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2일 토요일
2015년 6월 14일 일요일
세계가 거대한 모래시계처럼 흐른다
할 말들을 생각해 놓았는데 막상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으니 글에 대한 갈증이 가신다. 한꺼번에 많은 글을 올려놓고 가는 게 왜인지 청승맞아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은 오늘도 아주 잘, 물처럼 흘러가는 중이다. 바다에 닿기 위해 흘러가는 중이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2015년 5월 27일 수요일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古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김수영, 시집『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지금 상황과 잘 맞는 시.
네트 상에서의 감정 소모
가 부쩍 심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누군가가 무엇을 하나 잘못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은 다음 기어코 숨통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세상이 각박해지다보니 그런걸까, 조그만 것에도 화를 내는 사람들과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에 숨어 남을 헐뜯는 그들의 태도가 부쩍 자주 보인다. 논리적인 이성보다 한껏 격양된 자기 감정이 우선이다 보니 말과 글이 폭력적이고 분별이 없다.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다른 시야가 트일텐데 그거마저 귀찮아 하는 건지....
사람들이 갈수록 사실정보를 얻는 정성을 무시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긴 글이 나오면 스크롤을 쭉 내리고는 댓글로 3줄 요약을 요구하며, 프로그램 한 편을 다 보기 보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플래시를 챙겨본다. 당연히 짧고 얕게 보고 들을 수록 정확한 사실정보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난다. 오해와 왜곡은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잠잠해진다.
또 사람들은 공인에 대해 편파적인 시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범법행위를 몇 번씩 저질러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숨을 죽여야 한다. 자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쇼 오락의 겉다리나 만지작 하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으면 서럽다.
꽁치 통조림 하나 잘못 썼다고 모든 잘못을 독박쓰는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서 쓰는 글. 그러나 나도 그 사람을 셰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갈수록 사실정보를 얻는 정성을 무시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긴 글이 나오면 스크롤을 쭉 내리고는 댓글로 3줄 요약을 요구하며, 프로그램 한 편을 다 보기 보다는 하이라이트 부분만 편집된 플래시를 챙겨본다. 당연히 짧고 얕게 보고 들을 수록 정확한 사실정보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정보 전달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난다. 오해와 왜곡은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잠잠해진다.
또 사람들은 공인에 대해 편파적인 시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범법행위를 몇 번씩 저질러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채 숨을 죽여야 한다. 자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쇼 오락의 겉다리나 만지작 하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으면 서럽다.
꽁치 통조림 하나 잘못 썼다고 모든 잘못을 독박쓰는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서 쓰는 글. 그러나 나도 그 사람을 셰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곽정은의 발언이 불편한 이유
곽정은이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내용은 대충 택시를 타고 일하러 가는데, 택시기사가 '이랗게 예쁜 공주님들도 일을 하러 가느냐'라고 말한 것에 불쾌함을 느끼고 택시에서 내렸다는 것. 뒤이어 왜 택시기사의 말이 불쾌했는지 짤막한 이유도 적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과 예쁜 여자가 왜 일을 하느냐는 전제, 그리고 공주라고 지칭하며 미성숙한 애 취급을 하는 일련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꼈다 - 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곽정은의 말이 불편하다. 이유는 이러하다.
1. 택시기사가 한 발언은 그냥 칭찬으로 건넨 말인게 뻔한데 그것을 굳이 꼬아서 해석한 것.
2. 곽정은 자신이 했던 지난 날의 발언과는 그 행동이 모순된 것.
3. 마지막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이해시켜줄 이유가 없다.'라고 일축해버린 것.
우선 1번부터. 택시기사가 건넨 말은 어딜봐도 칭찬이다. 곽정은 본인도 그 말이 칭찬임을 알 것이다. 택시기사가 힘 준 단어는 역시 '예쁜 공주님'일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예쁘다고 칭찬을 한 것이다. 헌데 그것에 대해 '외모에 대한 평가 섞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곽정은은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라고 했는데, '평가'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단어를 부러 불쾌한 의미의 것으로 바꾸어 썼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판단까지 불쾌한 의미의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곽정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고 오 예쁘네, 잘생겼네, 라고 말한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타인의 외모에 대한 불쾌한 평가인가?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받아들이는 말을 어거지로 불쾌한 의미로 바꾸면 본인의 삶 역시 언행불일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공주'라는 말에 미성숙한 애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공주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들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공주님 소리가 전부인 모양이지만, 사실 공주는 그냥 어떤 위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나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때문에 '미성숙한 애'의 나이를 훌쩍 넘은 공주들도 많다. 또한 택시기사가 딱 봐도 어른인 사람에게 애 취급할 목적으로 '공주'라는 말을 썼을리도 없으며, 에X드 하우스만 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공주소리인 만큼 그 대상이 '미성숙한 애'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쁜 여자가 일을 하러 가느냐, 라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긴 사람만 일을 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
2번에서 서술할 내용은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다. 다만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2번의 예시는 그 유명한 장기하와 침대 발언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곽정은이 모 프로그램에서 장기하에게 '저 남자는 침대에서는 어떨까?'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럴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사람이니 만큼, 은어에 관련해서는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고, '침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둘이 이야기를 잘 마쳤다고는 해도 이미 전파를 타고 각 가정에 나가버린 이상, 그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곽정은은 단호히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라며 그 이유에 대해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나는 본인의 벌언에는 관대하고 타인인 택시기사의 발언에는 엄격한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예전에 잘못을 했더라도 지금 타인의 행동에 불쾌를 느끼고 따질 수 있다. 허나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겠는가?
3번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곽정은은 트윗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개중에는 나름 적절하게 비판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마 대부분은 화를 참지 못한 욕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가 피곤해져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라며 일축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적어도 적절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까지 싸그리 묶어 '수준'을 운운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 상세하게 자신이 불쾌를 느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도, 더 설득력있게 글을 쓰지도 않았다.
최근의 트윗을 보니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곽정은이 리트윗한 최지은이라는 분의 트윗은 '여성이 불쾌를 겪은 일에 유별나다며 비웃는 것은 보다 많은 여성이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올바른 생각이고, 무엇이 유별난 생각인지부터 판단할 줄 알아야....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곽정은의 말이 불편하다. 이유는 이러하다.
1. 택시기사가 한 발언은 그냥 칭찬으로 건넨 말인게 뻔한데 그것을 굳이 꼬아서 해석한 것.
2. 곽정은 자신이 했던 지난 날의 발언과는 그 행동이 모순된 것.
3. 마지막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설득해서 이해시켜줄 이유가 없다.'라고 일축해버린 것.
우선 1번부터. 택시기사가 건넨 말은 어딜봐도 칭찬이다. 곽정은 본인도 그 말이 칭찬임을 알 것이다. 택시기사가 힘 준 단어는 역시 '예쁜 공주님'일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예쁘다고 칭찬을 한 것이다. 헌데 그것에 대해 '외모에 대한 평가 섞인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곽정은은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라고 했는데, '평가'라는 일상적인 행위이자 단어를 부러 불쾌한 의미의 것으로 바꾸어 썼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판단까지 불쾌한 의미의 '평가'라고 할 수는 없다. 곽정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고 오 예쁘네, 잘생겼네, 라고 말한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타인의 외모에 대한 불쾌한 평가인가?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받아들이는 말을 어거지로 불쾌한 의미로 바꾸면 본인의 삶 역시 언행불일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공주'라는 말에 미성숙한 애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공주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들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공주님 소리가 전부인 모양이지만, 사실 공주는 그냥 어떤 위치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나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때문에 '미성숙한 애'의 나이를 훌쩍 넘은 공주들도 많다. 또한 택시기사가 딱 봐도 어른인 사람에게 애 취급할 목적으로 '공주'라는 말을 썼을리도 없으며, 에X드 하우스만 가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공주소리인 만큼 그 대상이 '미성숙한 애'인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쁜 여자가 일을 하러 가느냐, 라는 것은 불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긴 사람만 일을 해야 한다' 라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
2번에서 서술할 내용은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다. 다만 왜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2번의 예시는 그 유명한 장기하와 침대 발언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곽정은이 모 프로그램에서 장기하에게 '저 남자는 침대에서는 어떨까?'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그럴 목적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럴 목적이 없었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사람이니 만큼, 은어에 관련해서는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고, '침대'라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후 둘이 이야기를 잘 마쳤다고는 해도 이미 전파를 타고 각 가정에 나가버린 이상, 그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해야 했었다. 그러나 곽정은은 단호히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라며 그 이유에 대해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나는 본인의 벌언에는 관대하고 타인인 택시기사의 발언에는 엄격한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예전에 잘못을 했더라도 지금 타인의 행동에 불쾌를 느끼고 따질 수 있다. 허나 누가 그런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겠는가?
3번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곽정은은 트윗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개중에는 나름 적절하게 비판한 것도 있을 테지만, 아마 대부분은 화를 참지 못한 욕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가 피곤해져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라며 일축한 것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적어도 적절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까지 싸그리 묶어 '수준'을 운운해서는 안되었다. 또한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제시한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 상세하게 자신이 불쾌를 느낀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번복하지도, 더 설득력있게 글을 쓰지도 않았다.
최근의 트윗을 보니 더 이상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곽정은이 리트윗한 최지은이라는 분의 트윗은 '여성이 불쾌를 겪은 일에 유별나다며 비웃는 것은 보다 많은 여성이 불쾌한 일을 겪게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올바른 생각이고, 무엇이 유별난 생각인지부터 판단할 줄 알아야....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입국금지에 대한 생각 정리
국가가 개인을 입국 금지 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입국 금지는 개인의 자유를 금지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다.
- 그러나 개인이 본인의 자유를 담보로 타국의 시민권을 따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 만일 개인이 입국 금지를 당할 것을 모르고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국적 선택은 누구든지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이다. 누구든지 본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물론 개인에게는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병대 홍보 대사나 이미지 소모로 인해 이득을 번 행위 등,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또한 입국금지 같은 처벌이 당사자의 예측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처벌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법을 수호하며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사안이다. 모든 사건에 공소시효가 있으면서 군입대 거부에만 공소시효가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 아니, 애초에 입국금지는 헌법에 명시된 처벌 방법이 아니다.
- 국적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더라도, 국적을 선택한 것은 개인이고, 그로 인한 책임과 부담을 고려했어야 함. 다만 계속되는 입국금지는 군입대 거부 전 벌어놓은 이미지나 돈을 생각하더라도 과중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더군다나 국내에만 군비리를 저지른 높은 분들이 수두룩한 판에, 군입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금지를 시키는 것은 진정성의 여지가 의심될 우려가 있다. 입국금지는 그만하되, 개인이 입국할 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빌어야 함.
- 무슨 소리인지....
- 그러나 개인이 본인의 자유를 담보로 타국의 시민권을 따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 만일 개인이 입국 금지를 당할 것을 모르고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국적 선택은 누구든지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이다. 누구든지 본인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물론 개인에게는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병대 홍보 대사나 이미지 소모로 인해 이득을 번 행위 등,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나 반성 없이 개인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또한 입국금지 같은 처벌이 당사자의 예측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처벌은 누구든지 공평하게 법을 수호하며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렇다 해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사안이다. 모든 사건에 공소시효가 있으면서 군입대 거부에만 공소시효가 없는 것은 불공평하다. 아니, 애초에 입국금지는 헌법에 명시된 처벌 방법이 아니다.
- 국적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더라도, 국적을 선택한 것은 개인이고, 그로 인한 책임과 부담을 고려했어야 함. 다만 계속되는 입국금지는 군입대 거부 전 벌어놓은 이미지나 돈을 생각하더라도 과중한 처벌이라고 생각함. 더군다나 국내에만 군비리를 저지른 높은 분들이 수두룩한 판에, 군입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금지를 시키는 것은 진정성의 여지가 의심될 우려가 있다. 입국금지는 그만하되, 개인이 입국할 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빌어야 함.
- 무슨 소리인지....
2015년 5월 18일 월요일
Maroon 5, Sugar
2집 이후 꾸준히 락에서 팝으로의 변신을 시도했던 마룬 5. 결국 4집 <Overexposed>부터는 완전한 팝 밴드가 되었다. 음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기에는 역시 팝 음악만한 게 없다. 음악성이 대수냐. 돈이 최고.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잡담
기린의 노래를 듣다가 세상이 점차 계산적이고 섬세하게 변해감을 실감했다. 요즘 인기있는 직업은 짧은 기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나 대기업 사원보다는 오래도록 적은 돈이나마 벌 수 있는 공무원이다. 이상적인 연애는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들기보다 넓게 공감을 해 줄 수 있는 것. 경조사는 직접 하기보다 대리업체에 맡긴다. 짧고 빠르게. 경제나 정치가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변하게 되었다. 벌리는 돈은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니, 실패할 확률이 높은 도박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살기는 편하겠구나 싶다.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면 굳이 큰 야망을 꿀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러나 어쩐지 처량한 자기위로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은 누구든지 가슴속에 큰 꿈을 갖고 살아가지만, 현실로 끄집어낼 조건과 용기가 없어서 정신승리를 하며 살아가기 때문. 행복하지만 슬픈 시대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토마스 얀,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g On Heaven's Door'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밥 딜런의 노래일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생 시절 학원에 다닐 때 영어 수업 시간에 밥 딜런의 노래를 배웠었다. 그리고 그 때 천국의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다. 죽음의 순간을 깊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숨이 끊어질 듯 애처로운 노래는 초등생의 마음조차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 독일의 영화는 밥 딜런의 노래의 제목 뿐만 아니라 가사의 내용마저 닮아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매 순간 빠른 속도로 죽음에 가까워진다. 어쩔때는 약이 없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돌아오기도 할 만큼 극한 상황에 처해있다. 죽음의 문 턱에 서 있는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바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생의 갓길을 달리는 모험은 아찔하기 짝이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며 죽음을 재촉하는 것도 모자라, 갱의 차와 돈을 훔치고 경찰과 부닥치는 등 오늘만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허나 그 과정이 심각하지는 않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묘사되며, 등장인물들의 바보같음으로 인해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시한부 주인공들이 하는 말은 초반의 긴장감을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우린 지금 천국의 문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거야." 죽음이라는 삶의 가장 큰 비극을 앞두었으면서도 온갖 희극적 상황들로 뒤덮인 주인공들의 여로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연상시킨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자아의 이성으로 그려진 루디와 감정으로 그려진 마틴은 결국 감정의 이끔으로 인하여 바다에 도착한다. 바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난관을 헤쳐나온 그들의 인생은, 목표에 도달하자 아름답게 스러지고 만다. 그리고 밥 딜런의 노래가 스며 나오면서 비로소 영화는 우리에게 주제를 각인시킨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목적을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다만 갱의 보스가 둘을 그냥 풀어준 전개는 개연성이 많이 부족했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뒤늦은 잔혹동시 논란에 대한 소고
내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보는 시리즈 도서가 있다. 바로 <한니발>. <양들의 침묵>부터 시작해서(중간에 <레드 드래곤>이 있지만 읽어보질 못했다. 아쉽.) <한니발 라이징>까지 쓰여진 시리즈는 꽉 짜여진 긴장감과 강한 흡입력으로 몇 번을 읽어도 언제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 즈음에 즐겨 읽었다. 한니발 시리즈를 읽은 후에는 왜인지 이전에 읽었던 큰 글씨가 따박따박 박힌 책들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일부러 읽기 쉬운 도서들보다는 어려운 책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허나 그럴때마다 같이 간 어른이 늘 나를 말렸다. 그런 책들은 나이가 좀 더 든 다음에 보라는 말도 덧붙여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의문스러웠다. '왜 어리다고 어려운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거지?'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넌 아직 어리니까'였다. 이 무슨 궤변인지.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가수 이승철이 <소녀시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며 당시 소녀들에 대한 편견을 노래한 것이 26년 전. 그 노래 이름을 딴 걸그룹이 이제는 중견급 가수가 된 이 시대에, 아직 우리는 '어리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하다고,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순수를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도 순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이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동물적 난폭함과 함께 부모와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들로 인함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을 마냥 순수하고 푸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폭력이 아닐까. 내 시각에는 어른이 아이들을 틀 안에 맞춰 키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 사건 또한 어른들의 폭력적이고 식민적인 편견으로 일어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논란이 되었던 시는 인터넷 상에서 퍼져 많은 이들의 (패륜에 대한)분노 혹은 (부모에 대한)걱정을 자아냈다. 허나 해당 시인의 부모는 이후 모든 논란을 일축했고, 시인 또한 인터뷰를 통해 심경을 밝히며 많은 어른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해당 시는 시집에 있는 시들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학생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독특한 안목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정신건강상태를 문제시 했지만 도리어 '넌 잔혹하고 비정상이야'라면서 정신 멀쩡한 시인에게 상처를 준 꼴이 되었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해당 사건에서 문제가 있던 쪽은 어디였는가.
해당 시 하나만 보아서는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생각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도 먼저 '시가 뭐 어립애답지 않게 이 모냥이야'라고 생각하며 성인의 프레임 속에 시를 가두어버린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시에 드러난 한국 학생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전국의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통의 의미보다, 윤리를 벗어난 배덕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이는 문화를 문화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슬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현대미술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슨 작품이 이래?'라며 깊은 사고반성 없이 현대미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누구들을 연상시킨다. 쉽게 생각하는 '~답게'의 기준이 아무 곳에나 적용될 만큼 만능인 것은 절대 아니다. 만일 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면 '어린애 답지 않음'이 아니라 잔혹성에 주목했어야 했다. '이런 표현을 시에서 허용해도 되는 걸까?'라는 물음은 표현 대상과 표현력의 범위를 넓히고 더 건강한 문화를 만든다. 처음부터 허용 기준을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허용 범위에 대한 토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일어봤을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 다른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그 결과 소설 말미에 가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시공간을 초월하는 '탈 지구earth'의 영역에 도달한다. (해당 작가는 이 부분 때문에 많이 까였지만 아무튼..) '동심'은 어른들의 판타지이다. 어른이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뛰놀며 구슬치기를 하거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동심은 어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동심을 세상으로 끌고 나와봤자 현 세대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며, 울분에 찬 어른들이 '왜 이걸 몰라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꼰대'가 된다.- 위 세대-아래 세대의 관계와 어른-어린이의 관계는 둘 다 위에서 아래로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해당 사건을 교훈삼아 하나의 새싹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죄를 내려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사실 '잔혹동시'라는 말도 편견적이고 다분히 정죄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해당 논란에 대한 고유명사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표현을 그대로 썼다.
+ 생각해보면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틀에 맞추는 강압과 폭력'은 굉장히 흔한 요소이다. 심지어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응답하라' 시리즈나 '토토가'는 지나간 세대 층을 겨냥한 상품이다. 어른들은 '응답하라'의 추억 속 장소나 물품, 음악들에 바지고 젊은 세대는 드라마의 로맨스에 빠진다. '토토가'는 대놓고 30대 이상을 노렸다. 10대 내지 20대 초반이 토토가에 열광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재력과 경험, 힘에서 사회 초년생과 학생들을 앞선 30대 이상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잔치판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11039461&code=940100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참조하면 좋은 중앙일보 칼럼. 어린이의 입장과 라벨붙이기의 위험성.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아다치 미츠루, 러프
<러프>를 읽기 전까지 내 마음 속 미츠루 최고의 작품은 <터치>였었다. 그러나 어제 러프를 다 읽고 나서 생각이 뒤바뀌었다. 러프가 최고.
