가의 두 사람의 인생작, 매트릭스. 안타깝게도 이 둘은 매트릭스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매트릭스가 워낙 역대급 작품인지라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모양새이다. 또한 키아누 리브스의 인생작이기도 한데, 뭐 키아누는 이후에도 좋은 작품을 찍었으니... 콘스탄틴이라던가 콘스탄틴이라던가...

 매트릭스의 전개는 초반부터 당혹스럽게 한다. 평범하게 인생을 살아가던 네오가 집에 도아와 컴퓨터를 켜는데, 갑지기  화면에 누군가로부터의 메시지가 뜬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네오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데, 그가 진짜 현실세계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장자의 유명한 말 중에는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로인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이면의 내가 꿈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간혹가다 기억하는 꿈들이 진짜 세곅 아닐까. 혹은 지금 이 순간이나 꿈도 아닌 제 3의 세계에 진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모양의 박제같은 것도 아닌, 뇌의 모양으로서만 말이다.

 현실을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설마 엔트로피? 설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질량이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있던 것일까? 이 질량을 넘어가거나, 기준에 못 미치게 되면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던지, 다른 세계로 가게 되는 것일까. 혹시 진짜 세계는 4차원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닐까.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지만 실제의 나는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가상의 세계 혹은 나의 환상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굳게 믿으면서 소통하는 모든 것들이 나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참 허무하다. 일생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과 만나온 사람들이 나의 꿈이었다니. 어쩌면 어떤 미치광이는 이를 깨닫고 미친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잠깐, 내가 인식하는 그 미치광이 역시 나의 환상 속 존재 아닌가. 현실에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들과 그 질량들이 나의 현실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질량들마저 내가 꿈꾸는 것이라면, 나는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꿈을 꾸는 것이다.

 가짜 세계에서 산다고 해서 나쁠건 또 뭐가 있을까. 네오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진짜 세계로 넘어갔다. 물론 그쪽에서는 기계들이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어쩌면 아일랜드처럼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기 위해 가상 세게를 만들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가짜 세계에서 산다고 해서 나쁠게 있을까? 진짜 세계에는 내가 상상해보지도 못한 엄청난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니, 그걸 알지 못하여 억울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리얼월드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애당초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실에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내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짜를 욕망하는 것일까. 신은 환상속 그대인가, 리얼월드에 사는 진짜 인간인가. 항상 나는 글의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끝난다.

2014년 3월 3일 월요일

Muse, Starlight




 오늘 같은 날 듣고 싶은 노래. 아름다운 락의 진수.

 http://textforest.tistory.com/77 는 가사.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나쁜 일이 너무 많다.

 살다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있다.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은 기본이고,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챙피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알바를 하다가 진상 손님을 만나기도 하고, A는 기본으로 나올 것이라 철석같이 밑었던 과목에서 B가 나오기도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믿었던 친구가 바로 그 사람의 연인이다. 주식으로 돈을 날린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우스워 보일 것이다. 우습다 못해 허무해 보여서는, 차가운 물속으로 육신을 던지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나쁜 일이 너무나 많다.

 물론 좋은 일도 많다. 그러나 좋은 일들은 금방 머리 속에서 증발해버리고는 한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사 새옹지마. 좋은 일은 불행을 달고 따라온다. 희소식에 기뻐하는 동안에 이미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시퍼런 칼날이 박혀 들어온다. 불행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을 때이다.

 살아가는 것은 좀체 쉬운 법이 없다. 무언가 목적을 하나를 달성하려고 하면 곧장 내 앞으로 장애물이 버티고 선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손을 뻗어보지만, 좋은 음식은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만 입에 넣을 수 있다. 좋은 곳으로 떠나고 싶지만, 금전이 부족하다. 그럼 이 모든 불행은 돈 때문인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막상 그것을 하려고 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정말 해도 되는 것일까? 혹시 큰 리스크가 나에게 닥치지는 않을까? 쉽게 발을 뻗어 들어가지 못한다.

 왜 겁을 지레 먹는가? 하면 간단하다. 세상이 무섭기 때문이다. 가진 것은 없는데다가 잊을만하면 다시 뒤통수를 치는 세상은 참 무섭다. 술술 잘 풀리는 일들 앞에 쥐도 새도 모르게 덫을 놓아버리는 세상은 약삭빠르기도 하다. 그래서 얄밉다. 그리고 겁이 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쁜 일들에 겁을 먹고 얌전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말리지 않는다. 얌전히 살아가는 사람은 확실히,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한 인생을 살기 쉽다. 대신, 실패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평생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나는 저놈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난 이꼴인가? 하는 물음이 계속 가슴속에서 피어날 것이고, 결국에는 열등감을 주체 못하여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얌전히 산다는 것이 열심히 살았다는 걸 의미하지 않음을, 평생 모를 것이다.

