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는 영혼이 회귀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육체는 점차 자연의 일부로써 돌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를 '부패'라고 부른다. 육체는 점차 살아 생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알아보기 힘든 모양새로 바뀐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인간이 살아 생전에 가지고 있던 타인과의 소통과 기억, 인품과 같은 퍼스널 아이덴티티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죽은 이의 육체는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육체는 확실하게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기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육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죽은 기억과 지식의 찌꺼기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뇌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에서, 고대 철학자들은 이를 보고 영혼이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라진 영혼은 죽지않고 살아서, 마지막 숨과 함께 날아가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이 날아간 곳은 어디일까?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를 비롯한 (그 기록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고대 그리스의 책들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이 죽으면 하데스, 즉 지하 저승세계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은 하데스로 내려간 후 일정한 루트를 따라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가 있는 궁전으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혼들은 다섯 가지의 강을 건너게 된다. 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레테 그리고 스틱스가 그 다섯개의 강들이다. 영혼들은 이 강을 건너면서 비통과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 영혼이 정화되기도 하며, 모든 기억을 잊기도 한다. 하데스의 궁전에 당도한 영혼들은 심판을 받고 각자 가야할 곳이 정해진다. 낙원 엘리시온에 가는 자와 지옥 타르타로스에 가는 자가 있는 반면에, 다시 환생하는 자들도 있다. 환생하는 자들은 엘리시온에 갈지 타르타로스에 갈지 판단하기가 애매한 자들로써, 그저 그렇게 평범히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엘리시온에 가게 되면 이름으로만 듣던 영웅들이 살고 있다. 아무튼, 환생한 사람들은 각각 인간이나 다른 종류의 동물로 태어나 다시 인생을 산 후에 또 심판을 받게 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혼의 회귀 개념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온 뒤, 다른 동물에게로 옮겨간다고 주장하였다. 하데스의 심판따위는 개입하지 않는다. 영혼은 다른 생명체로써 태어나게 된다. 만일 내가 인간으로써 죽고, 그 영혼이 다른 종류의 개나 돼지같은 동물에게로 옮겨가 새로 태어났을 경우, 나는 다시금 인간의 몸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정한 순서로 배치된 동식물을 거쳐 인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으로 복귀할 수 없다. 정해진 순서가 지나야한다. 이 경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세계의 생명의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죽어서 개가 되고, 개는 죽어서 돼지가 되고, 돼지는 새가, 새는 식물이, 식물은 인간이 된다. 모든 영혼들이 육체를 옮겨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생명은 바로 이전에 죽은 누군가의 영혼인 셈이다. 고로 생명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 내 앞에 있는 개가 이전에 죽은 내 친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라고 해도 그 개는 언젠가 인간이었던 존재였으므로 모든 동물들이 나와 같은 부류(?)인 셈이 된다. 그러므로 동물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깊게 생각해보면 피타고라스가 운명론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들의 영혼이 다른 종류의 생명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들이 같은 시간에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총량이 변하지 않을 뿐더러, 떠도는 잉여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 내가 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쳐보았자,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결국 어떻게든 정해진 날에 죽게 된다. 나의 자유의지는 반영 되지 않는다.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주장한 영혼의 회귀이다.
피타고라스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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