아다치 미츠루가 그리는 연애의 오묘한 감정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H2>가 고민을 수반한 복잡한 연애 심리를 그리고 <터치>가 은근한 연애의 진행 과정을 보여준다면 <러프>는 미츠루 작품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연정을 나타낸다. 아미가 케이스케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에게 마음을 품는 과정과 아미에 대한 케이스케의 심리 고백, 그리고 엔딩에서 울려 퍼지는 아미의 고백까지. 남성 판타지적 요소가 맛깔스럽게 들어간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일본판같다.
부럽구만, 젊음이. 차도, 채여도 몇 번이고 여름은 오지. 뜨거운 계절이 말이야.
하이데거 세번째
1. 현존재 De-sein(= 세계-내-존재)은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 개념이다. 현존재는 쉽게 말해 '있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어의 Be 동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Be 동사로 예시를 들어본다. 'He is my friend'라는 문장에 is라는 동사가 있다. 한국어로 해석하면 is는 '~은/는'이 된다. 이 문장에서 ~은/는이라는 것은 앞의 주어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 그런데 주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주어가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나의 친구다'라는 문장에서 '그'가 존재하지 않으면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는 '있어야(존재)'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바로 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 위해 현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전통적으로 인간 존재는 신 앞에 우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신학을 중시한 중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고대나 근대에도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다른 신이 있다거나 했을 뿐이지 신의 개념은 늘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한 존재였다. 필연적인 존재는 오직 신 뿐이었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세상에 휙 던져진 존재로써, 누구든지 우연적으로 탄생한 존재였다. 또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서 던져지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성을 갖게 되면서 가능성 또한 갖게 되었다. FM을 예로 들어보자. 선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포텐이 터지고, 능력치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만일 FM의 시간이 2015년 5월에 계속 멈춰있다면 해당 선수가 아무리 -9의 포텐을 가진다 해도 능력치가 올라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발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헌데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므로 발전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발전할 가능성 또한 없다. 이 '가능성'이란 존재자만의 고유한 특권인 셈이다. 그리고 존재자들은 자기 존재밖에 있는 시간성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탈존'의 과정을 겪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있음이 타 존재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선 인간의 있음은 세계-내의 것이다. 인간은 있음 그 자체로 이미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 행동양식이나 생활방식등이 선조에서 후대로, 나의 주변에서 나에게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홀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친구 윌슨과 함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바탕으로 섬을 가꿔간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그 자체로 타자와 연결된다.
또한 인간의 있음은 다른 존재자들의 그것보다 자유롭고 심도있다. 동물들은 집을 지을 때 기껏해야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밖에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를 들어 지을지 고민할 수 있다.
2. 인간의 있음은 끊임없는 탈존의 성격을 띈다. 탈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어야 하고, 탈존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타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인산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 존재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단순한 물물/정보 교류로 이루어진 원시적 탈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각종 규제들은 고민의 산물이다.
3. 에픽하이 4집의 <백야> 중 타블로 벌스에 '매 순간이 과거의 끝'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매 순간 과거와, 자아와 작별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 다운에 돌입한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게 되며, 걱정이 심각해지면 네크로포비아가 되기도 한다. 이건 다음 번에....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기 위해 현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전통적으로 인간 존재는 신 앞에 우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신학을 중시한 중세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고대나 근대에도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다른 신이 있다거나 했을 뿐이지 신의 개념은 늘 있었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한 존재였다. 필연적인 존재는 오직 신 뿐이었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세상에 휙 던져진 존재로써, 누구든지 우연적으로 탄생한 존재였다. 또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서 던져지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성을 갖게 되면서 가능성 또한 갖게 되었다. FM을 예로 들어보자. 선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포텐이 터지고, 능력치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만일 FM의 시간이 2015년 5월에 계속 멈춰있다면 해당 선수가 아무리 -9의 포텐을 가진다 해도 능력치가 올라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발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헌데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므로 발전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발전할 가능성 또한 없다. 이 '가능성'이란 존재자만의 고유한 특권인 셈이다. 그리고 존재자들은 자기 존재밖에 있는 시간성으로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탈존'의 과정을 겪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있음이 타 존재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우선 인간의 있음은 세계-내의 것이다. 인간은 있음 그 자체로 이미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 행동양식이나 생활방식등이 선조에서 후대로, 나의 주변에서 나에게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홀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친구 윌슨과 함께 자신이 살던 세계를 바탕으로 섬을 가꿔간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그 자체로 타자와 연결된다.
또한 인간의 있음은 다른 존재자들의 그것보다 자유롭고 심도있다. 동물들은 집을 지을 때 기껏해야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밖에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어떤 재료를 들어 지을지 고민할 수 있다.
2. 인간의 있음은 끊임없는 탈존의 성격을 띈다. 탈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어야 하고, 탈존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타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인산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 존재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단순한 물물/정보 교류로 이루어진 원시적 탈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다. 각종 규제들은 고민의 산물이다.
3. 에픽하이 4집의 <백야> 중 타블로 벌스에 '매 순간이 과거의 끝'이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매 순간 과거와, 자아와 작별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 다운에 돌입한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걱정거리를 안고 살게 되며, 걱정이 심각해지면 네크로포비아가 되기도 한다. 이건 다음 번에....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주저리 모음
1. 하이데거를 다시 쓰려니까 피곤함이 밀려온다. 뇌 속 뉴런을 깨우기가 벅차다. 아아 이따 저녁에 다시 써야지.
2. 요즘에는 음악도 기사도 찾아보지 않고 그저 밀물썰물에 흘러가듯 지내고 있다. 나의 흐름은 달의 장력에 맡겨놓았다. 귀찮기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는 이유도 있고, 남들 말하는대로 부화뇌동하는 게 싫어서 꼼짝않고 지낸다. 요즘은 뭐 축구도 재미 없고,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을 떼가 제일 행복하다. 이러니까 아저씨같잖아 흑흑....
3. 어제 매운 볶음음식을 찬으로 삼았더니 위가 좀 쓰리다. 덕분에 오늘 까르보나라가 땡겼으나 속 안 좋아질까봐 패스. 건강 챙기고 살도 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오^ 그러나 속 안 좋은 와중에도 밥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까르보나라는 내일 다시 해먹어야지.
4. 까르보나라 하니까, 저번에는 면을 너무 적게 삶은 탓인지 겨우 1인분이 나왔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삶아야겠다. 그리고 치킨 스톡을 우려내어 육수로 넣으면 어떨까. 맛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짜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일 시도해봐야지..
5.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고 싶다. 소주 말고 좀 맛있는 거...
2. 요즘에는 음악도 기사도 찾아보지 않고 그저 밀물썰물에 흘러가듯 지내고 있다. 나의 흐름은 달의 장력에 맡겨놓았다. 귀찮기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는 이유도 있고, 남들 말하는대로 부화뇌동하는 게 싫어서 꼼짝않고 지낸다. 요즘은 뭐 축구도 재미 없고,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을 떼가 제일 행복하다. 이러니까 아저씨같잖아 흑흑....
3. 어제 매운 볶음음식을 찬으로 삼았더니 위가 좀 쓰리다. 덕분에 오늘 까르보나라가 땡겼으나 속 안 좋아질까봐 패스. 건강 챙기고 살도 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오^ 그러나 속 안 좋은 와중에도 밥은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까르보나라는 내일 다시 해먹어야지.
4. 까르보나라 하니까, 저번에는 면을 너무 적게 삶은 탓인지 겨우 1인분이 나왔었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삶아야겠다. 그리고 치킨 스톡을 우려내어 육수로 넣으면 어떨까. 맛은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짜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일 시도해봐야지..
5.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먹고 싶다. 소주 말고 좀 맛있는 거...
시간도 많으니 폐쇄성에 대해 글을 하나 더
현재 스르륵 회원들이 오유로 유입 중이고, 여성시대(이하 여시) 카페를 저작권 위반과 개인정보 수집으로 방통위에 신고한 상태이다. 일단은 여시 내에서 빈번하게 저작권이 위반된 적은 사실이고(사실 대형 사이트들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기는 한다.) 개인정보 수집 역시 여시와 탑시 가입 특성상 위법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개인정보 수집의 경우에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암튼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니고.
사방이 적인 여시가 이제는 같은 여초 특성을 가진 쭉빵에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조작글이 자기네 사이트에서 먼저 제기된 것 때문인지 쭉빵에서도 이번 일에 민감한 듯하다. 현재는 쭉빵이 거의 여시에 넘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다면 여시는 어떤 얘기로 쭉빵을 꼬드겼는가. 바로 그동안 그들이 지겹도록 얘기했을 '여혐' 사상이다. 오유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이 여혐사상을 갖고 여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내부균열을 막고 회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여시 운영진의 대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방법은 꽤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써먹은 방법이 바로 대륙진출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쟁기간만큼은 일본 무사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히틀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적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내부에서 토의하고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내부에서의 해결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는 모 국가가 떠오른다.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 일본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독일과 모 국가 세 나라 모두 폐쇄성을 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위 예시들에서 폐쇄적일 수록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이 더 자주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로 나열한 국가들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거나, 실패한거나 다름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모 국가는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모기 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니. 여시 역시 다음주 내로 부작용의 여파를 크게 맞으리라 예상한다.
추가로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한국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의 그것보다 비중있고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차별적인 시각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의 허리를 감싸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허리를 감으면 '좋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에게 썩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문제가 남성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녀차별은 신체적 차이로부터 나온다. 성희롱부터 폭행, 강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범죄들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여기서 힘은 사회적 지위가 일수도 있지만, 원초적인 신체적 힘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그러므로 여성 차별 문제에 더 민감해진다. 당장 범죄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희생자들 중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여성이 제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이 역시 기본은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가 여성문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스르륵 회원들이 신고하니까 이제야 사과문을 올린 여시. 스르륵한테만.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니니....
사방이 적인 여시가 이제는 같은 여초 특성을 가진 쭉빵에서 선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조작글이 자기네 사이트에서 먼저 제기된 것 때문인지 쭉빵에서도 이번 일에 민감한 듯하다. 현재는 쭉빵이 거의 여시에 넘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다면 여시는 어떤 얘기로 쭉빵을 꼬드겼는가. 바로 그동안 그들이 지겹도록 얘기했을 '여혐' 사상이다. 오유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이 여혐사상을 갖고 여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내부균열을 막고 회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여시 운영진의 대책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방법은 꽤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부를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써먹은 방법이 바로 대륙진출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하기는 했지만 전쟁기간만큼은 일본 무사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히틀러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적을 만들었다. 가깝게는 내부에서 토의하고 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내부에서의 해결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는 모 국가가 떠오른다.이렇듯 내부의 균열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 일본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독일과 모 국가 세 나라 모두 폐쇄성을 띄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위 예시들에서 폐쇄적일 수록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이 더 자주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 예시로 나열한 국가들의 작전은 전부 실패했거나, 실패한거나 다름이 없다. 일본과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모 국가는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 모기 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니. 여시 역시 다음주 내로 부작용의 여파를 크게 맞으리라 예상한다.
추가로 여성문제에 관한 글을 쓰려 한다. 한국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의 그것보다 비중있고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간혹 차별적인 시각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의 허리를 감싸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할 일이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허리를 감으면 '좋았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에게 썩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신체적 차이로 인해 여성문제가 남성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남녀차별은 신체적 차이로부터 나온다. 성희롱부터 폭행, 강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범죄들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다. 여기서 힘은 사회적 지위가 일수도 있지만, 원초적인 신체적 힘일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여성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그러므로 여성 차별 문제에 더 민감해진다. 당장 범죄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희생자들 중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여성이 제압하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이 역시 기본은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가 여성문제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스르륵 회원들이 신고하니까 이제야 사과문을 올린 여시. 스르륵한테만.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거 아니니....
여시 관련 + 오유
계속해서 사건이 커지고 있는 여성시대 카페 조작글 사태는 결국 여시쪽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문을 올리지 않고 끝날 공산이 크다. 아직까지도 운영진이 상황을 부정하는 데다가 회원들마저 운영진의 태도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성이 부른 타 사이트들과의 불통이다. 가끔 불통이 고소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여시에서 하는 악담이 특정 인물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는 것이라 고소는 불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전에 특정 연예인을 두고 희희낙락한 것은 해당 연예인이 성희롱으로 고소할 수도 있을듯.)
여시 조작 사태는 카페 일부 회원들의 소행이고 그 회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작과 물타기를 방관한 타 회원들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해당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바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작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작한 자료를 섣부르게 지지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조작과 선동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시가 워낙 폐쇄적이고, 대세인 주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찍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허나 여시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많은 여성 유저들이 그러했듯이 체제가 마음에 안들면 개인이 나오면 되는 일이다.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재밌는 유머들이 많아서 불만을 참고 활동하는 건 암묵적으로 사이트에 동의한 것이다. 간혹 아웃팅한 일베인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사실 일베가 유용한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있다. 나는 눈팅만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사람은 순수한 유저구나'라고 생각할 여시 회원들이 얼마나 될지.
+ SLR(이하 스르륵)에서 여시를 위해 따로 비밀방(탑씨)을 만들어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르륵회원들이 분노했다. 비밀방이 기존 스르륵 사이트 게시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글 올리기 좋았기 때문. 화가 난 회원들은 스르륵을 떠나 오유에 입성했다. 그래서 지금 오유는 스르륵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글이 많이 올라오는 중이며, 기존 오유 회원들도 유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과거 여성시대 영리화 사태때에도 열받은 여시 회원들 중 많은 수가 오유로 옮겨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오유는 새 회원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후 오유는 페미나치적인 성 관념을 주장하는 게시글/댓글이 늘어나면서 보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스르륵 회원들이 대거 유입되는 지금, 오유는 여시때와는 또 다른 문제점을 떠안을 수도 있다.
여시 조작 사태는 카페 일부 회원들의 소행이고 그 회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작과 물타기를 방관한 타 회원들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해당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바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조작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조작한 자료를 섣부르게 지지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둘째,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말없이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조작과 선동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여시가 워낙 폐쇄적이고, 대세인 주장과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찍히기' 때문에 두 번째 이유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허나 여시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많은 여성 유저들이 그러했듯이 체제가 마음에 안들면 개인이 나오면 되는 일이다.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재밌는 유머들이 많아서 불만을 참고 활동하는 건 암묵적으로 사이트에 동의한 것이다. 간혹 아웃팅한 일베인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사실 일베가 유용한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있다. 나는 눈팅만 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사람은 순수한 유저구나'라고 생각할 여시 회원들이 얼마나 될지.
+ SLR(이하 스르륵)에서 여시를 위해 따로 비밀방(탑씨)을 만들어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르륵회원들이 분노했다. 비밀방이 기존 스르륵 사이트 게시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글 올리기 좋았기 때문. 화가 난 회원들은 스르륵을 떠나 오유에 입성했다. 그래서 지금 오유는 스르륵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글이 많이 올라오는 중이며, 기존 오유 회원들도 유입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과거 여성시대 영리화 사태때에도 열받은 여시 회원들 중 많은 수가 오유로 옮겨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오유는 새 회원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후 오유는 페미나치적인 성 관념을 주장하는 게시글/댓글이 늘어나면서 보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스르륵 회원들이 대거 유입되는 지금, 오유는 여시때와는 또 다른 문제점을 떠안을 수도 있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2015년 5월 7일 목요일
사람을 방에 혼자 가두면 미쳐버리지만
여러명을 가두면 어떨까? 우선 가두어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서로 아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며 탈출방법을 고민한다. 잠시동안은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편이 갈리고, 다른 쪽의 의견은 무시한 채 귀를 막으며 지내게 된다. 타의에 의한 폐쇄성이 자의에서 피어나는 과정이다.
폐쇄성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흘러가야 하듯이, 집단도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립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안에서 그네들만의 잔치가 열린다.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자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점차 극단적인 성격을 띄어간다.
허나 동시에 폐쇄성은 허울일 뿐이다. 내부에서 일삼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 울타리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외부로 넘어가는 순간, 비밀스레 나누던 파시즘이 들통나고 사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하던 이야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대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얼마전 팟캐스트 방송 내용으로 문제가 된 옹달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그 누구보다 비난했던 '여성시대'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매장 운동까지 했던 대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폐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피해를 끼친 이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할 일이 아닌지.
폐쇄성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흘러가야 하듯이, 집단도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립된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안에서 그네들만의 잔치가 열린다.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자신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점차 극단적인 성격을 띄어간다.
허나 동시에 폐쇄성은 허울일 뿐이다. 내부에서 일삼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 울타리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외부로 넘어가는 순간, 비밀스레 나누던 파시즘이 들통나고 사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하던 이야기'라고 변명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대상은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얼마전 팟캐스트 방송 내용으로 문제가 된 옹달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옹달샘을 그 누구보다 비난했던 '여성시대' 카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매장 운동까지 했던 대상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폐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피해를 끼친 이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할 일이 아닌지.
말릭 벤젤룰, 서칭 포 슈가맨
죽은 영웅을 찾아 나서는 여정.
1. 낭만적인 영화다. 영화는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한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와,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여준다. 고작 한 장의 앨범으로 시작되었던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어느새 남아공 전역을 휩쓴 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등의 각종 규제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로드리게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지.
허나 로드리게즈의 상황은 낭만적이지 못했다. 70년대,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남아프리카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미국 가수였으므로 해외에서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 수가 없었다. 1970년대는 전화기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미국과 남아공은 소식을 주고 받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결국 남아공 사람들은 루머를 만들어낸다. 로드리게즈가 공연장에서 자살을 해 일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남아공 국민들은 그들의 영웅이 죽은 줄 알고 있었다.
2. 그런데 한 덕후가 로드리게즈의 자취를 따라가 보겠다며 뒷조사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로드리게즈는 미국에서 완전히 실패한 가수였고,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덕후는 위대하다. 끈질기게 정보를 추적해서 로드리게즈의 프로듀서였던 사람까지 알 게 되었고, 그에게 로드리게즈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3. 드디어 찾아낸 로드리게즈는 가난하지만 성실히 살고 있었다. 밥 딜런과 어깨를 나란히 할 뻔 했던 가수는 아버지가 되어 묵묵히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로드리게즈를 찾아낸 덕후는 그에게 남아공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로드리게즈는 다시 기타를 잡고 콘서트를 위해 남아공으로 향한다.
4. 로드리게즈의 인생과 그의 음악, 한 인간의 집념 그리고 로드리게즈의 노래를 부르며 규제에 저항했던 70년대. 이들은 참 낭만적이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당시에는 낭만이란 단어가 멀어 보였겠지만, 아픔을 뒤로 하고 곱씹어보는 과거는 낭만적이다. 향긋하고 고소하고.... 가슴을 울렁인다. <서칭 포 슈가맨>은 낭만적인 영화다.