 나쁜 일들에 충분히 겁을 먹을 수 있다. 요는 겁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느냐이다.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을 확실하게 신뢰할 때에 온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이 길이 나와 맞는 길인지 확신을 가졌을 때 발을 내딛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2014년 3월 2일 일요일

N.E.R.D., You Know What




 퍼렐 윌리엄스가 소속된 그룹 N.E.R.D.의 대표곡. 얼마전에 축구 사이트에서 뒤적거리다가 어느 유저분이 올려주셔서 접하게 된 노래. 근데 노래가 겁나 좋다. 엄청 좋다.

 다만 가사는 19금 주의.
 http://danced.co.kr/xe/index.php?mid=translation&sort_index=readed_count&order_type=asc&page=9&document_srl=4256

 이 개인 사이트의 주인장분은 참 가사를 많이도 번역해놓으셨다. 나에겐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 쌀람해요.

2014년 3월 1일 토요일

안철수-민주당 신당 창당 합의.




 껄껄 진짜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방선거도 안나가보고 합치다니.... 안철수를 바라보던 지지층의 멘탈이 와장창....

 이렇게 된 이상
 1. 민주당이 안철수를 차기 대선 후보로 밀어주면서 친노 이미지를 벗는다.
 2. 되도않는... 중도 외길로 이러지로 저러지도 못하던 안철수가 확실한 기반을 다진다.

 혹은 민주당이 안철수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또 호구짓을 하고 안철수의 지지층들이 전부 여당쪽으로 몰려가서 으앙 주금ㅠ 이거나.

 후자가 더 가능성 있어보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거야.....

내가 자주 들어가는 사이트라지만

 가끔은 정말 답이 없을 때가 있다. 하기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이니 별별 사람이 다 있겠지만, 어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가 양비론으로 범벅된 것 같다. 내 편 아니라고? 그럼 넌 쓰레기야! 이런 식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참고로 대형 종합 커뮤니티 이야기. 축구 사이트 아님.

Justice, D.A.N.C.E.




 내가 EDM을 접하게 해준 음악. 들을 수록 신나는 노래. 씐난다!!!!!

예술작품은 대중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가?

 설거지하다 드는 소모적 생각.

 누군가는 어떤 예술을 보고 감탄한다. 정말 멋진 작품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에 깊이 잠긴다. 다른 사람은 같은 예술을 보고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게 무슨 예술이야? 나도 그릴 수 있겠어. 예술을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도화지에 붓자국 하나 남겨놓은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예술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게대체 왜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느 때에 예술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가?

 평론가들은 예술 작품을 보고서 가치를 매긴다. 그리고 가치를 매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기법이 참으로 훌륭하다. 일반인들은 같은 그림을 보고서도 왜 그러한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저 평론가들이 입을 맞추고 제멋대로 해석한 것 같다. 왜 국어책에 실린 해석도 그러하지 않은가. 작가가 어떤 글을 써놓으면, 평론가들이 제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식이다. 작가는 그러한 의도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보고서 와, 정말 훌륭하다, 하고 감탄할 수 있는 작품은 어느것일까? 아마도 잘 그린 풍경화나 인물화, 소묘화 정도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이 현실과 비슷할 수록 잘 그렸다고 인정할 것이다. 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괴한 작품을 그렸을때도, 어느정도는 수긍하며 인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작품들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대중은 인정할 수 있는 예술작의 범위가 좁다. 다시 말하면, 독특하거나 새로운 작품들을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티비로 표현한 현대시대나 같은 사람의 얼굴을 두고 여러가지 색들로 달리 표현한 팝아트 같은 작품들은, 그림을 낯설어하는 대중들에게는 인정받기가 힘들다.

 평론가들은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 같고, 대중들은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의 범위가 좁다. 그렇다면 마스터피스는 과연 어떻게 인정받게 되는 것일까?

