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살기가 점점 각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수입은 늘상 그대로이다. 사회계급이 크게 생산자들, 소비자들, 감시자들로 나뉘던 것이 이제는 방임자들이라는 계급이 추가되었다. 취직을 포기하고 속세를 등져 사는 사람들이나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러한 와중에 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재벌그룹을 위시한 부자들이야 당연한 것이고, 학원 강사들처럼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입에 풀칠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최근 추가된 고소득 직업이 있으니, 멘토 되시겠다. 사실 멘토란 것은 직업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지혜를 조금씩 알려주는 인생의 길라잡이 같은 존재였고, 댓가로 돈을 바란다거나 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멘토가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멘토는 이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러 다니고, 책을 출판하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많은 돈을 번다. 수요가 점점 증가하면서 우후죽순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멘토라는 사기를 치려는 경향이 꿈틀댄다. 그러나 대중은 아직도 진실을 가려내지 못한채, 멘토에 목마르기만 하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나.
기이한 멘토앓이 현상은 최근의 것이지만, 사실 멘토라는 존재는 오래전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짧게 본다면 지혜로운 어르신들부터 예수나 붓다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까지 멘토는 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며,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그들은 직업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해주고 감사를 받는 식이었다. 그들은 다른 직업이 있었다. 멘토는 쉽게 말해, 부업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멘토를 직업으로 삼아도 될 만큼 많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왜 사회는 멘토에 안달이 난걸까. 왜 내 앞길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일까. 이유는 당연하다. 앞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인생을 열심히 살아간다고는 하는데 도저히 인생의 앞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것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나 취업이다. 돈을 벌 능력은 있는데, 채용이 되지 않으니 날마다 어떻게 살아갈지 불안하고, 나같은 능력자를 채용하지 않는 사회가 밉고 야속하면서 억울하다. 나는 무엇때문에 열심히 살아온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이 경우 몇몇 사람들은 두가지의 부류로 나뉘게 된다. 자신이 좌절하는 원인을 사회탓으로 돌리는 사람들과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전자는 파쇼가 되어 찌질이의 극을 달릴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질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회의 거침없는 양발태클에도 부상을 딛고 일어서는 정말 대단한 부류이다.
아무튼 사회는 인생의 앞길이 어두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앞길이 어두워 보이는 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인데,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의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걸어줄 사람을 찾는다. 또한 등불을 들고 나를 앞서 걸어가줄 존재를 깊이 갈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멘토를 원한다. 나의 길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존재. 지금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를 똑바로 잡아줄 존재.
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지 마라.
많은 사람들은 멘토가 인생의 만능키라고 착각하고 있다. 절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멘토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같이 손을 잡고 걸어주는 멘토와, 등불을 들고 앞을 밝혀주는 멘토이다. 전자는 그래도 괜찮은 멘토이다.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회노애락을 같이 겪어줄 멘토는 인생에 있어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 경우 멘토는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멘토가 인생의 끝까지 손을 잡고 걸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오산이다. 손을 잡고 도와주는 것은 멘토가 해줄 수 있지만, 걸음마를 떼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그리고 등불을 들고 앞을 밝혀주는 멘토. 최근에 성행하는 직업적 멘토의 부류이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겠다. 그럴때 홀연히 나타나 네가 힘든 이유는 무엇이고...그래서 이렇고...참고 걸어가렴...이라고 말한뒤 다시 홀연히 사라진다. 이 경우는 멘토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생의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등불은 들고 앞장서 걸어가는 존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은 일직선으로 된 일차선 도로가 아니다. 가끔 양갈래 길이 등장하고는 한다. 그럴때 등불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이 그 뒤를 걷는 것은 후회할 일이다. 그 길에 대한 선택의 책임을 멘토가 물어주지는 않는다. 그런 멘토는 그저 책 속이나 동영상 속에서, 당신의 물음에 늘 같은 대답을 할 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철학 때문이다. 최근들어 철학의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철학이 마치 인생에 대한 길라잡이로써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문학이 인생에 대한 힌트를 줄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증가한다. 그러나 인문학도 철학도 그런 학문이 아니다. 인생에 대한 배움은 인문학처럼 전문적인 배움이 있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다. 나는 학문을 배우는 것이지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그 학문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깊이 성찰하느냐에서 오는 것이지, 배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김난도나 강신주같은 멘토들이 계속 나오고는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두 사람은 탐탁치 않다. 김난도는 정말 말도 안되는 억지를 책으로 펴냈고, 강신주는 철학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도 없는 사람인데 철학자를 자처하고 다닌다. 화가 난다. 이 힘든 기회를 틈타 명예를 얻으려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많은 젊은이들을 어지러운 사회속으로 내던진 이들에게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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