2015년 5월 6일 수요일
2015년 5월 5일 화요일
다음 클라우드는 나의 원수
카카오톡 서버 열람 사태가 터진 후 정보 보호 시스템이 더 강화되었는지, 지금의 다음 클라우드는 상당히 삼엄한 꼰대 보초를 연상케 한다. 이전에 썼던 아이디가 있으면 반드시 예전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서 그 아이디를 통과시켜야 한다 ^오^. 하기사 개인정보를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한 사람에게 50GB 이상 주지 않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해결책을 찾아 파일을 업로드 중인데, 업로드 속도가 ^오^.... 고작 800메가짜리 올리는 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지 모를 일이다. 아악!
2015년 5월 4일 월요일
TMZ의 인종자별?
미국 매체인 TMZ에서 인종 차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영상을 확인해보았는데,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 만큼 노골적인 비하 발언이 있었다. 다만 이를 '인종차별'이라고 보면 약간 지나칠 정도로 거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논란에 대한 포커스가 흐려질 수 있다. TMZ 스탭들이 한 발언은 정확히 인종차별보다는 영어 발음을 비꼰 것이다. 두 개가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탭이 '영국 발음이었어도 다라했을거야'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미시적으로 정확히 찝어내자면, 인종차별 아래 하위항목으로 발음을 비꼰 것이라는 말이다. 허나 다른 스탭들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스탭에게 '쟤가 말하면 인종차별이 아니야'라고 하는 부분이나, 동양인 스탭이 본인의 출신지를 세탁하는 모습은, 히히덕거리고 있는 스탭 본인들이 이것이 인종차별의 뜻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뱉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각이 있음에도 행동을 했다는 것은 많은 비판을 받을 것이고, 사과를 해야 마땅한 일이다.
2015년 5월 3일 일요일
알약 두 개, 물 없이 삼켜
이센스는 '독'에서 스스로의 고뇌를 가사로 풀어쓰는 능력이 출중함을 보여줬다. 가사 속에 녹아있는 이센스의 상황은 사실 지금의 젊은 층이 가지고 있는 것과도 흡사하다. 아넥토트 앨범에서 기대했던 것도 더 성숙하고 훌륭한 리릭이었다.
그러나 이 음악이 표지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
만년필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만년필들을 보며, 저게 있으면 보기 좋은 필기체를로 글씨를 쓸 수 있겠구나, 라고 그만 착각을 해버린 나는 만년필에 대해 묘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만년필이 내 손 안에 들려있다. 생일선물로 원하던 것을 받아 기분은 좋은데, 막상 생기고 나니 언제 써야할 지 난감하다. 그래서 일단은 무작정 써보기로 했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감상평을 적을 때. 아니면 공책에 생각나는 말들을 그대로 끄적일 때 쓰면 좋겠지. 만년필이 쓰는 맛은 대단해서 한 번 글을 쓰면 엉뚱한 말이라도 계속 쓰고 싶어지게 한다. 때문에 굳이 영화 리뷰가 아니더라도 가끔 낙서하면서 재밌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음! 의식의 흐름.
Hold that thought, don't let me go
이번 앨범 수록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While The Song Remains The Same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내 블로그는 본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쓰는 것이었는데
자꾸만 글쓰기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갖게 된다. 그럼으로써 글을 쓸때마다 조금씩 더 고민하게 되는데, 이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글쓰기래봤자 초등학생 때 일기장 몇 권 쓰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와서는 짧은 글이나 끄적이던 내가 글쓰기에 욕심을 갖게 되니 난감하다. 욕심을 갖게 되면 이상을 이루기 위해 고민을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만의 개인 블로그에서조차 글을 쓸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기 위한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도 들고.
앞으로는 보다 논리적으로 써보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망설임이 서린다. 아, 글쓰기 참 어렵다. 그런데도 계속 써야만 머릿 속을 정리할 수 있으니 마약과 같다. 여기저기서 마약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의 글쓰기는 정말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병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기야 이 정도로 병들었을거면 진작에 다른 일로 몸져 누웠을 것이다.
밤이 깊었다, 방향을 위해 컴퓨터 옆에 놓아둔 디퓨저가 새콤한 시트러스 향을 낸다. 자야할 시간이라고 코를 간질인다. 그래, 이만 자야지. 로그오프.
앞으로는 보다 논리적으로 써보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망설임이 서린다. 아, 글쓰기 참 어렵다. 그런데도 계속 써야만 머릿 속을 정리할 수 있으니 마약과 같다. 여기저기서 마약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의 글쓰기는 정말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스트레스로 정신이 병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기야 이 정도로 병들었을거면 진작에 다른 일로 몸져 누웠을 것이다.
밤이 깊었다, 방향을 위해 컴퓨터 옆에 놓아둔 디퓨저가 새콤한 시트러스 향을 낸다. 자야할 시간이라고 코를 간질인다. 그래, 이만 자야지. 로그오프.
우리들이 돈을 내고 소비하는 것
나는 선물을 구매할 때 '프리미엄'이 붙어있으면 못사고는 못배길 정도로 (심각한)구매욕을 느낀다. 내가 구매욕을 느끼는 프리미엄들은 유니크한 디자인이나 선물을 구매할 시 유니세프에 기부금이 전달된다는 것 등등 여럿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이 '한정판'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구매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정판이라고 하면 왜인지 더 멋져 보이고, 더 쓸모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리셀까지 고려하면서 구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프리미엄이란 것은 무시무시한 나름의 광고효과를 낸다.
얼마 전 들었던 '안나 와인오프너'의 이야기도 프리미엄의 한 종류에 관한 것이다. 이 와인오프너에 얽힌 이야기는 소비자의 구매욕을 증가시킨다. 제작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소비자들은 혹시라도 내일, 아니 다음주나, 언젠가는 쓸일이 있겠지, 혹은 장식용으로 둘 목적으로 해당 물품을 구매한다. '안나 와인오프너'가 얽힌 이야기 하나 없는, 그저 귀여운 디자인의 오프너였다면 이만큼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프너 너머에 있는 제작자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보고 돈을 지불한 것이다.
조금 다른 예시이긴 하지만, 열기가 좀 식긴 했어도 아직 열풍을 몰고다니는 '허니버터칩'도 이와 흡사한 판매방식을 보인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허니버터칩의 맛은 특출나지 않다. 팬에 버터를 녹여 얇게 썬 감자를 튀기고 꿀을 넣어 조린, 딱 그맛이다. 처음 출시될 당시에는 생소한 맛이었겠지만 이제는 각종 '허니버터'가 난무하며 꿀벌이 고통받는 상황일 정도로 흔한 맛이 되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허니버터칩은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것일까? 답은 과자의 '희귀성'에 있다. 제품을 만든 회사는 현명하게도, 생산 라인을 많이 늘리지 않고 적은 수량으로 제품을 파는 방식을 택했다. 그럼으로써 허니버터칩은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사려고 찾아보니 없는' 상품이 되었다. 프리미엄이 붙은 허니버터칩은 광풍을 몰고 다녔다. 사람들은 '구하기 힘든 것'에 현혹되고는 하는데, 적당히 높은 수준의 질을 가진 운동화나 옷, 화장품 등에 보다 높은 가격이 적용되면 과시용으로라도 구매하려 하는 것이나, 도저히 재고량이 늘어나지 않는 에어조던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구매자들이 그 예다.
이처럼 사람들이 돈을 주고 소비하는 것은 해당 상품의 질이나 디자인 뿐만 아니라, 그것에 얽힌 이야기나 화제 등의 프리미엄도 있다. 안나 와인오프너를 사면 오프너 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사랑 이야기 또한 구매하는 것이고, 허니버터칩은 과자와 질소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과 의식을 먹어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프리미엄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써 프리미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최대한으로 마케팅 수단을 분석하여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것이 지갑의 돈을 지키는 좋은 길일 것이다. 마무리가 어설프지만 안녕~
2015년 4월 30일 목요일
허지웅이 글 쓰는 방식에 대해서
그냥 생각난건데, 허지웅의 글을 보고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 특히 트윗글. 하긴 책들이야 몇 번 감수를 거치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일기 쉽지만, 생각나는 대로 바로 글로 쓰는 게 특징인 트위터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면 쉽게 쓸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어느샌가 다른 잡생각들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가 생각했던 주제를 멀리 보내버리고는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글을 못쓴다.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쓰는 것이 주제에 알맞은 글을 쓰기가 쉽다.
그리고 또 하나. 이해하기 쉽게 적어놓으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어느샌가 인터넷 곳곳에 퍼져있고, 이걸로 의견이 분분해진다. 특히나 현 세태나 누군가를 염두하고 쓴 글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이렇게 어어, 하다가 싸운건 네티즌인데 최종적으로 피해보는 건 글을 쓴 본인이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렵게 써서 소수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허지웅은 한 과오에 비해 뭇 남성들의 질타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과거에 한 일이 철딱서니가 없는 행동이었기로서니... 그리고 남도 아니고 본인 트위터에 본인이 글을 쓰는데, 트윗을 읽는 사람들을 반드시 배려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배려하건 말건 그건 허지웅 본인 마음.
그리고 또 하나. 이해하기 쉽게 적어놓으면 이상하게 퍼져나간다. 어느샌가 인터넷 곳곳에 퍼져있고, 이걸로 의견이 분분해진다. 특히나 현 세태나 누군가를 염두하고 쓴 글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이렇게 어어, 하다가 싸운건 네티즌인데 최종적으로 피해보는 건 글을 쓴 본인이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어렵게 써서 소수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 허지웅은 한 과오에 비해 뭇 남성들의 질타를 많이 받는 것 같다. 과거에 한 일이 철딱서니가 없는 행동이었기로서니... 그리고 남도 아니고 본인 트위터에 본인이 글을 쓰는데, 트윗을 읽는 사람들을 반드시 배려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배려하건 말건 그건 허지웅 본인 마음.
2015년 4월 29일 수요일
기성세대의 시각 뻘소리
20대들이면 지겹게 듣는 말들 중 하나가, '너는 왜 안 그러니?'라는 말이다. 너는 왜 토익 준비를 안하니, 취업을 안하니, 왜 그러니 등등, 뇌에서 말하기 조정 역할을 담당하는 기성세대의 브로카 영역에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구비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비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요즘 거슬리는 말이 '왜 20대들은 나가서 현실에 대항하지 않나요?'이다.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벙어리인 사람들은 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로 들린다. 재밌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꼰대'질을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꼰대질을 혐호하면서 꼰대질을 한다니... 이 무슨 모순.
자, 그들이 (이미 난도질당해서 너덜너덜한)김난도 교수를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따진다. 당신이 요즘 20대들의 사정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돌아서서 20대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런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느냐고. 개탄스럽지 당연히. 그럼 왜 나가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무슨 수로 싸워..
20대들의 사고방식은 지배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뿌리 깊은 암기 교육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대학생이 되니, 혹은 취직을 하니 왠지 화가 나고 억울하다. 교과서 속 세계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따지려고 하니 막상 학점이 걱정이고, 월급이 걱정이다. 학점을 받아야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 카드 대금을 내거나 월세를 내거나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일은 대부분 암담하다. 싸웠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더라도 반짝,일뿐이다. 대중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20대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20대이기 때문에 분노를,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3,40대들도 안싸웠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엉.
결국 누가 안싸운다고 화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솔직히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빠지는 추세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윗에게 힘을.
내가 이런 글을 왜 쓰냐고? 재보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그 다양한 바리에이션 중에서도 요즘 거슬리는 말이 '왜 20대들은 나가서 현실에 대항하지 않나요?'이다. 이 소리가 나에게는 '왜 벙어리인 사람들은 말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로 들린다. 재밌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꼰대'질을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꼰대질을 혐호하면서 꼰대질을 한다니... 이 무슨 모순.
자, 그들이 (이미 난도질당해서 너덜너덜한)김난도 교수를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따진다. 당신이 요즘 20대들의 사정을 알기나 하냐고. 그리고 돌아서서 20대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런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느냐고. 개탄스럽지 당연히. 그럼 왜 나가서 싸우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무슨 수로 싸워..
20대들의 사고방식은 지배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뿌리 깊은 암기 교육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대학생이 되니, 혹은 취직을 하니 왠지 화가 나고 억울하다. 교과서 속 세계와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따지려고 하니 막상 학점이 걱정이고, 월급이 걱정이다. 학점을 받아야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 카드 대금을 내거나 월세를 내거나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 싸우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일은 대부분 암담하다. 싸웠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알아주더라도 반짝,일뿐이다. 대중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스스로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싸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은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20대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20대이기 때문에 분노를,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3,40대들도 안싸웠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뭐했엉.
결국 누가 안싸운다고 화내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솔직히 상황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빠지는 추세이지. 그렇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나가서 맞서지 않는다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윗에게 힘을.
내가 이런 글을 왜 쓰냐고? 재보선에서 질 것 같으니까!!!
뻘소리
1. 최근 연이어 불거지고 있는 연예계 문제 이야기
2. 휴학생은 알바를 하지 않으면 할 것이 컴퓨터 뿐이다. 물론 알바를 한다고 해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튼 오늘도 네트 상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티아라의 팬이 하소연하는 글을 보았다. 아직도 여전히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까이고 있다는 하소연. 음, 그럼 이쯤에서 그만 용서해줘야 하나? 그런데 누가 누굴 용서해주지?
3. 티아라 사건(?)의 주 대상은 탈퇴한 멤버와 현 몇 멤버들이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문제는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은 당연. 내가 친구와 싸웠다고 해서 남이 화해를 시켜주지는 않듯이. 전 멤버와 현 멤버가 화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 두 대상에 끼어들어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은지? 이전에 장동민 글에도 썼었으나, 그런 사람들은 요상하게도 자신이 정의의 편인 것처럼 생각한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건당위를 정확히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지을 수 있는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4. 그런데 한편으로는 맞는 행동인 것도 같다. 아니, 잘못을 한 사람이 사회에 떳떳하게 나와서 잘만 사는 게 말이 돼? 안된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동화로 배워온 권선징악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이것은 유치원생도 안다. 그런데 권선징악은 헌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다. 법률, 규칙, 제도 모두 권선징악을 해야 한다고 정해놓지는 않았다.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이다. 누군가가 (법에 어긋나지는 않는 일상적 형태의)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못되보이고, 미워진다. 권선징악은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대부분 비슷하므로 못된 행동과 착한 행동을 가릴 줄 알고, 또한 그것에 공감하거나 혐오를 느낄 줄도 안다.
5. 자, 권선징악은 마음의 문제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벌을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법률에는 없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처벌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티아라 팬은 하소연을 한다. '당신들 언제까지 미워해야 직성이 풀릴 겁니까?' 그리고 대중의 대답은 '잘못해놓고는 무슨 선처를 바람? 노어이' 티아라 팬은 권선징악의 기간을 보다 짧게, 대중은 보다 길게 생각하는 탓에 이런 괴리가 생긴다. 허나 여기서 대중이 팬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생각하는 기간과 (대중의)처벌이 다를 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사실 처벌이란 말을 쓰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마땅히 다른 말이 안떠올라서 그냥 쓰도록 한다(..)
6. 그럼 문제를 일으킨 연예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그냥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 좋아하려면 좋아하고, 싫어하려면 싫어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과 생각이 다른 남에게 화를 내거나 비웃는 것은 옳지 않다. 서로 성격이나 기호가 다른 문제일 뿐이다.
7. 그렇지만 자숙을 하지 않은 연예인은? ...자숙은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대중의 피(..)를 먹고 산다. 대중의 사랑, 대중의 돈, 하다못해 연관검색어 순위에 오른다면, 그건 인터넷을 쳐하고 사는 나와 같은 잉여들의 덕이다. 대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대중과는 거래관계에 있다. 즐거움을 팔고 돈을 얻는다. 만일 거래상대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면 사과해야 맞는 일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바이어의 신용을 회복할 수 있는 법이다. 시용을 회복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안좋은 말들을 듣게 되는 법이다. 거래 상대에게 예의는 지킵시다. 우리도 지킬 터이니.
8. 그래서 양현석의 '아티스트는 크리에이티브 해야 한다'라는 소리가 우습다. 아니, 그리에이티브 한 거랑 사과하고 자숙하는 것이랑 무슨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 자숙하면 덜 크리에이티브하게 되는지..? 아니면 사과를 크리에이티브하게 하겠다는 뜻인지, 참...
2015년 4월 28일 화요일
2015년 4월 26일 일요일
하이데거의 정리 두번째
1. 도구가 손 안에 있을 때의 무의식과 손 안에 없을 때, 즉 제 기능을 구현하지 못할 때의 의식은, 결국 스스로가 '손 안에 없음'을 자각해야 손 안에 목표하려는 것을 쥐려는 의지를 갖고, 이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자면, 한 때 열풍했던 장미칼이 그 특유의 톱날 모양으로 인해 식재료를 썰기에는 부적합하고, 오히려 공구로 이용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식칼이라고 나온 상품이 식재료 앞에서는 젬병인데 공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칼로서의)기능이 구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칼로 고기 대신 나무를 자를 때 드디어 깨닫는다. '뭐 이딴게 있어?' 그리고 새 식칼을 사러 간다. 식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장미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스스로 한계를 인식해야만 의지가 생긴다. 그 후 목표가 생기고, 아 내가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더 이롭겠구나,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Profit!
그런데 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기에? 이는 후에 말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1번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장자는 도가 사상의 중요 인물로서, '마음을 비움'을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사상은 간단히 말해, '비운 자리에 도가 자리잡는 것'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비워야 주스를 따를 수 있다. 물을 버리지 않고 주스를 따르게 되면 맛이 이상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와갤요리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기심, 관념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이를 '허심'이라 하는데,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심을 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로서'와 '~로써'가 너무 헷갈린다...
3. 인간은 대對존재 관계를 지배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먼 옛날 둘리가 엄마와 함께 있었을 당시에는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던 인간이, 여러 혁명을 거쳐 세계의 중심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지배자가 되었다. 숲을 도려내어 집을 짓더니 요즘은 골프장 등의 여가시설을 짓는다. 필수시설도 아닌 여가시설을 짓는다. 게다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부동산 시장을 위해 잉여주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은 공생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된지 오래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자신을 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폐증이다. 타 존재가 하는 말이, 언어의 소통으로 들리지 않고 소음으로 들린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를 새로이 성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칸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객체에 의거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천적 형식으로 인해 객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특징들을 찾아내어 그 나무를 인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생각한 그 나무의 특징으로써 우리가 나무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눈에 비친 나무의 본질 중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인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는 흡사 모 만화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중2병'과 같다.지나가던 타존재가 인간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나 인간은 몸을 뒤로 빼며 (상대에게 다 들리도록)읖조린다. "건드리지마. 죽.여.버.릴.수.도.있다구?" 크큭... 흑염룡이 날뛰고 있어서 말이지... 유우타 갓
자기-존재(세계-내-존재)는 내일.
