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일 일요일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원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적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틀즈가 생각나면서 오노 요코가 생각도 나고 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베스트 셀러는 국내에서만 몇 종류로 출판되어 있다. 내가 본 것만으로도 세 개의 출판사가 각각 다른 번역가의 능력을 빌어 각각 다른 번역의 책을 내놨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문학사상사의 푸른색 표지를 입은 <상실의 시대>이고, 민음사가 내놓은 <노르웨이의 숲>도 많이 읽혔다. 이외에도 <노르웨이의 숲 1,2권>으로 출판한 출판사도 있었다. 나는 문학사상사와 민음사의 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이미 소유하고 있는 문학사상사의 책을 골라 읽었다.

 <상실의 시대>는 섬세한 글로 쓰여져 있다. 묘사가 뛰어나면서 비유가 좋다. 때문에 나는 책의 줄거리보다도 그 표현력에 집중하면서 읽었다. 이 좋은 표현력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심리를 잘 표현해준다. 특히나 와타나베가 느끼는 공허한 감정이 마치 나로 하여금 그것을 추억속에서 끄집어 내듯, 공허함을 공유하게 하는데, 때문에 책을 읽다가 그 공허함에 어이가 없어서 책을 덮고 가만히 몇 십분을 앉아 있기도 했다.
 또는 나오코의 기분속에 스스로 정신을 내던져서는 단순한 복잡함을 느끼며 머리를 아파해보기도 했다. 짧게나마 우울증을 앓아봤던 사람으로서 아주 작게나마 그녀의 감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적인 감성 투성이 속에서, 그녀도 혼란을 느꼈고, 나 역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단 와타나베나 나오코 뿐만 아니라, 미도리나 스쳐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도 한번씩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심지어는 와타나베와 원나잇 스탠드를 한 여자까지도 그러하다. 한번 이입이 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책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또 비틀즈가 생각나버렸다. 노르웨이의 숲 때문이다. 허나 나는 비틀즈의 팬도 아닐뿐더러, 비틀즈를 잘 알지도 못한다. 곡도 몇 개밖에 들어보지 못했다. 헤이 주드나 오블라디오블라다 정도? 비틀즈에 대해 거의 상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비틀즈만큼 세계 음악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또, 음악은 모두가 그것을 공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가사를 모르겠어도, 음정과 박자 그리고 분위기 만으로도 우리는 감성을 공유할 수 있다. 음악은 대단한 발명이다. 노래가 언어가 된다. 바벨탑을 쌓기 이전에 세계 공용어는 음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에 앞장선 위대한 비틀즈라는 그룹을 고작 한 여성이 뭉개버리다니. 위대한 업적은 쌓아 놓은 높이 만큼 무너지기도 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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