 예술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예술을 자신만이 소유하고 싶어 한다. 예술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팝송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중에게 유명하지 않은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깊은 조예를 가진 듯한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그러나 그 가수가 빅히트를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 자신은 그 가수를 오래전부터 알아 왔다고 위로를 하며 가수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남들과는 급이 다른 사람임을 밝히려고 한다. 눈물겨운 노력이지만, 진짜 좋은 음악이라면 세상에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정말 좋은 작품이라면 세상에 널리 유명해지기 마련이다. 책에 실리고, 사진으로 찍혀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야 맞는 것인가? 널리 알려진 것이 예술인가? 음....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소수만이 인정하며 특권처럼 갖고 있는 예술은, 예술이라기 보다는 친목활동이 맞는 것 같다.

중국을 뛰어넘는 백중국의 위엄.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2/28/0606000000AKR20140228047800009.HTML


 러시아가 결국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 칩입했다. 이를 틈타서 크림 반도에 있는 친러세력들은 무력 시위를 하고 있는 중. 후르시쵸프 형, 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만 알고있으나, 이는 우크라이나 내의 서부와 동부의 오랜 갈등과,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 인한 사건. 우크라이나의 동부 지역은 우크라이나 경제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알짜배기 땅인데, 이 동부 지역은 과거부터 친러시아인들과 타타르인들이 살던 땅이었다. 다시말해, 동부는 친러시아 성향.

 1. 과거 소련시절, 우크라이나 출신 서기장 후르시쵸프가 소련내에서의 자국의 힘을 길러주기 위해 소련내에서도 알짜배기인 드네프르 강 동쪽과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할양해 주었는데...이것이 지금 이 사태의 원인이 될 줄이야. 후르시쵸프는 설마하니 소련이 붕괴되리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붕괴했고, 각 독립국들은 이전에 그어진 국경대로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2. 그런데 크림 반도와 드네프르 강 동쪽이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들어가 버렸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의 붕괴로 정신이 없던 상황인지라 미처 반환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뭐 러시아가 반환한다고 해서 그냥 넘겨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이미 1930년대 부터 크림반도를 제외한 동남부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땅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무력으로 점거한 행위가 잘못된 것처럼, 오래전부터 타국의 땅이었으니 무턱대고 반환해달라 요구하기도 뭣하고....

 3. 암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후 친러파인 동부 지역은 독립을 원했고, 경제가 집약된 땅을 잃을 수 없던 우크라이나는 동부 지역에 자치권을 주게 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에 동부출신의 대통령이 취임하게 된다. 국민들을 탄압하면서 반민주적 행보를 걸었으나 경제를 상당히 발전시켜 놓았고, 독재자는 아니었던터라 임기를 채우고 내려왔다. 이후 우크라이나에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나고,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면서 서부 출신의 유시첸코, 티모센코가 정권을 잡는다.

 4. 그리고 경제 개막장을 달리게 된다. 정치도 잘 못했다. ^오^ 그러나 서부 출신답게 친서방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EU와 나토 가입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제 막장인 서부는 당연히 이를 반가워 했으나 동부는 못마땅해 했고....

 5. 때마침 조지아가 미국의 훈수로 러시아에 선빵을 날렸으나, 정작 미국은 도와주지도 않았다. 결국 조지아는 러시아에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탈탈 털렸다. 그리고 과거 소련에 포함되어 있던 독립국들은 크고 아름다운 러시아의 힘을 본 후, 친서방에서 친러로 성향을 바꾸게 된다.

 6. 우크라이나도 친러로 성향을 바꾸어, 동부 출신의 대통령 아뉴코비치 대통령이 집권. 이를 본 러시아는 경제가 나빠 허덕이는 우크라이나에 돈을 지원해주기로 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채권 130억달러를 빚진 상황. 그러니 러시아가 이 빚을 탕감해주거나 줄여주거나 늦게 갚아도 된다고 하니, 우크라이나로써는 덥썩 물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거래에는 조건이 있었으니, 바로 EU와 나토 가입 포기.

 7. 결국 우크라이나는 가입을 포기한다. 그러자 서부지역 대폭발. 제 2차 오렌지 혁명이 일어난다. 반러파 세력은 전부 모여 무력시위를 감행하고, 대통령은 그들을 향해 참참못을 시전, 발포 명령을 내린다.

 8. 그러나 결국 반정부군 승리. 하지만 러시아는 반정부군이 성립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원도 끊은 상태. 지금 동부에서는 독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서부에서는 이를 절대 인정해주지 않을 모양새이지만, 막을 방도가 없는 상황. 무력으로 막으려는 순간 러시아가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9 .그리고 미국과 EU는 개입할 명분이 없으니 손가락이나 빠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