다시 예를 들자면, 한 때 열풍했던 장미칼이 그 특유의 톱날 모양으로 인해 식재료를 썰기에는 부적합하고, 오히려 공구로 이용하기 용이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식칼이라고 나온 상품이 식재료 앞에서는 젬병인데 공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칼로서의)기능이 구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미칼로 고기 대신 나무를 자를 때 드디어 깨닫는다. '뭐 이딴게 있어?' 그리고 새 식칼을 사러 간다. 식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장미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같다. 스스로 한계를 인식해야만 의지가 생긴다. 그 후 목표가 생기고, 아 내가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더 이롭겠구나,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Profit!
그런데 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능은 무엇이기에? 이는 후에 말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Da-sein'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1번은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이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장자는 도가 사상의 중요 인물로서, '마음을 비움'을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사상은 간단히 말해, '비운 자리에 도가 자리잡는 것'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비워야 주스를 따를 수 있다. 물을 버리지 않고 주스를 따르게 되면 맛이 이상한 액체가 만들어진다. 와갤요리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이기심, 관념등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 이를 '허심'이라 하는데, 수행하기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심을 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로서'와 '~로써'가 너무 헷갈린다...
3. 인간은 대對존재 관계를 지배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먼 옛날 둘리가 엄마와 함께 있었을 당시에는 현상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던 인간이, 여러 혁명을 거쳐 세계의 중심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지배자가 되었다. 숲을 도려내어 집을 짓더니 요즘은 골프장 등의 여가시설을 짓는다. 필수시설도 아닌 여가시설을 짓는다. 게다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부동산 시장을 위해 잉여주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은 공생이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된지 오래되었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자신을 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자폐증이다. 타 존재가 하는 말이, 언어의 소통으로 들리지 않고 소음으로 들린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를 새로이 성립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칸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객체에 의거하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천적 형식으로 인해 객체가 성립된다고 보았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특징들을 찾아내어 그 나무를 인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생각한 그 나무의 특징으로써 우리가 나무를 성립시킨 것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나무가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간의 눈에 비친 나무의 본질 중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인 줄 모르는 인간의 의지는 흡사 모 만화로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중2병'과 같다.
자기-존재(세계-내-존재)는 내일.
새뮤얼 애덤스
Samuel Adams Boston Lager
새뮤얼 애덤스는 미국의 정치철학가이며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사촌이자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 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새뮤얼 애덤스는 맥주다.
GS에서 구입했으며, 병맥주밖에 없다. 330ml정도에 4,800원! 이라는 놀라운 가격... 다른 수입 맥주보다 천원정도 비싼지라 여러번 외면했다가 이번에 한 번 마셔봤다.
맥주 이름은 위에서 말한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인 새뮤얼 애덤스의 이름에서 땄다. 맥주에 대놓고 'Boston Lager'라고 써져있다시피, 미국산 라거 맥주이다. 세계사 시간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등 보스턴은 옛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당시 존,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을 건국한 건 역사 상식. 그리고 나는 대학교 교양 과목을 청강한 덕에 알게 되었지!
맥주의 맛을 보면 4,800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아주 조금은 아까웠지만...). 라거 맥주답게 청량감이 좋고, 첫 맛이 개운하며 목을 넘어간 후에는 깊은 향이 입안에서 퍼진다. 과일 향 같으면서도 시럽 향 같은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먹어본 맥주 중에서는 가장 맛 좋은 맥주. 가격만 조금 더 싸면 실컷 마실텐데 크흑......
새뮤얼 애덤스는 미국의 정치철학가이며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사촌이자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 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새뮤얼 애덤스는 맥주다.
GS에서 구입했으며, 병맥주밖에 없다. 330ml정도에 4,800원! 이라는 놀라운 가격... 다른 수입 맥주보다 천원정도 비싼지라 여러번 외면했다가 이번에 한 번 마셔봤다.
맥주 이름은 위에서 말한 미국 건국의 주요 인물인 새뮤얼 애덤스의 이름에서 땄다. 맥주에 대놓고 'Boston Lager'라고 써져있다시피, 미국산 라거 맥주이다. 세계사 시간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등 보스턴은 옛 미국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당시 존, 새뮤얼 애덤스를 비롯한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영국에 대항하여 미국을 건국한 건 역사 상식. 그리고 나는 대학교 교양 과목을 청강한 덕에 알게 되었지!
맥주의 맛을 보면 4,800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다(아주 조금은 아까웠지만...). 라거 맥주답게 청량감이 좋고, 첫 맛이 개운하며 목을 넘어간 후에는 깊은 향이 입안에서 퍼진다. 과일 향 같으면서도 시럽 향 같은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먹어본 맥주 중에서는 가장 맛 좋은 맥주. 가격만 조금 더 싸면 실컷 마실텐데 크흑......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하이데거 짤막한 정리
1. 정보의 흐름은 정보의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다.
가령 정보의 흐름을 Information으로 잡았을 경우, 어떤 데이타의 특정한 형상, 즉 Form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많은 매스미디어와 비슷하게, 그 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에 있다.
그러나 개념을 다르게 잡는다면, 정보는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흐름(말이 이상한데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을 띄게 된다. 이때 목적은 타인과 협력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권가 찌라시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내용 -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
함축적으로 말하다보니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으로 표현했으나, 실상은 그 사물이 원래 목적대로 쓰이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쓰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비껴나간다면 '손 안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보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언맨이 신나서 울트론을 창조했다. 그러나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세계평화의 수호자는 커녕 빌런의 길을 걷는다. 이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손 안에 없는'상태이다. 심지어 울트론이 스스로 '나는 줄에 묶여있지 않아요'라고 노래까지 부르며 확인사살을 시켜주는 판에....
이런 경우도 있다. 만일 울트론이 토니의 뜻대로 수호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울트론이 약해 빠졌다면? 울트론은 토니가 만들어놓은 목적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구를 아예 잘못 쓰거나 도구의 질이나 상태가 안좋거나-우리는 도구와 도구를 이용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식한다. 식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식칼에 대하여, 썰고 다지는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행하지만, 식칼이 남을 죽이는 것에 쓰인다면 그 행위와 식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적' 의미를 강하게 띄므로 위와 같은 의식이나 자각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어젯밤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그 주제로 실컷 이야기하는 어머님들을 보라. 이분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소통과 공유를 넘어 유흥이다. 그러나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에 목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스스로 내가 남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은 내가 아는 정보밖에 알 수 없다. 다른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경우 우리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보다 타인과 소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맛집을 찾을 때도 타인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고자 하지 않는가.
3. 맥주 마셔서 그런지 나른하다. 3은 내일......
가령 정보의 흐름을 Information으로 잡았을 경우, 어떤 데이타의 특정한 형상, 즉 Form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많은 매스미디어와 비슷하게, 그 목적이 정보의 '정확한 전달'에 있다.
그러나 개념을 다르게 잡는다면, 정보는 그것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흐름(말이 이상한데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을 띄게 된다. 이때 목적은 타인과 협력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증권가 찌라시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2.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 내용 -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
함축적으로 말하다보니 '손 안에 있음'과 '손 안에 없음'으로 표현했으나, 실상은 그 사물이 원래 목적대로 쓰이느냐 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쓰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비껴나간다면 '손 안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보고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언맨이 신나서 울트론을 창조했다. 그러나 울트론은 아이언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세계평화의 수호자는 커녕 빌런의 길을 걷는다. 이때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의 '손 안에 없는'상태이다. 심지어 울트론이 스스로 '나는 줄에 묶여있지 않아요'라고 노래까지 부르며 확인사살을 시켜주는 판에....
이런 경우도 있다. 만일 울트론이 토니의 뜻대로 수호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울트론이 약해 빠졌다면? 울트론은 토니가 만들어놓은 목적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도구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구를 아예 잘못 쓰거나 도구의 질이나 상태가 안좋거나-우리는 도구와 도구를 이용하는 우리의 행위를 의식한다. 식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식칼에 대하여, 썰고 다지는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행하지만, 식칼이 남을 죽이는 것에 쓰인다면 그 행위와 식칼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적' 의미를 강하게 띄므로 위와 같은 의식이나 자각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어젯밤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그 주제로 실컷 이야기하는 어머님들을 보라. 이분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소통과 공유를 넘어 유흥이다. 그러나 서양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전달'에 목적이 있다. 자신이 타인과 소통하기 이전에, 스스로 내가 남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립되어 있다면 결국 나 자신은 내가 아는 정보밖에 알 수 없다. 다른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하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경우 우리는 나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내가 캐낼 수 있는 정보보다 타인과 소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맛집을 찾을 때도 타인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고자 하지 않는가.
3. 맥주 마셔서 그런지 나른하다. 3은 내일......
스텔아 아르투아
Stella Artois. 유로 페일 라거. 청량감이 좋아 목넘김이 톡 쏘면서 부드럽고, 마시고 난 후에는 작은 향긋함이 일어난다. 새콤한 맛. 내가 마신 캔맥주는 5.0%.
http://beergle.tistory.com/entry/%EC%97%90%EC%9D%BCAle%EB%A7%A5%EC%A3%BC-%EB%9D%BC%EA%B1%B0Lager%EB%A7%A5%EC%A3%BC
위 링크는 맥주에 대한 간략한 정보글.
칸트 다시 공부하다 너무 열이 나서 맥주 한 캔을 땄다. 하핳.
http://beergle.tistory.com/entry/%EC%97%90%EC%9D%BCAle%EB%A7%A5%EC%A3%BC-%EB%9D%BC%EA%B1%B0Lager%EB%A7%A5%EC%A3%BC
위 링크는 맥주에 대한 간략한 정보글.
칸트 다시 공부하다 너무 열이 나서 맥주 한 캔을 땄다. 하핳.
조스 웨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강스포)
내 블로그는 어차피 오는 사람이 없을테지만 만일 그 누군가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왔는데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1. 액션이 전작보다 많고 화려하다. 그리고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면 영화 장면을 놓치기 쉽다. 액션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라 하겠으나, 빠른 전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할만하다.
2. 분위기가 보다 심오해졌다.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잘 안된 느낌이다. 철학을 하다가 말았다. 히어로 영화이니 심도있는 철학을 하기 어려웠겠지만, 이 때문에 울트론의 역할이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본인에 대한 자아 확립과 목표가 굉장히 단순... <공각기동대>나 <아이로봇> 비슷하게 철학을 하려다가 만듯한 모습. 또한 토니 스타크도 마찬가지. 시리어스한 아이언맨3에서의 토니 스타크의 모습과 다르다. 다시 단순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3. 블랙 위도우나 호크아이, 헐크 등 영화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의 비중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까지 챙기다보니 스토리 상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다. 조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루 조명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완벽하지 못했다'.
4. 퀵 실버가 너무 일찍 팽 당했다.... 아직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그냥 아웃되어버렸다. 스칼렛 위치 또한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벤져스 합류 후 매력 발산할 기회는 몇 번 더 있을터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듯. 따로 영화를 만들 것 같지는 않고 캡틴 아메리카에서 출연할 듯하다.
5. 새로운 히어로 비전의 탄생. 비전이 나온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야 알았다. 울트론과는 다른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오묘한 존재로써, 인피니트 젬 중 하나를 소유하였다. 비전의 성격은 정말 모호하다. 신체 외관은 인간이지만 실상 내부는 기계에 가까우며, (아직) 단순한 사고밖에 하지 못한다. 이후 마블 영화가 나오면서 점차 고민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은 새로운 히어로라는 것 빼면 활약은 그닥.... 강하기는 참 강하다.
6. 이 영화는 그냥 호크아이 하나로 정리된다. 호크아이에서부터 시작해서 호크아이로 끝났다. 호크아이만 봐도 영화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7. 스토리가 불친절하다. 이전의 MCU영화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마블 코믹스에 대해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은 이게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조스 웨던이 자른 부분이 많다고 했으니, 감독판이 나온다면 명확하게 이해가 가능할 듯.
1. 액션이 전작보다 많고 화려하다. 그리고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팔면 영화 장면을 놓치기 쉽다. 액션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라 하겠으나, 빠른 전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어할만하다.
2. 분위기가 보다 심오해졌다.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잘 안된 느낌이다. 철학을 하다가 말았다. 히어로 영화이니 심도있는 철학을 하기 어려웠겠지만, 이 때문에 울트론의 역할이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본인에 대한 자아 확립과 목표가 굉장히 단순... <공각기동대>나 <아이로봇> 비슷하게 철학을 하려다가 만듯한 모습. 또한 토니 스타크도 마찬가지. 시리어스한 아이언맨3에서의 토니 스타크의 모습과 다르다. 다시 단순한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3. 블랙 위도우나 호크아이, 헐크 등 영화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의 비중이 확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까지 챙기다보니 스토리 상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다. 조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고루 조명하는 시도는 좋았으나 '완벽하지 못했다'.
4. 퀵 실버가 너무 일찍 팽 당했다.... 아직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그냥 아웃되어버렸다. 스칼렛 위치 또한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벤져스 합류 후 매력 발산할 기회는 몇 번 더 있을터이니 기대해봐도 좋을 듯. 따로 영화를 만들 것 같지는 않고 캡틴 아메리카에서 출연할 듯하다.
5. 새로운 히어로 비전의 탄생. 비전이 나온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야 알았다. 울트론과는 다른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오묘한 존재로써, 인피니트 젬 중 하나를 소유하였다. 비전의 성격은 정말 모호하다. 신체 외관은 인간이지만 실상 내부는 기계에 가까우며, (아직) 단순한 사고밖에 하지 못한다. 이후 마블 영화가 나오면서 점차 고민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은 새로운 히어로라는 것 빼면 활약은 그닥.... 강하기는 참 강하다.
6. 이 영화는 그냥 호크아이 하나로 정리된다. 호크아이에서부터 시작해서 호크아이로 끝났다. 호크아이만 봐도 영화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7. 스토리가 불친절하다. 이전의 MCU영화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마블 코믹스에 대해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람들은 이게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조스 웨던이 자른 부분이 많다고 했으니, 감독판이 나온다면 명확하게 이해가 가능할 듯.
2015년 4월 22일 수요일
늑대아이 유키와 아메
호소다 마모루의 역작. 작화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분이라 더 좋았던 영화...
1.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영화가 '남성'이 주인공인 데 반해, 늑대아이는 철저한 여성 중심의 영화이다. 그 중에서도 싱글맘의 이야기인데, 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작중 주인공 '하나'가 엄청나게 강인해서 현실성은 조금 떨어진다. 게다가 늙지도 않는다.
2. 싱글맘의 이야기지만 이를 떠나서 모든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마지막에, 자아를 확립하고 숲으로 향해 떠나는 아들에게 "엄만 아직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라고 말하는 하나의 말은 부모들의 가슴을 대변하는 명대사.
3. 보통과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살아가는데 힘든지,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어머니의 위대함과 동시에 이런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핀트를 맞주고 있는데, 그 시선이 날카롭기 보다는 안타까워서 영화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4.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유키와 아메가 각각 자신의 자아를 성립하고 그 길로 나아갈때,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하나의 심정이다. 유키야 인간의 삶을 살기로 했으나, 아메는 늑대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으로, 결국 아메와는 헤어져야 하는데 이에 어머니로서의 마음과 충고가 슬픔에 범벅이 되어 드러나는 후반부가 압권.
5. 아이들을 키우는 긴 세월을 영화에 무리없이 개운하게 담아냈으며, 한 사람의 일생을 나즈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힘 있게 들려주는 영화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
6. 늑대아이를 보면서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같이 보면 좋을 듯.
7. 그러고보니 등장인물들 이름이 스포일러.....
2015년 4월 21일 화요일
왜 포르노는 한국에서 불법이어야 하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들을 수 있으면서도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어가 바로 ‘야동’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닐 때나 그 뒤 교수생활 초기만 해도 음담패설만 ‘EDPS’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고 ‘야동’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이 단어를 모르면 간첩이 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범국민적 속어로 자리잡은 야동의 정식 명칭은 ‘포르노’이다. 야동이 ‘야한 동영상’의 준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성행위를 연기하는 영화는 따로 ‘에로’라는 고상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볼 때, 야동은 역시 포르노의 속어로 봐야할 것 같다. 몇 년 전에 김본좌라는 사람이 야동 유포죄로 구속되었다. 하루에 야동을 무려 20기가씩 올리는 왕성한 정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할 때 김본좌 씨의 구속은 참으로 우스운 짓이었다. 이슬람 권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한국에서 포르노물을 배급했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하다니 말이 되는가. 그것도 지적 재산권 침해로 외국 포르노 제작사 측에서 고소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고 범죄라는 사실 하나로 구속을 한 것을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포르노를 굳이 금지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이웃 나라 일본을 음란물만 들입다 찍어내고 있는 한심한 나라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 특수한 케이스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다 포르노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시각도 아주 관대하다. 과거 일본 최고의 AV 배우였던 이이지마 아이가 연예계에 진출한 적도 있고 최근엔 아오이 소라가 가수활동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포르노 배우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하여 당선된 적도 있고 (이탈리아의 여성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는 편이다. 분명한 점은 포르노 배우가 당당한 직업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배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엔 AV 촬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분야는 서양이 하면 다 좋다고 사대주의적으로 따라가는 한국이, 왜 유독 포르노의 합법화만큼은 필사코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포르노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포르노가 사랑 없이 단순히 성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 먼저 사랑을 동반한 섹스만이 옳은가하는 문제이다. 사실 급속도로 서구화가 진행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섹스의 목적은 오로지 쾌락이라는 사실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이른바 변태적 섹스, 즉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개성적 취향의 섹스에 ‘옳다/그르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원 나잇 스탠드가 행해질 뿐만 아니라, <러브 퍼레이드> 등의 축제에서는 거리에서 섹스 행위가 벌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나라인 독일에서는 매년마다 <포르노 축제>가 열린다.
한국도 이제는 몇몇 종교 단체나 보수 단체가 외치는 ‘순결지상주의’가 그들끼리만의 이론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엔 왜 아직까지 그런 단체의 사람들만 초빙되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필요한 피임 교육 등에 관한 교육효과가 제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好不好)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사 사랑 없는 섹스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더라도 그것만으로 포르노의 금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수없이 많은 ‘옳지 않은’ 것들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중 어떤 조폭 영화는 유사살인 사건까지 일으켰고, 그밖에 여러 폭력물들은 어린 학생들의 꿈이 조폭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영화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우수한 예술영화들이란 건 또 어떤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예술영화가 현실사회의 윤리적 잣대를 벗어나는 것을 미화한 것도 많다. <불륜의 사랑>을 단골 메뉴로 삼는 텔레비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타 매체들과 비교해볼 때, 포르노는 오히려 대놓고 허무맹랑한 픽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훨씬 덜하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라서, 조폭 코메디물을 보고 조폭이 멋있다고는 떠들어도 포르노물을 보고 포르노 속의 인물이 멋있다고 떠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사 멋있다고 떠들며 그것을 모방한다고 해도 살인이나 폭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매체의 장르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반해 포르노만큼은 유독 범죄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중잣대는 마치 혼외정사 비율과 성 접대비 비율이 세계 1위를 달리면서도 늘 순결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이중성으로만 보인다.
사실 먼 옛날부터 성은 권력자들이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 서양 중세기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며 불어야 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스의 68 혁명 때 성에 대한 획일적인 윤리적 잣대를 타파하자고 외쳤던 것도 종교적인 위선의 역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가끔씩 외설 사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낄낄대며 가십꺼리로나 삼지만, 문화적 선진국에서 그런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해쳤다고 해서 민중적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잣대조차 애매모호한 외설이라는 이유로 포르노를 범죄시하기에는 논리의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포르노 유포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디오를 사용하던 시절만 해도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포르노를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된 현재에 있어 포르노 유포를 막으려는 행위는 마치 MP3 시장을 인정하지 않고 자멸의 길로 향해가는 음반업계에 비유될 수 있다. 파일 공유 사이트 아무데나 들어가서 아는 일본 여자 포르노 배우 이름 하나만 입력해 보라. 파일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 우리 집 애만은 안 볼 거라고?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착각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둔한 짓이다.
어차피 과거 봉건시대의 성윤리를 들이대기도 힘들고, 외설을 처벌하는 것이 고무줄 잣대일 뿐만 아니라, 포르노의 범람이 이미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면, 차라리 포르노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눈을 가리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조차 나올 수 없다. 과거에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도 위험성이 크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음성적 유포 상태에서는 문제 제기도,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는 포르노를 현실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국내에서도 제조할 수 있게 한 후, 사람들이 이를 자유롭게 즐기고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피임교육 등의 실질적인 성교육을 제공해주면서 말이다. 맨날 생물학적 공부에 순결만 강조하는 지금의 성교육은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겐 전혀 실효가 없다.
포르노가 성범죄를 유발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OECD 가입국 중 성범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의 하나다. 유럽에서는 포르노 유포 허용 후에 성범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다. 포르노가 성범죄율을 높인다는 연구 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보기에 포르노는 오히려 대리배설과 대리만족 효과를 낳아 성범죄를 감소시킨다.
-마광수 교수
포르노 이야기와는 별개로, 얼마전 간통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애슐리 매디슨'이라는 회사가 국내에 재진출했다. 이전에도 진출했었으나 그 때 당시에는 간통죄가 형사건이었으므로 얼마 못가 철수했었다. 그러나 철수하기 전까지 상당한 회원을 받아들이며 꽤나 높은 실적을 올렸다. 이에 회사 대표는 '한국이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봐라, 많은 이들이 외도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슐리 매디슨 회사 자체는 외도를 '건강한 가정'을 위한 것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에 위 발언은 비꼼이라기 보다는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애슐리 매디슨은 재진출 후 (당연하게도) 높은 수치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마광수 교수의 포르노 이야기와는 핀트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한 주제인 듯 해서 같은 페이지에 적는다.
내가 생각할 때 김본좌 씨의 구속은 참으로 우스운 짓이었다. 이슬람 권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한국에서 포르노물을 배급했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하다니 말이 되는가. 그것도 지적 재산권 침해로 외국 포르노 제작사 측에서 고소를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고 범죄라는 사실 하나로 구속을 한 것을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국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포르노를 굳이 금지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이웃 나라 일본을 음란물만 들입다 찍어내고 있는 한심한 나라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 특수한 케이스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도 다 포르노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시각도 아주 관대하다. 과거 일본 최고의 AV 배우였던 이이지마 아이가 연예계에 진출한 적도 있고 최근엔 아오이 소라가 가수활동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포르노 배우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하여 당선된 적도 있고 (이탈리아의 여성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는 편이다. 분명한 점은 포르노 배우가 당당한 직업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배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중엔 AV 촬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분야는 서양이 하면 다 좋다고 사대주의적으로 따라가는 한국이, 왜 유독 포르노의 합법화만큼은 필사코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포르노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포르노가 사랑 없이 단순히 성적 쾌락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 먼저 사랑을 동반한 섹스만이 옳은가하는 문제이다. 사실 급속도로 서구화가 진행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섹스의 목적은 오로지 쾌락이라는 사실이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이른바 변태적 섹스, 즉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개성적 취향의 섹스에 ‘옳다/그르다’라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쉽게 원 나잇 스탠드가 행해질 뿐만 아니라, <러브 퍼레이드> 등의 축제에서는 거리에서 섹스 행위가 벌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나라인 독일에서는 매년마다 <포르노 축제>가 열린다.
한국도 이제는 몇몇 종교 단체나 보수 단체가 외치는 ‘순결지상주의’가 그들끼리만의 이론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중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엔 왜 아직까지 그런 단체의 사람들만 초빙되는지 모르겠다. 진짜로 필요한 피임 교육 등에 관한 교육효과가 제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好不好)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사 사랑 없는 섹스가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더라도 그것만으로 포르노의 금지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수없이 많은 ‘옳지 않은’ 것들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중 어떤 조폭 영화는 유사살인 사건까지 일으켰고, 그밖에 여러 폭력물들은 어린 학생들의 꿈이 조폭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국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영화들도 즐비하다. 그리고 우수한 예술영화들이란 건 또 어떤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의 예술영화가 현실사회의 윤리적 잣대를 벗어나는 것을 미화한 것도 많다. <불륜의 사랑>을 단골 메뉴로 삼는 텔레비젼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타 매체들과 비교해볼 때, 포르노는 오히려 대놓고 허무맹랑한 픽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훨씬 덜하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라서, 조폭 코메디물을 보고 조폭이 멋있다고는 떠들어도 포르노물을 보고 포르노 속의 인물이 멋있다고 떠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사 멋있다고 떠들며 그것을 모방한다고 해도 살인이나 폭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매체의 장르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반해 포르노만큼은 유독 범죄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중잣대는 마치 혼외정사 비율과 성 접대비 비율이 세계 1위를 달리면서도 늘 순결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이중성으로만 보인다.
사실 먼 옛날부터 성은 권력자들이 사회를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로 작용해 왔다. 서양 중세기까지만 해도, 서민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낱낱이 고해하며 불어야 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프랑스의 68 혁명 때 성에 대한 획일적인 윤리적 잣대를 타파하자고 외쳤던 것도 종교적인 위선의 역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가끔씩 외설 사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이 낄낄대며 가십꺼리로나 삼지만, 문화적 선진국에서 그런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해쳤다고 해서 민중적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잣대조차 애매모호한 외설이라는 이유로 포르노를 범죄시하기에는 논리의 근거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포르노 유포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디오를 사용하던 시절만 해도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포르노를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된 현재에 있어 포르노 유포를 막으려는 행위는 마치 MP3 시장을 인정하지 않고 자멸의 길로 향해가는 음반업계에 비유될 수 있다. 파일 공유 사이트 아무데나 들어가서 아는 일본 여자 포르노 배우 이름 하나만 입력해 보라. 파일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 우리 집 애만은 안 볼 거라고?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착각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둔한 짓이다.
어차피 과거 봉건시대의 성윤리를 들이대기도 힘들고, 외설을 처벌하는 것이 고무줄 잣대일 뿐만 아니라, 포르노의 범람이 이미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면, 차라리 포르노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눈을 가리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조차 나올 수 없다. 과거에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도 위험성이 크다고 말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음성적 유포 상태에서는 문제 제기도, 개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는 포르노를 현실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국내에서도 제조할 수 있게 한 후, 사람들이 이를 자유롭게 즐기고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피임교육 등의 실질적인 성교육을 제공해주면서 말이다. 맨날 생물학적 공부에 순결만 강조하는 지금의 성교육은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겐 전혀 실효가 없다.
포르노가 성범죄를 유발시킨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OECD 가입국 중 성범죄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의 하나다. 유럽에서는 포르노 유포 허용 후에 성범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다. 포르노가 성범죄율을 높인다는 연구 보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보기에 포르노는 오히려 대리배설과 대리만족 효과를 낳아 성범죄를 감소시킨다.
-마광수 교수
포르노 이야기와는 별개로, 얼마전 간통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애슐리 매디슨'이라는 회사가 국내에 재진출했다. 이전에도 진출했었으나 그 때 당시에는 간통죄가 형사건이었으므로 얼마 못가 철수했었다. 그러나 철수하기 전까지 상당한 회원을 받아들이며 꽤나 높은 실적을 올렸다. 이에 회사 대표는 '한국이 보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봐라, 많은 이들이 외도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슐리 매디슨 회사 자체는 외도를 '건강한 가정'을 위한 것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에 위 발언은 비꼼이라기 보다는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일침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애슐리 매디슨은 재진출 후 (당연하게도) 높은 수치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마광수 교수의 포르노 이야기와는 핀트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한 주제인 듯 해서 같은 페이지에 적는다.
걱정 말라는 말
'걱정마' 혹은 '쓸데없는 걱정하지마'라는 말이 무심하게 들린다. 마치 나는 귀찮으니 나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투같다. 아무리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도 얼음장같은 입김이 새어나온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자주 내뱉었고, 스스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남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선 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상대방을 향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면서 그 이유를 조근조근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바란 것은 공감이었고, 해묵은 상식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이런식으로 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얄미웠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대를 멋지게 안심시켜보리라 했지만, 해줄 말을 찾느라 상대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니,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공감이 될리 없었고, 진정성있는 대답을 할리 만무했다.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했다. 누군들 걱정이 쓸데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걱정을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로 다시금 힘을 얻는 것이다. 어쩌다보면 운 좋게 해답이 나오기도 한다. 걱정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무시했다. 쓸데없다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도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자아가 뚜렷할수록 그렇다. 에고가 강할 수록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고민하다가 가끔씩 무너지면 비참하다. 그래도 걱정을 한다. 걱정에는 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걱정은 결국 잊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해답이 나와서 해소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 잊혀짐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결국 해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걱정에 나는 희망을 무시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해답을 엉터리로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보니 나의 사고가 비참하다. 반성.
언제나 남을 안심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우선 나에게 걱정을 털어놓는 상대방을 향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면서 그 이유를 조근조근 말했다. 그러나 상대가 바란 것은 공감이었고, 해묵은 상식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이런식으로 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얄미웠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상대를 멋지게 안심시켜보리라 했지만, 해줄 말을 찾느라 상대의 말을 놓치기 일쑤였다. 아니, 귀로는 듣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공감이 될리 없었고, 진정성있는 대답을 할리 만무했다.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매우 잔인했다. 누군들 걱정이 쓸데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걱정을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위로로 다시금 힘을 얻는 것이다. 어쩌다보면 운 좋게 해답이 나오기도 한다. 걱정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무시했다. 쓸데없다고.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본 후에도 남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끼워맞춘다. 자아가 뚜렷할수록 그렇다. 에고가 강할 수록 자신의 내부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스스로 고민하다가 가끔씩 무너지면 비참하다. 그래도 걱정을 한다. 걱정에는 답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걱정은 결국 잊혀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해답이 나와서 해소되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 잊혀짐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결국 해답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는 걱정에 나는 희망을 무시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해답을 엉터리로 제시한 셈이다. 이렇게보니 나의 사고가 비참하다. 반성.
Tuxedo의 Tuxedo
2인조 그룹 턱시도의 앨범, <Tuxedo>. 턱시도의 턱시도라니. 멋지게 보이려고 아우터위에 아우터를 입고는 뻘뻘 땀을 흘리는 사내가 상상된다. 허나 심히 버거워보이는 상상 속 사내와는 다르게 턱시도의 음악은 경쾌하며 시원하다.
재즈 그루브와 일렉트릭 악기가 잼과 토스트처럼 딱 붙은 앨범이다. 트랙은 전체적으로 경쾌하나 중간 중간 살짝 템포가 느려지기도 한다. 앨범 표지처럼 정렬적인 춤을 추다가도, 블루스를 추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좋은 앨범.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빌 비올라
빌 비올라 전시회에 다녀왔다. 장소는 국제 갤러리. 마침 서울 시내 골목골목을 걷고 싶었는데 잘 된 참이었다. 그렇게 길이 꽉 막힐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서울 중심부의 골목길은 참 예쁘다. 광화문부터 종로, 안국역 근처, 인사동의 거리는 현대 서울의 정수를 담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다.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큰 길거리로 나서기에, 큰 길가에는 주로 비싼 용품이나 음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있고, 돈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영은 건물의 뒷골목으로 향한다. 낮의 뒷골목은 각종 장신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상품등이 전시되어 있고, 저녁에는 비교적 값싼 술집이나 음식점들이 눈에 뜨인다.
아무튼, 갤러리에 가가 전 카페 마마스에 들러 점심을 먹고(이상하게 빵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밥은 조금만 먹어도 배부른데. 신기.) 개운한 느낌으로 갤러리에 당도했다. 1관은 전시 준비중이었고, 2관과 3관에서 빌 비올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빌 비올라의 전시를 감상한 느낌은 대략 이러하다.
1. 작가는 시간을 물로써 표현한다. 빌 비올라는 스스로 시간을 물질로써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시간이란 것은 개인이 물질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물질을 빌려와 설명해야 한다. 빌 비올라는 그 물질로써 물을 선택한 듯 싶다. 남자의 몸과 그가 서 있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줄에 매달린 남성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 모습을 보일때 물은 시간에 맞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여 시간이 물질임을 주장한다.
2. 넓은 대지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난해하다. 작가 본인은 대지의 웅장함과 함께, 사람을 작은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위대함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대신 자연 속에서 걷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것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았다.
3. 마지막으로 남녀의 영적 사랑을 표혔했다는 작품. 여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남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 결국 두 카메라는 같은 시점에서 만나는 남녀를 보여준다. 이 때 '불'이 둘의 매개가 되어 이어주는 역할을 돕는다.
예술은 어렵다. 그것도 머리 나쁜 트롤에게는...ㅠ
그래도 서울 중심부의 골목길은 참 예쁘다. 광화문부터 종로, 안국역 근처, 인사동의 거리는 현대 서울의 정수를 담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다.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큰 길거리로 나서기에, 큰 길가에는 주로 비싼 용품이나 음식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있고, 돈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영은 건물의 뒷골목으로 향한다. 낮의 뒷골목은 각종 장신구나 개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상품등이 전시되어 있고, 저녁에는 비교적 값싼 술집이나 음식점들이 눈에 뜨인다.
아무튼, 갤러리에 가가 전 카페 마마스에 들러 점심을 먹고(이상하게 빵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밥은 조금만 먹어도 배부른데. 신기.) 개운한 느낌으로 갤러리에 당도했다. 1관은 전시 준비중이었고, 2관과 3관에서 빌 비올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빌 비올라의 전시를 감상한 느낌은 대략 이러하다.
1. 작가는 시간을 물로써 표현한다. 빌 비올라는 스스로 시간을 물질로써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시간이란 것은 개인이 물질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적인 물질을 빌려와 설명해야 한다. 빌 비올라는 그 물질로써 물을 선택한 듯 싶다. 남자의 몸과 그가 서 있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물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줄에 매달린 남성이 시간을 거슬러 불가해적 모습을 보일때 물은 시간에 맞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여 시간이 물질임을 주장한다.
2. 넓은 대지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난해하다. 작가 본인은 대지의 웅장함과 함께, 사람을 작은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위대함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대신 자연 속에서 걷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는 것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았다.
3. 마지막으로 남녀의 영적 사랑을 표혔했다는 작품. 여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남성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 결국 두 카메라는 같은 시점에서 만나는 남녀를 보여준다. 이 때 '불'이 둘의 매개가 되어 이어주는 역할을 돕는다.
예술은 어렵다. 그것도 머리 나쁜 트롤에게는...ㅠ
15년 18일 광화문 시위와 진압
1. 15년 4월 18일, 광화문에서 시위가 열렸다. 나는 갤러리에 가기 위해 그 현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내가 광화문을 지난것이 오후 1시 즈음이었다. 당시 세월호 유가족을 포함한 시위자들이 경복궁 정문 앞에 백여명 좀 안되게 있었고, 건너편 광화문에도 시위자들이 10명 남짓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 인도를 따라 경찰버스가 죽 길을 막고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시위자들이 경복궁 쪽으로 건너가 합류하려 하자, 이를 경찰들이 막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합류를 막기 위해 버스를 줄지어 세운 것으로 보였다. 그덕에 나를 포함한 시민들은 길을 건너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2. 고작 백여명 남짓한 시위자들을 막자고 그 거대한 버스를 한두대도 아니고, 몇대씩이나 동원하여 길을 틀어막아햐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후 있을 시행법 반대와 세월호 인양 시위에서 교통불편을 해소하고,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취를 취한다고 한 것이지만, 글쎄. 이후 사건을 살펴보니 시위자들이 만명 가까이 모인 듯 했고, 경찰과 경찰버스는 그의 몇배나 되는 인원이 모였다. 교통은 물론이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는 마당에 시민안전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않나.
3. 누군가는 이 시위를 보고 '변질'되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애초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엄숙한 세월호 추모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항의하려고 모인 것이다.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목적이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시위를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애당초 세월호 침몰 후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유가족들의 순수한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한 쪽이 어느쪽인지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순수를 더럽혔는가? 또한 순수의 개념과 범위가 너무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시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변질된 시위인가.
4. 그리고 그 사람 말마따나 시위가 조용해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3번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이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인원을 대거 모으지도 않고, 경찰과 대치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은 채 한동안 얌전히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정부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나 했는지. 오히려 종북 빨갱이라며 특례입학 및 배상금 루머를 퍼뜨린 것은, 정부와 친한 언론 및 지지자들이 아니었나. 그럼 그 때 그 루머에 맞서 정부가 제대로 된 사실관계를 밝혀주기라도 했는가. 한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대놓고 빨갱이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얌전히 있어봐야 나아지지 않으며,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시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사실이다.
5. 누군가는 순수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민주사회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소수의 인원이 아닌 다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다수가 순수하게 한 맥락의 말을 가지고 한 가지의 뜻과 의견으로 모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가 불가능하다. 이는 왕권군주제에서는 가능하다. 왕 하나의 의견으로 끝을 보면 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애초에 순수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순수는 민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이다.
6. 이전까지 나는 시위와 진압에 대해 긴가민가 했었다. 시위자들의 말도 맞는 것 같고, 경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도 있었고,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다시말해 꿈틀하려면 먼저 밟혀야 한다. 이 경우 분명 사건제공의 원인은 밟은 쪽이다. 누가 먼저 상대를 밟았는지, 과도한 행동을 취했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확신했다. 이번은 명백히 경찰이 밟은 쪽이었다. 강물을 우물에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반드시 새어나오게 마련이고, 경찰은 새어나오면서 터지는 시위대의 감정적 행위를 유도했다.
7. 개중에 태극기를 태운 시위자가 있다고 한다. 유가족은 아니고, 시위꾼인 것으로 아는데,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와 별개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냐 묻는다면, 그것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호와 불호로 나눌 문제이지, 올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으로써 이루어진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다. 국민은 국가의 부모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거슬렀을때, 국민이 이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한 방법이 태극기를 불로 태운 것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를 태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므로.
8. 그러나 의경버스를 털어간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시위를 하러 왔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9. 의경이 미워서, 경찰이 미워서 그들에게 화를 푸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가족과 시위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경찰보다는 정부쪽이다. 정부는 이 전 대통령 이래로 같은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의경과 경찰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푸는 것은 감정과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이다. 소모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게 되면 포기하기에 이른다.
2. 고작 백여명 남짓한 시위자들을 막자고 그 거대한 버스를 한두대도 아니고, 몇대씩이나 동원하여 길을 틀어막아햐 했는지 의문이다. 물론 경찰은 이후 있을 시행법 반대와 세월호 인양 시위에서 교통불편을 해소하고, 다른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조취를 취한다고 한 것이지만, 글쎄. 이후 사건을 살펴보니 시위자들이 만명 가까이 모인 듯 했고, 경찰과 경찰버스는 그의 몇배나 되는 인원이 모였다. 교통은 물론이고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는 마당에 시민안전을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않나.
3. 누군가는 이 시위를 보고 '변질'되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애초에 이 시위는 조용하고 엄숙한 세월호 추모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항의하려고 모인 것이다.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목적이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시위를 하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애당초 세월호 침몰 후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유가족들의 순수한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한 쪽이 어느쪽인지 생각해보면.... 누가 먼저 순수를 더럽혔는가? 또한 순수의 개념과 범위가 너무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순수한 시위이고, 어디서부터가 변질된 시위인가.
4. 그리고 그 사람 말마따나 시위가 조용해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3번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이지만, 다시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인원을 대거 모으지도 않고, 경찰과 대치할만한 상황을 만들지도 않은 채 한동안 얌전히 단식투쟁을 했다. 그 때 정부가 유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기나 했는지. 오히려 종북 빨갱이라며 특례입학 및 배상금 루머를 퍼뜨린 것은, 정부와 친한 언론 및 지지자들이 아니었나. 그럼 그 때 그 루머에 맞서 정부가 제대로 된 사실관계를 밝혀주기라도 했는가. 한 여당 의원은 유가족에게 대놓고 빨갱이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얌전히 있어봐야 나아지지 않으며,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시위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사실이다.
5. 누군가는 순수한 시위를 주장하는 것이 민주사회에 어긋나는 것이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소수의 인원이 아닌 다수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다수가 순수하게 한 맥락의 말을 가지고 한 가지의 뜻과 의견으로 모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가 불가능하다. 이는 왕권군주제에서는 가능하다. 왕 하나의 의견으로 끝을 보면 된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애초에 순수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순수는 민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의견이다.
6. 이전까지 나는 시위와 진압에 대해 긴가민가 했었다. 시위자들의 말도 맞는 것 같고, 경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도 있었고,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행태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둘 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과관계를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다시말해 꿈틀하려면 먼저 밟혀야 한다. 이 경우 분명 사건제공의 원인은 밟은 쪽이다. 누가 먼저 상대를 밟았는지, 과도한 행동을 취했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 시위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확신했다. 이번은 명백히 경찰이 밟은 쪽이었다. 강물을 우물에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반드시 새어나오게 마련이고, 경찰은 새어나오면서 터지는 시위대의 감정적 행위를 유도했다.
7. 개중에 태극기를 태운 시위자가 있다고 한다. 유가족은 아니고, 시위꾼인 것으로 아는데, 상대편에 빌미를 제공한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다. 이와 별개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냐 묻는다면, 그것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호와 불호로 나눌 문제이지, 올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으로써 이루어진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다. 국민은 국가의 부모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거슬렀을때, 국민이 이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한 방법이 태극기를 불로 태운 것이었을 뿐이다. 태극기를 태웠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므로.
8. 그러나 의경버스를 털어간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시위를 하러 왔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9. 의경이 미워서, 경찰이 미워서 그들에게 화를 푸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가족과 시위대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은 경찰보다는 정부쪽이다. 정부는 이 전 대통령 이래로 같은 방식을 쓰고 있다.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에 맞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의경과 경찰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푸는 것은 감정과 힘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것이다. 소모하다보면 지치고, 지치게 되면 포기하기에 이른다.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네트 상에서의 조직화와 네티즌의 암
1. 네트 상에서는 조직화가 오프라인보다 훨씬 쉽다. 90년대 만화 극장판에 나온 인형사의 말마따나 네트는 광대하고, 매우 빠르고 간편하다. 사람이 모여들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으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만한 흥미를 지어내고, 퍼뜨리는데에도 좋은 환경이다. 때문에 조직화가 쉽다. 또한 조직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 구별도 모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최근 연예계 최고의 이슈였던 장동민의 팟캐스트 방송을 예로 들어보면, 우선 장동민의 방송을 듣고 이 사람이 너무나 미워진 나머지, 네트 상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조직을 꾸려 계획을 세우고, 장동민이라는 사람에게 불리한 글을 꾸준히 그리고 널리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후 역풍이 일어난 뒤, 해당 사람들은 부인하거나 침묵했지만 이미 캡쳐까지 나돌아다니는 일이, 모른척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조직을 꾸렸다. 그리고 계획에 맞게 일을 했다. 이 사람들의 조직의 핵심이다. 그러나 핵심 이외에도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직이 올린 글을 다른 곳으로 퍼뜨린, 조직 외 사람들이다. 조직과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조직원과 조직 외 사람들간의 차이는 직접 서로 소통을 하여 계획에 참여했느냐, 아니냐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3. 조직 외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생각해보면 이용당한 피해자이니까. 그러나 그들 스스로 다시 생각해볼진대, 본인이 이용당하기를 원하진 않았는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4. 일련의 장동민 사건은 '장동민'이라는 사람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면서 그 사람의 과거 행적과 (조금이나마)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위 사건을 접하면서 장동민에게 숱한 매질을 했다. 분명 방송은 누가 들었어도 여성비하적인 내용이 농축되어 들어 있었다. 옹꾸라를 들어온 사람들은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은 아니라거나, 음성으로 듣는 것과 텍스트 상의 어감은 많이 다르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방송에서 계속 그런말만 하는 것이든, 어감이 다르던간에 그것은 분명한 여성비하였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매질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동안 분위기상 움츠려있던 네티즌들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장동민과는 별개로, 네티즌에 관한 문제였다. '과연 매질을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5. 사실 네티즌에게는 권력이 없다. 검사처럼 누구를 기소할 힘도, 판사처럼 판결을 내릴 권리도 없다. 검사나 판사가 헌법의 수호 아래 권력을 가진다면, 네티즌들은 다수의 힘의 수호 아래서 '가짜권리(력)'를 갖는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으로써, 누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여러사람의 고심 끝에 나온 철학적 결과물도 아니다. 정당성도 물론 없다. 가짜권리는 무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나온다. 사실 건달과 다를 바가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니, 무시를 넘어서 칼로 푹 찔러버리는 일도 대수다. 네티즌의 가짜권리는 건달의 사시미 칼과 다를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폭력 농축액이다.
6. 매질을 하는 것은 분명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분위기와 사람에 휩쓸려 매질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분위기 상에서는 반대 의견을 제시해봤자 금세 묻히거나 욕을 먹을 뿐이었다. 장동민을 향한 사시미 칼이,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자 의견을 낸 한 네티즌의 배때지로 향한다. 네트 상에서는 하주 흔한 일이지만,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어쟀거나 그렇게 매질을 시원하게 하고 나니, 이제야 시야가 맑게 개이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생각치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역풍이 일어났다.
7. 장동민은 팟캐스트 방송 이후 몇차례 사과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첫사과는 영 시원치 않은 것이었지만, 당시 팟캐스트가 '듣는 사람만 듣는' 마니아들을 위한 방송이었고, 그 마니아들이 받아들이고 넘어갔다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많은 대중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재차 다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는 매질이 끝난 뒤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매질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몰랐기 때문에, 사과를 한다고 장동민을 용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본인을 정당화하는 중이다. 허나 정당한 폭력따위는 없다. 또한 사과를 한 사람에게 무시라면 몰라도, 폭력을 행하는 것이 어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8. 한 매체 편집장은 장동민이 했던 발언에 대해 '사람부터 되라'고 말했다. 그렇다. 장동민은 사람부터 되야 했다. 그래서 사과 후 팟캐스트 방송을 전부 삭제하고 광고도 전부 컷했으며, 유재석을 찾아가 새출발을 다짐했다. 그 후 그가 폭력적 언어로 누군가를 비하한 적은 없다. 적어도 사과 한 뒤에는 제정신을 차린듯 싶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다. 안타깝게도 편집장은 사과를 했던 것에 대해서까진 조사를 하지 않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편집장의 태도를 매우 존중한다. 장동민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적어도 이런식으로 했어야했다. 그냥 칼로 푸욱 찌르는게 아니라.
9. 이전에 걸그룹 '러블리즈'의 한 멤버에 대한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간적이 있다. 결국 루머일 뿐,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멤버는 매우 큰 상처를 떠안아야 했다. 대중은 사실이 밝혀진 후 무엇을 했는가? 그 멤버에게 찾아가 울며 사죄라도 했을까? 답은 '아니'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울며 무릎꿇고 사죄해도 모를 판에 떳떳하다고 비판을 한다. 인간의 도리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럼 네티즌들은 어땠는가? 집단 린치를 가한 사람들이 사실이 밝혀지자 모르쇠한다. 어차피 자신이 사실을 왜곡한 '조직'에 알게 모르게 관여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대중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지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10. 최근에는 또 이상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간의 싸움으로 붙은 것이다. 하기야 예상된 것이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자였고, 위에서 언급한 '조직'은 여초 사이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애당초 '여성'비하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싸움은 매우 무의미하다. 그 시간에 본인에 대한 반성이나 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 옹꾸라 방송을 듣는다고 전부 꼴마초인 것은 아니며, 조직을 꾸려 계획적으로 사건을 과장하고 음해한 사람들이 여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이 분들께 '너나 잘하세요..'라고 읖조려주고 싶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해야겠고.
2015년 4월 15일 수요일
나는 편안한 작품이 좋다.
나는 만화나 드라마 등의 작품은 평온한 일상을 담은 것을 좋아한다. 영화라면 한 번 보고 끝나거나, 다음 후속작을 보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긴장감이 넘치는 스릴러나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 만화 혹은 액션 만화 아니면 드라마들은 나오는 텀도 훨씬 짧아 초반엔 재밌지만 화를 거듭할수록 보는 내가 지쳐버린다. 그래서 만화든 영화든 편안한 것을 선호한다. 러브 코미디 물까지는 괜찮다, 그래도....
해서 내가 즐겨보는 일드는 '고독한 미식가'이고, 가장 부담없이 보는 만화는 '요츠바랑!'이다. '아즈망가 대왕'도 그렇고 아즈마 키요히코의 작품은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 좋다.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소재를 찾아내서 그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평범함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테고...
생각해보면 나는 요리를 만드는 것도 편안한 것이 좋다. 화려함에 치중하는 것도 물론 보는 맛이 있지만, 보기에도 편안한 요리는 마음까지 진정시켜주는 느낌이다. 수프와 빵이 먹고 싶다.
벤 스틸러의 트로픽 썬더
잘도 이런 정신나간 영화를!
트로픽 썬더의 굵직한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감독이자 주연인 벤 스틸러, 잭 블랙, 로버트 나우니 주니어, 매튜 매커너히, 톰 크루즈.....
그러나 이 배우들이 정상적인 인간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뭐 매커너히가 맡은 릭 정도면 괜찮다 싶겠지만...
최고의 배우들로 이루어진 B급 영화...를 디스하는 액션 코미디 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냥 생각없이 보기에 좋은 킬링 타임 영화이다. 4chan이나 9gag, reddit등을 슬쩍 건드려본 사람이라면 이 미국식 유머 코드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길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이 웃기다.
이 모든 백미를 장식하는 것은 아무래도 톰 크루즈.... 인데 욕을 지껄이는 것이나, 춤을 추는 것이나 뭐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연기가 없다. 씬 스틸러의 충격을 선사한다. 여하튼 재미있는 작품.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히어로란 어떤 존재인가?
'원펀맨'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아마 두,세번째쯤으로 꼽을(
무면허 라이더는 히어로의 존재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히어로는 무릇 적의 위협으로부터 시민과 세계를 수호해야 한다. 설령 자신이 지거나 심지어 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히어로이다. 이것이 무면허 라이더의 히어로관이다. 이는 다른 만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가 그러한 존재. 적의 위협에 맞서 시민과 세계를 수호하는 '빛의 히어로'이다. 캡틴의 이미지는 바르기 그지없다. 또한 그는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맞써 싸우던 자로, 그 정의로운 명분마저 충분하다. 그러나 캡틴이 당도한 현재에서는 어떤가? 전쟁은 끝났고, 나치도 없다. 히어로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무면허 라이더의 세계에는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시민들을 죽이고 건물을 부순다. 그렇게에 분명한 '악'이다. <원펀맨>의 세계에는 과거에는 착한 사람이었으나 비극적 운명을 거쳐 악당이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산파의 이야기가 (아직까지는)없다. 소년만화 of 소년만화이기 때문. 그러나 다른 히어로의 세계는 어떤가?
앞서 말한 무면허 라이더 외에, '다크나이트'로 대표되는 배트맨과 외톨이같은 로어셰크가 있다. 이 외 마블의 대표적 두 히어로인 캡틴과 아이언맨. 이들의 세계는 어떤가? .... 이렇게 내가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또 늘었다. 언제 다 보느냐가 문제.....
모노반, 청산
밴드 '모노반'의 앨범, <청산>. 앨범명이 대놓고 앨범 스포. 1번 트랙이 교과서에서 이과인들을 괴롭히던 고려시대의 '청산별곡'을 노래로 재해석한 것이다.
2015년 4월 12일 일요일
벚꽃놀이 후기
이번주가 벚꽃놀이의 끝물인 것 같아, 더 늦기전에 벚꽃을 구경하러 다녀왔다. 장소는 경기도청. 좀 더 한적한 물향기 수목원이나 광교호수공원을 갈까 하다가, 이 두 곳에는 벚꽃이 없거나 적은 관계로... 사람이 많은 경기도청으로 향했다. 가기 전, 수원역 AK에서 먹을 걸 샀다. 츄러스와 에끌레어는 사서 바로 먹어버리고, 롤과 만두는 포장해서 챙겨갔다. 나는 역시 초딩 입맛인지라 달달한 디저트들을 질리지도 않고 잘 먹어치웠다. 달콤함에 흡족해하며 버스를 탔다.
길이 밀렸는데도 10여분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걸어서 갔어도 되었을 법한 거리. 내려서 보니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사람도 많고 개도 많고... 오늘이 경기도청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 많이 온 듯 했다. 역시 벚꽃놀이는 평일에 가야 한적하게 놀 수 있구나. 그 때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늦은터라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경기도청 주변에는 벚꽃나무들이 굉장히 많다. 길을 따라 화성으로 쭈욱 내려가는데도 벚꽃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인도에는 벚꽃나무, 산과 맞닿은 도로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이어져 피어있었다. 비록 사람들에 치이기는 했지만 예쁜 풍경이었다. 이래서 벚꽃을 보러 오는구나. 동행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초입까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돗자리가 하나 둘씩 펴지더니, 대부분이 잔디밭에 누워버렸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 수록 사람들이 적어져서 나중에는 제법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시간 즈음 걷다보니 문득 목이 말라져서 아 음료수 사올걸, 하고 후회할 즈음 화성을 통과했다. 아래턱에 편의점이 있길래 음료수를 사러 들어갔는데, 원래는 순수하게 음료를 사려고 했던 것이 그만 아이싱을 사고 말았다. 결국 3시부터 술을 한 캔 마셨다. 챙겨간 롤과 만두도 괜찮았다. 특히 만두는 불 맛이 났다. 표면을 보니 센 불에 볶은 것 같지는 않고, 시즈닝을 넣은 것 같은데 아무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맛있게 먹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데 새벽에는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도 혹시나 비가 올까 싶어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볼 벚꽃도 다 봤기도 하고.
그래도 꽃이 지기 전에 봐서 다행이야.
길이 밀렸는데도 10여분만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걸어서 갔어도 되었을 법한 거리. 내려서 보니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사람도 많고 개도 많고... 오늘이 경기도청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더 많이 온 듯 했다. 역시 벚꽃놀이는 평일에 가야 한적하게 놀 수 있구나. 그 때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늦은터라 그냥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경기도청 주변에는 벚꽃나무들이 굉장히 많다. 길을 따라 화성으로 쭈욱 내려가는데도 벚꽃나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인도에는 벚꽃나무, 산과 맞닿은 도로에는 개나리가 노랗게 이어져 피어있었다. 비록 사람들에 치이기는 했지만 예쁜 풍경이었다. 이래서 벚꽃을 보러 오는구나. 동행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길을 따라 걸었다. 초입까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돗자리가 하나 둘씩 펴지더니, 대부분이 잔디밭에 누워버렸다. 그래서 걸으면 걸을 수록 사람들이 적어져서 나중에는 제법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시간 즈음 걷다보니 문득 목이 말라져서 아 음료수 사올걸, 하고 후회할 즈음 화성을 통과했다. 아래턱에 편의점이 있길래 음료수를 사러 들어갔는데, 원래는 순수하게 음료를 사려고 했던 것이 그만 아이싱을 사고 말았다. 결국 3시부터 술을 한 캔 마셨다. 챙겨간 롤과 만두도 괜찮았다. 특히 만두는 불 맛이 났다. 표면을 보니 센 불에 볶은 것 같지는 않고, 시즈닝을 넣은 것 같은데 아무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맛있게 먹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데 새벽에는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도 혹시나 비가 올까 싶어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돌아왔다. 볼 벚꽃도 다 봤기도 하고.
그래도 꽃이 지기 전에 봐서 다행이야.
프롬, MOONBOW
가수 '프롬'의 2집 앨범. 1집이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직 안들어본지라 프롬이라는 가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 <MOONBOW>가 프롬을 처음으로 접하는 앨범이었다.
1번 트랙 '달빛댄싱'에서 흫러나오는 멜로디는 프롬과 다른 솔로 여가수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천천히 전개되다가 후렴구에만 빨라지는 평범하고 뻔한 곡 전개가 아니라, 아예 후렴의 전개를 뒤바꾸어 버리는 방식을 사용한다. 전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독특하다. 발랄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느낌.
그러나 이후 트랙들은 다소 진부한데, 산뜻하고 신선한 멜로디이기는 하나, 꼭 어디선가 들어본 곡처럼 뻔하게 들리기 때문.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고 평범하게 좋다. 앨범의 볼륨을 맞추려다보니 일반적인 진행을 택한 듯 싶다.
진부한 분위기는 6번트랙부터 다시 뒤바뀐다. 다시금 색채가 다양해지고 '봄'에 맞춘 상쾌한 멜로디들이 재생된다. 좀 더 밝은 분위기를 띄면서 독특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후 앨범이 끝날때까지 이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 이제 좀 더 들으면 질리겠다 싶을 즈음에 적절히 끝낸다.
2015년 4월 11일 토요일
벤 스틸러,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of Walter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영화. 이미 이전에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사하면서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예전 작품을 찾아보니 고전이라 그런지 찾기가 힘들다. 안타까울 따음.
내 추억 속 벤 스틸러는 그저 코믹한 아저씨인데, 이런 진지한 연기를 보자니 괴리감이 들었다...
1. 주인공 월터 미티의 대범하지 못한 성격은 작품이 앞으로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 초반의 월터는 전형적 소시민의 모습으로, 기껏 용기를 내어 짝사랑 상태에게 어필을 하려 해도 에러가 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매우 평범한 인물.
2. 이런 소시민적 모습은 그의 상상으로 인해 더욱 비참하게 보이는데... 말이 상상이지 월터의 그것은 판타지아의 영역이다. 이런 판타지와 상반되는 현실은 월터의 소심함을 부각시킨다.
3.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라이프'지의 모토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라이프'지의 모토 그 자체이고, 하나는 월터의 '삶의 목표', 즉 월터가 나아갈 방향이다. 영화 초반에는 라이프지의 모토와 월터의 삶이 동떨어져 있으나 이후 중첩된다.
4. 생일날 받은 것은 여동생을 통해 엄마가 보내준 클레멘타인 케이크. 그리고 '숀 오코넬'이 보낸 지갑 뿐. 축하해주는 동료 사원은 없다. 회사에서의 월터의 지위를 알 수 있음.
5. 영화는 숀 오코넬의 사라진 25번 필름을 찾아다니며 전개된다. 카메라가 탑 뷰로 월터의 이동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기자기 하면서도 영화가 마치 필름의 현상, 인화 과정처럼 보이도록 한다.
6. 중간중간 걸려오는 'e-하모니'의 '토드'의 전화는 영화를 환기시켜 주며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사실 이는 복선의 한 종류인데, 사소하기 때문에 가볍게 영화의 긴장감을 해소시켜주는 역할 정도로 쓰인듯.
7. 월터의 삶은 오코넬을 찾으며 점차 풍요로워 진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윙크를 300개나 받는데, 이미 월터는 필요가 없어진 후.
8. 화면에 문자 텍스트등을 표시하는 기법으로 영화와 관객간의 거리감을 줄이는 방법을 썼다.
9. 월터가 그토록 험하게 구르면서 숀 오코넬을 찾았건만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은 맥거핀... 혹은 월터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장치였다. 애초에 가게에서 멍때리지만 않았어도 개고생은 안했겠지만, 삶의 다른 방식이나 목적 역시 찾지 못했을 것이다.
10. 결말까지 보고나면 전형적 미국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중간 과정이 스릴있기 전개된 미국 영화.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켄드릭 라마의 신보를 듣고
신보 앨범 사진을 찾아보니 앨범사진보다 라마 본인의 사진이 훨씬 많다. 고로 앨범 사진 생략.
이전작보다 비트가 경쾌해지고 빨라졌다. 라마 특유의 분위기가 얕게 베어나온다. 그만큼 분위기가 가볍다. 전작이 화려한 어두움을 나타낸 것 같다면 이번작은 가볍게 잽을 툭툭 던지는 느낌. 그러나 라마가 만들었기에 잽이 어퍼컷만큼의 강력함을 지닌듯.
근데 내 취향은 아님.
이전작보다 비트가 경쾌해지고 빨라졌다. 라마 특유의 분위기가 얕게 베어나온다. 그만큼 분위기가 가볍다. 전작이 화려한 어두움을 나타낸 것 같다면 이번작은 가볍게 잽을 툭툭 던지는 느낌. 그러나 라마가 만들었기에 잽이 어퍼컷만큼의 강력함을 지닌듯.
근데 내 취향은 아님.
예전에도 썼던 주제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을 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컵의 기능은 담는 것이다. 물을 담든 달걀을 담든 컵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를 담지 않는다고 해도 컵이 아닌 것은 아니다. 컵을 그냥 가만히 나둬도, 본도로 벽에 붙여놓아도, 작품을 위해 컵을 이어붙여 인형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컵이다. 컵의 기능을 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컵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컵이 제 용도로 쓰이지 않았을 뿐인데, 최근에는 이 용도마저 애매해지고 있다. 컵의 용도가 정말로 무언가를 담는 것인가? 다른 용도로 써도 컵인데, 꼭 '용도'라는 말로 컵을 한정시켜야 할까? 이 생각은 제쳐두고라도, 컵이 와장창, 깨진 상태인데도 그것을 '컵'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 이상하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컵을 놓쳐 깨뜨려버렸다고 해보자. 친구가 소리를 듣고 달려와 묻는다. '이게 뭐야?' 그러자 답한다. '응. 컵이야. 깨졌어.' 깨져서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컵'이란 칭호는 그 사물에 남아있다. 좀 운치가 있는 사람은 '깨진 컵의 조각들이야'라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컵이란 것을 설명해야 하고, 설명키위해서 그것은 컵이어야 한다. 정확히는, 과거에 한번이라도 컵이었어야 한다.
다른 경우도 있다. 친구가 달려와 조각들을 보고는 '컵이 깨졌네'하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이는 친구가 조각들을 보고 그것이 컵이였음을 추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컵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은 과거에 그 컵을 보았었을 수도 있다. 만일 컵을 과거에 본 적도 없고, 컵이 산산조각나서 가루만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바로 가루들을 보고는 그것이 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규정하는 힘이 계속해서 남아있으려면, 이전에 그것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기억이 남아있거나, 내가 아는 컵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조각들이 갖고 있거나. 만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이상한 이미지의 컵이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컵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다른 경우도 있다. 친구가 달려와 조각들을 보고는 '컵이 깨졌네'하고 바로 상황을 알아차리는 것. 이는 친구가 조각들을 보고 그것이 컵이였음을 추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컵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은 과거에 그 컵을 보았었을 수도 있다. 만일 컵을 과거에 본 적도 없고, 컵이 산산조각나서 가루만 남아있다면, 그 누구도 바로 가루들을 보고는 그것이 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규정하는 힘이 계속해서 남아있으려면, 이전에 그것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기억이 남아있거나, 내가 아는 컵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그 조각들이 갖고 있거나. 만일 내가 생각하지도 않는 이상한 이미지의 컵이 조각이 났다면, 나는 그것이 컵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뒤늦은 <초속 5cm> 리뷰
아니 분명 지난글에서 '초속 5센티미터나 봐야겠다'라고 써놓고 신나게 룰루랄라 영화를 봐놓고는 왜 아직까지 리뷰를 안쓴것일까. 안타깝게도 지금 내 기억속엔 당시 영화를 보았던 감상의 단편이 얼마 없다. 이래서 바로 써야하는데. 멍청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봤던 게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려고 했던거라 분석해둔 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단편적인 느낌밖에 생각이 안난다.
영화는 그 내부에서 3편으로 나누어진다. 나이로 따지면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연애기로 따지면 연애초기, 중기, 말기이다. (사실 말이좋아 연애 중기, 말기이지 실상은 권태기나 다름없다.) 1편의 내용은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오면서 전개된다. 두 초등학생이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를 이야기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등학생이 수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낭만을 뿜어낸다는 것이, 참 대견하다. 아무튼 1편의 전개는 그 낭만적인 대사가 표현하듯, 귀엽고 예쁜 사랑의 이야기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아름답고 예쁜 1편의 사랑을 화사한 봄의 색깔과 새벽 어스름의 청아한 파란빛으로 감싼다. 관객은 그 색깔로 하여금 이 두 학생의 사랑을 머릿속에 좀 더 깊이 각인시킬 수 있다. 분홍과 파랑. 1편의 사랑은 이 두 색깔이다.
2편에서부터는 바로 내리막을 걷는데, 1편과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난다. 여자애야, 남자애가 편지를 보내다가 뚝 끊어버렸으니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지만, 남자애가 편지를 갑자기 끊어버린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 때문에 남자의 태도에 거센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게다가 이런 남자의 성격은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동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를 더욱 애처롭게 하는 것은 남자 곁에서 맴돌며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여동급생. 고백을 하려 하지만 남자의 시선에 자신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해버리고 만다. 궁금증은 증대된다. 남자는 주변의 여자애를 보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에게 편지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단편적으로만 보면 남자의 행동이 답답한데서 그칠 수 있지만, 더욱 깊숙히 들어가보면 나름의 이유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2편에서 나오는 우주가 바로 남자의 마음상태를 대변하는 부분. 그녀와 함께 우주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그녀와 닿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는 말을 대변하듯이 2편의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3편은 엇갈리는 둘을 보여준다. 남자는 졸업 후 다른 여자와도 연애를 해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나. 그 내면만은 무언가 텅 비어버린 채 인형처럼 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이미 남자를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건설한 상태. 이 둘의 엇갈림은 그 옛날 둘이 어렸던 시절 함께 벚꽃을 보고 돌아가던 기찻길에서 이루어진다. 기찻길은 1편에서나 3편에서나 헤어짐의 길이다. 1편에서는 여자애가 '다음에 또 보러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기차가 지나가버려 모습을 가린다. 3편에서는 서로 엇갈려 걷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열차가 지나가버려서 결국 재회하지 못한다.
생각이 나지않아서 주섬주섬 억지로 기억을 모아가며 쓴거라 글이 좋지 않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한때의 실수로 헤어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전개에 나사가 하나 빠져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스토리와 그림이 잘 맞아떨어져 입소문을 탄 듯.
영화는 그 내부에서 3편으로 나누어진다. 나이로 따지면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연애기로 따지면 연애초기, 중기, 말기이다. (사실 말이좋아 연애 중기, 말기이지 실상은 권태기나 다름없다.) 1편의 내용은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오면서 전개된다. 두 초등학생이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를 이야기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등학생이 수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낭만을 뿜어낸다는 것이, 참 대견하다. 아무튼 1편의 전개는 그 낭만적인 대사가 표현하듯, 귀엽고 예쁜 사랑의 이야기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아름답고 예쁜 1편의 사랑을 화사한 봄의 색깔과 새벽 어스름의 청아한 파란빛으로 감싼다. 관객은 그 색깔로 하여금 이 두 학생의 사랑을 머릿속에 좀 더 깊이 각인시킬 수 있다. 분홍과 파랑. 1편의 사랑은 이 두 색깔이다.
2편에서부터는 바로 내리막을 걷는데, 1편과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드러난다. 여자애야, 남자애가 편지를 보내다가 뚝 끊어버렸으니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지만, 남자애가 편지를 갑자기 끊어버린 이유는 나오지 않기 때문. 때문에 남자의 태도에 거센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게다가 이런 남자의 성격은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동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를 더욱 애처롭게 하는 것은 남자 곁에서 맴돌며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여동급생. 고백을 하려 하지만 남자의 시선에 자신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해버리고 만다. 궁금증은 증대된다. 남자는 주변의 여자애를 보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에게 편지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것일까? 단편적으로만 보면 남자의 행동이 답답한데서 그칠 수 있지만, 더욱 깊숙히 들어가보면 나름의 이유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2편에서 나오는 우주가 바로 남자의 마음상태를 대변하는 부분. 그녀와 함께 우주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그녀와 닿지는 않는다.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는 말을 대변하듯이 2편의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3편은 엇갈리는 둘을 보여준다. 남자는 졸업 후 다른 여자와도 연애를 해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나. 그 내면만은 무언가 텅 비어버린 채 인형처럼 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이미 남자를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건설한 상태. 이 둘의 엇갈림은 그 옛날 둘이 어렸던 시절 함께 벚꽃을 보고 돌아가던 기찻길에서 이루어진다. 기찻길은 1편에서나 3편에서나 헤어짐의 길이다. 1편에서는 여자애가 '다음에 또 보러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기차가 지나가버려 모습을 가린다. 3편에서는 서로 엇갈려 걷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열차가 지나가버려서 결국 재회하지 못한다.
생각이 나지않아서 주섬주섬 억지로 기억을 모아가며 쓴거라 글이 좋지 않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한때의 실수로 헤어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전개에 나사가 하나 빠져있다. 영화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스토리와 그림이 잘 맞아떨어져 입소문을 탄 듯.
2015년 3월 6일 금요일
당췌 나는 영화에 집중할수가 없다.
아니 그것보다도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왜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막상 가서 표 끊고 입장하면 재밌게 잘 볼텐데, 영화관까지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오만가지 생각이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징징거린다. 왠지 영화를 보면 후기를 적어야할 것 같고... 하나를 보면 다른 작품들을 계속 봐야만 할 것 같고.... 완벽주의의 강박관념이 내 머리를 콕콕 찔러온다. 아니, 눌러온다. 그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결국 영화관으로 가려뎐 마음은 하얗게 산화되어버린다.
이런 심리는 최근 개봉작일수록 더하다. 옛날 작품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사던 빌리던 내 컴퓨터로 가져와서 볼 수 있는데,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작품들은 그렇지가 않다. 시간에 구애받는다. 장소에 구애받는다. 구애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냥 영화를 포기해버리는 쪽을 선택한다. 거기에, 남들이 다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작품은 일부러 보지 않는 꼬인 심리까지 더해져서 결국 최근 개봉작들을 줄줄이 놓치고 말았다.
아 그래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자유롭게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하하. 초속 5센티미터나 봐야겠다.
이런 심리는 최근 개봉작일수록 더하다. 옛날 작품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사던 빌리던 내 컴퓨터로 가져와서 볼 수 있는데, 영화관에서 상영중인 작품들은 그렇지가 않다. 시간에 구애받는다. 장소에 구애받는다. 구애받는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냥 영화를 포기해버리는 쪽을 선택한다. 거기에, 남들이 다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작품은 일부러 보지 않는 꼬인 심리까지 더해져서 결국 최근 개봉작들을 줄줄이 놓치고 말았다.
아 그래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자유롭게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 하하. 초속 5센티미터나 봐야겠다.
Loro's, W.A.D.N.Y
작년 발표된 로로스의 앨범. 지난해 들었던 앨범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앨범. 로로스는 우선 락밴드이지만, 노래에서 드러나는 색깔은 우리가 생각하는 짜릿한 락이 아니라 하나의 서정시같은 느낌이다. 이 앨범 역시 마찬가지로, 곡 하나하나가 여러 운율이 어우러져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것들이 모아져 하나의 서사시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웅장한 앨범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고, 영웅담에 어울릴법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아니라 몇개의 소규모의 악기들이 내뿜어내는 울림이 강렬한 앨범이다. 정말 예쁘게, 아름답게 강렬하다.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부산 여행 후기.
24일부터 26일까지 2박 3일로 부산을 다녀왔다. 생에 두번째로 가보는 부산이었는데, 지난번에 갔었을 때는 돈도 시간도 빡빡해서 뭣하나 제대로 즐기지를 못했었다. 패키지 여행을 떠난 느낌이라 돌아와서도 영 개운치 못했는데, 이번에는 여유롭게 다녀온 덕에 많이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어느 지역을 여행하던간에 늘 그 지역의 맛거리를 중시한다. 누군들 안그러겠느냐마는 어느새인가 여행의 주제가 식도락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좋다. 다만 가끔 내 자신이 너무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에 빠져들뿐... 그래도 맛있게 먹는다.
숙소가 해운대 근처 호텔이었기 때문에 해운대 근처로 놀러나갈까 생각을 했는데.. 일정을 짜보다 보니 서면과 남포 중심으로 일정이 갖춰졌다. 결국 해운대에서는 먹고 마시고 바다보는 게 전부였음^0^
출발은 수원에서 했다. 우리 집 근처에는 기차가 다니는 곳이 없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 용산과 수원. 같이 가는 일행이 화성에 살기에 수원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오전 8시 45발 기차였는데, 혹시나 늦잠을 잘까봐 전날 일직 잠에 든 탓인지 너무 일찍 일어나버렸고,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파트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흰 고양이의 애교를 받고 춥고 쌔까만 거리를 걸어가는데, 이렇게 새벽녘에 집을 나선게 얼마만인지, 초등학생때 성당에 가느라 늘 이 새벽에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거리는 어둠 속에 빛을 받아 은은했다. 풍경을 기억한 채 갈아타기 위해 가산역에서 내리자 어느새 아침이 밝아 하늘이 온통 퍼래졌다. 수원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상가들이 이제 막 개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침 열차를 타기 위해 티비 앞에서 쌔까맣게 모여있는 사람들이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수원역은 AK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AK는 오전 10시 즈음에 개장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야 역 상가들도 개장하겠거니 했는데 던킨도너츠는 이미 가게를 연 후 였고, 뒤따라서 다른 가게들도 아침을 맞고 있었다. 세상에 가게들이 이렇게나 빨리 여는구나,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때마침 배가 고팠기 때문에 던킨에서 아침 머핀을 사먹었다. 일행과 합류해 40분에 기차를 탔다.
수원역에서 부산역까지는 5시간이 걸린다. 어지간히 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꾸준히 깨어있기 힘든 시간이다. 그래서 나도 잤다. 친구도 잤다. 간간히 깨어나면 가져온 과자를 까먹고 다시 잤다. 그래도 부산은 마냥 멀었다. 다음번에는 그냥 ktx를 타고 오자... 아니 비행기를 타고 오자... 그런 말을 나누었다. 잠깐 지금 손이 시려워서 다음에 이어서 다시 써야겠다.
나는 어느 지역을 여행하던간에 늘 그 지역의 맛거리를 중시한다. 누군들 안그러겠느냐마는 어느새인가 여행의 주제가 식도락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좋다. 다만 가끔 내 자신이 너무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에 빠져들뿐... 그래도 맛있게 먹는다.
숙소가 해운대 근처 호텔이었기 때문에 해운대 근처로 놀러나갈까 생각을 했는데.. 일정을 짜보다 보니 서면과 남포 중심으로 일정이 갖춰졌다. 결국 해운대에서는 먹고 마시고 바다보는 게 전부였음^0^
출발은 수원에서 했다. 우리 집 근처에는 기차가 다니는 곳이 없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 용산과 수원. 같이 가는 일행이 화성에 살기에 수원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오전 8시 45발 기차였는데, 혹시나 늦잠을 잘까봐 전날 일직 잠에 든 탓인지 너무 일찍 일어나버렸고,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파트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흰 고양이의 애교를 받고 춥고 쌔까만 거리를 걸어가는데, 이렇게 새벽녘에 집을 나선게 얼마만인지, 초등학생때 성당에 가느라 늘 이 새벽에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거리는 어둠 속에 빛을 받아 은은했다. 풍경을 기억한 채 갈아타기 위해 가산역에서 내리자 어느새 아침이 밝아 하늘이 온통 퍼래졌다. 수원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상가들이 이제 막 개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침 열차를 타기 위해 티비 앞에서 쌔까맣게 모여있는 사람들이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수원역은 AK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AK는 오전 10시 즈음에 개장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야 역 상가들도 개장하겠거니 했는데 던킨도너츠는 이미 가게를 연 후 였고, 뒤따라서 다른 가게들도 아침을 맞고 있었다. 세상에 가게들이 이렇게나 빨리 여는구나,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때마침 배가 고팠기 때문에 던킨에서 아침 머핀을 사먹었다. 일행과 합류해 40분에 기차를 탔다.
수원역에서 부산역까지는 5시간이 걸린다. 어지간히 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꾸준히 깨어있기 힘든 시간이다. 그래서 나도 잤다. 친구도 잤다. 간간히 깨어나면 가져온 과자를 까먹고 다시 잤다. 그래도 부산은 마냥 멀었다. 다음번에는 그냥 ktx를 타고 오자... 아니 비행기를 타고 오자... 그런 말을 나누었다. 잠깐 지금 손이 시려워서 다음에 이어서 다시 써야겠다.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2015년 2월 14일 토요일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오랜만에 정치글.
노 전 대통령이 서거 후, 비이상적인 열풍이 일어나면서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재평가했고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이 기이한 현상은 곧 각종 언론사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당시 노무현을 비판했던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비판을 넘어서 질타조차 서슴치 않았던 진보언론들 역시 호된 비난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지금, 그 진보언론들은 어떠한가? 경향신문을 비롯,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와 같은 진보언론들은 보수언론들과 날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는 이전의 김영삼, 김대중 때보다도 더욱 입장차가 완고해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싸움 및 이념이 번져나가 물들인 세대간 갈등과 지역갈등, 빈부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노무현의 서거 이후로 더욱 심화되었다. 왜 어째서 사람들은, 심지어는 노무현을 질타했던 이들좌 왜 그의 죽음에 이렇게 갑작스런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인가?
얼마전 당대표로 당선된 문재인 대표는 많은 이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를 따르는 움직임을 보인 원인에 대하여 1. 노통이 죽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노통의 진정성을 깨닫게 되었다. 2. 노통 정권이 부정되어가면서 후퇴되어가는 것들-복지나 민주자유 등-을 보면서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니 그런데, 자살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만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로 말미암아 1,2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자살'이라는 키워드는 한국 사회에서 비극적 이미지를 갖는다. 하긴 어느 나라든지 안그렇겠느냐마는, 한국 사회에서는 공인의 자살까지 비극적 주제로 쓰인다는 말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이는 곧 이 큰 열풍을 불러오게끔 했다. 결국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여 민주당은 노 정권 직후 노무현의 모든 것을 버리려고 했으면서도, 서거 이후에는 '노무현의 뒤를 잇겠다'라는 자세로 급변하게 되었다. 이 스탠스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하다면 노통은 왜 대통령 임기 동안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도 대부분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이는 곧 강남 좌파라 불리는, 노 정권 때 급부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남 좌파는 쉽게 말해 '배부른 좌파'를 말한다. 이념적으로는 진보 성향을 띄면서, 진보당원으로 활동하고, 진보당에게 지원금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 생활면으로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럭셔리 라이프를 살고 있는, 생활면으로는 진보와 거리가 먼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참 모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 한국인의 대부분이 이념적으로는 진보적이면서 생활은 보수적인 것을 생각하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델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로는 복지나 노동과 관련되어 진보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학원을 보내며, 재산을 더욱 불리기 위해 애쓴다. 아니 그러면 진보적인 삶은 아이를 막대하고, 돈에 욕심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가? 그게 가능해? 물론 진보적 삶은 그게 아니다. 리버벌한 삶은 보다 자유를 꿈꾼다. 아이를 굳이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마음가짐도 없고, 먹고 살 만큼의 재산 외에는 더욱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진보적 삶일 터이다. 아 근데 왤케 길어지지 하려는 애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다음에 계속....
얼마전 당대표로 당선된 문재인 대표는 많은 이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를 따르는 움직임을 보인 원인에 대하여 1. 노통이 죽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노통의 진정성을 깨닫게 되었다. 2. 노통 정권이 부정되어가면서 후퇴되어가는 것들-복지나 민주자유 등-을 보면서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니 그런데, 자살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만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로 말미암아 1,2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자살'이라는 키워드는 한국 사회에서 비극적 이미지를 갖는다. 하긴 어느 나라든지 안그렇겠느냐마는, 한국 사회에서는 공인의 자살까지 비극적 주제로 쓰인다는 말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이는 곧 이 큰 열풍을 불러오게끔 했다. 결국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여 민주당은 노 정권 직후 노무현의 모든 것을 버리려고 했으면서도, 서거 이후에는 '노무현의 뒤를 잇겠다'라는 자세로 급변하게 되었다. 이 스탠스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하다면 노통은 왜 대통령 임기 동안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도 대부분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이는 곧 강남 좌파라 불리는, 노 정권 때 급부상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남 좌파는 쉽게 말해 '배부른 좌파'를 말한다. 이념적으로는 진보 성향을 띄면서, 진보당원으로 활동하고, 진보당에게 지원금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 생활면으로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럭셔리 라이프를 살고 있는, 생활면으로는 진보와 거리가 먼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참 모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 한국인의 대부분이 이념적으로는 진보적이면서 생활은 보수적인 것을 생각하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델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로는 복지나 노동과 관련되어 진보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학원을 보내며, 재산을 더욱 불리기 위해 애쓴다. 아니 그러면 진보적인 삶은 아이를 막대하고, 돈에 욕심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가? 그게 가능해? 물론 진보적 삶은 그게 아니다. 리버벌한 삶은 보다 자유를 꿈꾼다. 아이를 굳이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마음가짐도 없고, 먹고 살 만큼의 재산 외에는 더욱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진보적 삶일 터이다. 아 근데 왤케 길어지지 하려는 애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다음에 계속....
2015년 2월 11일 수요일
짬뽕.
나는 원래 짬뽕보다는 자장면을 선호한다. 자장면은 가끔 생각날때마다 중국집을 가서 먹든, 자장라면을 해먹든 먹는 편이나, 짬뽕은 잘 먹지도 않고 생각날때도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어딜가서 짬뽕을 먹을 일이 있으면 대부분 남기기 십상. 저번에 갔던 연경에서 짬뽕을 그마만치 남긴 것도 아마 내가 짬뽕을 잘먹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제 술을 마셔셔 그런지 오늘은 짬뽕이 너무 끌렸다. 짬뽕. 그 두글자에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두근거렸던 것도 처음이었다. 결국 점심시간에 학교 앞 중국집으로 가서 시켜먹었다. 아...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짬뽕그릇을 전부 비워내었다. 내가 먹은 최고의 맛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당기지도 않더니... 너란 짬뽕...
2015년 2월 7일 토요일
차이나타운을 다녀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바글바글... 그래도 명동이나 신촌같은 서울의 명소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는 충분히 많았다. 그것도 동화마을로 가는 골목이나 경찰서 쪽으로 건너가는 길목에는 사람이 없이 조용했는데, 화덕만두 가게가 집중적으로 늘어선 골목이나 유명 중국 레스토랑 앞에만 사람들이 들어차, 그곳만 소란스럽고 왁자지껄 했던 것이 꼭 체하는 기분이었다. 차이나타운도 그 많은 가게들 중에서 방금 말한 이곳, 가게들이 싹 다 몰려있는 삼거리 근처 가게들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을 보고 어딜가나 사람들 심리는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근처에서 사먹었다만...
항구 근처라 그런지 날씨는 꽤 쌀쌀했다. 열차에서 내린 직후에는 얇고 조그마한 비가 똑똑 내리기도 했다. 얼마 안가서 그치기는 했지만 확실히 날이 더 추워지는 데에는 어느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채 젖지도 못해 검게 적셔지다가 만 회색 시멘트 바닥 위라서 그런지 더 추운 기분. 셔츠에 니트까지 입고 갔지만 결국 겉옷으로 입고 간 야상의 앞 지퍼마저 모조리 올리고 말았다.
동화마을은 커플들로 가득했다. 사랑이 넘치는 동화마을 전경에 어린아이들은 다소 밀려난 모습이었다. 누구를 위한 동화인가. 그렇다고 볼 것이나 찍을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결국 동화마을을 슥 한번 둘러보고는 자유공원을 향했다.
자유공원은 더 추웠다. 높아서 그런걸까. 마침 바람도 제법 강하게 불어서 추위를 타는 나와 일행의 앞으로는 연을 날리고 있는 부자도 있었다. 실타래에 감긴 실을 풀었다 당겻다하는 방식으로 날리는 전통적인 연은 참 오랜만에 보았다. 아들이 먼저 연을 높이 올린 후에 연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하늘을 구경하고 있으면 아빠가 다른 연을 들고 그 옆에 다가가 서로 높이를 비교하고는 했다. 좋은 풍경이었다. 추웠지만.
이 글을 쓰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유명 음식점인 연경에 들어갔다. 주문한 메뉴는 삼선짬뽕. 하얀 자장면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짬뽕을 시킨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짬뽕은 우선 참 희한했다. 이상한것이 아니라 희한했다. 짬뽕에 새우튀김이 올려져있다. 새우가 아니라 튀김이. 먹으면서도 아니 왜 튀겨서 올리는걸까 의아했다. 그리고 면을 맛본 순간, 아... 이건 차이나타운이라서 잘 팔리는 것 뿐이구나... 그냥 학교 앞 중국집에서 먹는 것이랑 똑같은데... 어딜가나 그렇지만 역시 장사는 맛이 아니라 언플과 광고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뼈저리게 느낀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서운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과두주와 칭따오를 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화덕만두는 먹을만 하더라.
항구 근처라 그런지 날씨는 꽤 쌀쌀했다. 열차에서 내린 직후에는 얇고 조그마한 비가 똑똑 내리기도 했다. 얼마 안가서 그치기는 했지만 확실히 날이 더 추워지는 데에는 어느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채 젖지도 못해 검게 적셔지다가 만 회색 시멘트 바닥 위라서 그런지 더 추운 기분. 셔츠에 니트까지 입고 갔지만 결국 겉옷으로 입고 간 야상의 앞 지퍼마저 모조리 올리고 말았다.
동화마을은 커플들로 가득했다. 사랑이 넘치는 동화마을 전경에 어린아이들은 다소 밀려난 모습이었다. 누구를 위한 동화인가. 그렇다고 볼 것이나 찍을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결국 동화마을을 슥 한번 둘러보고는 자유공원을 향했다.
자유공원은 더 추웠다. 높아서 그런걸까. 마침 바람도 제법 강하게 불어서 추위를 타는 나와 일행의 앞으로는 연을 날리고 있는 부자도 있었다. 실타래에 감긴 실을 풀었다 당겻다하는 방식으로 날리는 전통적인 연은 참 오랜만에 보았다. 아들이 먼저 연을 높이 올린 후에 연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하늘을 구경하고 있으면 아빠가 다른 연을 들고 그 옆에 다가가 서로 높이를 비교하고는 했다. 좋은 풍경이었다. 추웠지만.
이 글을 쓰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유명 음식점인 연경에 들어갔다. 주문한 메뉴는 삼선짬뽕. 하얀 자장면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짬뽕을 시킨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짬뽕은 우선 참 희한했다. 이상한것이 아니라 희한했다. 짬뽕에 새우튀김이 올려져있다. 새우가 아니라 튀김이. 먹으면서도 아니 왜 튀겨서 올리는걸까 의아했다. 그리고 면을 맛본 순간, 아... 이건 차이나타운이라서 잘 팔리는 것 뿐이구나... 그냥 학교 앞 중국집에서 먹는 것이랑 똑같은데... 어딜가나 그렇지만 역시 장사는 맛이 아니라 언플과 광고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뼈저리게 느낀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서운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과두주와 칭따오를 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화덕만두는 먹을만 하더라.
2015년 2월 5일 목요일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좋게 말하면 낭만이 들어있는 책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륜을 포장해놓은 책. 어쨌거나 책은 매우 좋다. 내로남불이기는 하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끊어지는 줄거리는 시마무라가 다시 국경의 터널을 지나 눈의 고정, 설국으로 가서야 이어진다. 시마무라의 개인적 감상과 고마코와의 대화가 줄거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작가 가와바타의 섬세한 표현력과 묘사가 경지에 다른 수준이다. 때문에 시마무라의 감상과 표현은 (그가 서양무용 연구가이기는 하지만)바로 작가 데뷔를 해도 될 정도. 고마코와의 대담은 평온하면서도 가끔씩 터져나오는 애잔함이 안쓰럽다.
2015년 2월 1일 일요일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2014년 최고의 영화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영화, <보이후드>. 지난해 영화를 거의 안보다시피 한 탓에 이 영화 역시 거르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영화를 감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중후반까지 긴장을 끌고가다가 후반부에 그 맥이 풀리면서 인생에 대한 환기를 시켜주는 전개로 흐른다. 긴장은 대부분 새 아빠 두명의 꼰대스러움(...)으로 인해 생성된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꼰대라는게 얼마나 답이 없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혹은 엄마와 친부 사이의 긴장감도 있는데 이는 후반부에 해소가 되는데다가 크게 일어나지도 않으니 패스. 후반부 해소는 메이슨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얻으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본 영화는 흐르는 인생에 대한 영화이다. 감독도 이를 드러내기 위해 1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촬영했으니, 그 노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만일 중간에 감독이 불의의 일을 당해 에단 호크가 스피커폰을 이어 받았다면 영화의 색이 또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 링클레이터가 의도한 인생의 환기는 영화에 매우 깊은 숨을 불어넣어 준다. 다만 러닝타임이 3시간 가까이 되다 보니 조금 지루함을 느낀다.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물도 아니고, 일상을 3시간 동안 보여주다 보니, 영화 속 긴장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질리는 감이 있다.
추가로 인생에 대한 소년의 여정뿐만 아니라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괴리, 부모로서의 도리 등이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데, 특히 부모가 자식을 낳고 기르고 독립시키는 과정에서의 허망함까지 다 드러나 있다보니 부모님들에게 보여줘도 아주 좋은(?) 영화가 될 듯. 좋다기보다 공감이 매우 될 듯.
2015년 1월 31일 토요일
나의 독서에 대한 소고.
포풍 블로그짓을 오늘은 이 글로 끝내려고 한다. 요즘 독서가 고민이다. 책을 읽으려고 손에 잡으면 일단 읽히기는 하는데 그게 오래가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책을 손에 잡는 빈도도 적어졌다. 전에 죄와 벌을 읽을 때에는 한 달 가까이 걸렸다. 한 달. 학기중이니 읽을 시간이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은 방학인데, 영 많이 읽지를 못한다. 그래서 요즘 책 읽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책이 나를 좀먹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책을 향한 집착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느낌, 생각이다. 그래서 그냥 놓기로 했다. 내가 싫다는데 뭐...
심판의 밤 - 1부
"...믿지...."
1942년 세계가 제 2차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고 있는 때에, 한 여객선이 희뿌연 안개를 헤치며 바다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고 있다. 수면 가까이 자욱하게 깔린 안개 덕분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여객선은 나침반과 노련한 항해사의 기술에 의존하여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않아..."
안개 사이로 여객선의 갑판이 보이고, 그 위에는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선 채 "믿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람은 하나 불지 않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깔린 습기로 인해 날이 추웠던지라, 남자는 목을 입고있는 긴 트렌치 코트 안으로 들이밀어놓고는 팔짱을 힘껏 쥐고 있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은 초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동공은 풀려 있는 것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남자는 몇 초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더니 금세 잠에서 깨어난듯 몸을 푸드덕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에는 온통 안개가 맺어놓은 물방울 맺힌 난간과 선장실 벽 뿐이었다.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리둥절해 한다. 이윽고 자신의 상황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서 왔었지? 이름은? 온갖 의문점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남자의 질문이 점점 깊숙히 빠져들 무렵, 갑자기 누군가가 남자의 앞에 나타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옆으로 넘겼으며 수염은 깔끔하게 잘라낸 모습의 신사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흰 셔츠에 검은 자켓을 걸쳤는데, 자켓의 모양이 으레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입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이 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선원일 것이다.
"랜서 씨?"
"예?"
선원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선원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찾던 남성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가, 곧 안정을 찾았다. 그래, 나는 랜서구나. 랜서였다. 랜서는 여러가지 의문 중에서 적어도 자신의 이름만은 해결했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랜서는 끼던 팔짱을 풀고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의 온기가 그의 두 손을 감쌌다.
"식사 시간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선원은 랜서를 배 안으로 안내했다. 랜서도 두 말 않고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좁다란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내려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큰 식당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다. 식당에는 이제 막 도착한 랜서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과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 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테이블들은 흰색 보로 덮여있었고, 그 위에는 와인잔과 그릇들이 엎어진 채로 놓여져 있었다. 승객들은 꼭 몇 명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배에 혼자 탑승한 것은 랜서뿐인 듯했다. 아니 근데, 정말 내가 이 배에 혼자 탑승한게 맞을까? 랜서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 뻔 했으나, 한 여자아이가 떨어뜨린 인형을 주워주느라 곧 그 의문을 잊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자."
인형을 받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랜서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식당 문을 나갔다. 랜서는 이 모든 모습이 낯설었고 희한할 뿐이었다. 전혀 익숙치 않은 풍경이었다. 그저 조용히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를 벗어 선원에게 건넬 뿐이었다.
"랜서 씨 인가요?"
방황하는 랜서의 뒤로 살집이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턱이 두 개일 정도로 살이 붙어있었으며 덩치도 컸다. 머리는 전부 뒤로 넘겨서 이마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신의 몸에 맞게 입은 옷일지는 모르겠으나, 흰 셔츠에 노란 니트를 입었고, 붉은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세로로 줄무늬가 그려져있는 자켓을 입고 있었다. 잘 입은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돈이 꽤나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예... 그런데요...?"
"전 포터라고 합니다. 여기에 앉으시죠!"
어리둥절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랜서에게 포터는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랜서는 포터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저 포터라는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랜서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으나 포터는 곧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랜서에게 소개시켜주기 시작했다.
"끝에 앉아 계신 남성 분은 '스탠리' 씨 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계신 여성 분은 스탠리 씨의 비서인 마틸다 씨죠."
포터의 소개가 끝나자 스탠리와 마틸다가 랜서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인가요? 아니면 미국으로 떠나시는 길인가요?"
"미국으로... 떠나는 길일겁니다... 아마도..."
랜서는 마틸다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도 그럴것이, 정작 자신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단편이 아예 사라진 느낌이었다. 갑판에서 정신을 차리기 이전의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랜서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위화감을 계속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결국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에서 랜서는 소극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대화가 오고 갔고, 랜서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랜서는 그 모든 의문에 짜증이 났다. 전부 집어치우고 싶었다. 점차로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순간 배의 선장이 랜서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선장은 키가 큰 편이었고, 호리호리한 몸에 제복을 딱 맞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이가 좀 들어보였는데, 선장의 흰 턱수염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빠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밖에 안개가 가득 깔려 있어서 항해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 연안에는 독일군의 유보트가 매복해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죠."
배가 지나가는 곳은 독일군의 유보트 출몰 지역이었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독일군은 오직 적과 아군만을 생각했을 뿐, 민간인이라는 제 3자를 염두해 두지 않았다. 때문에, 독일군은 유보트를 이용하여 민간 여객선을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자 승객들은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포터가 침묵을 깨고 이야기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뒤로 합시다. 여기 랜서 씨도 오셨으니까요."
포터는 선장을 돌려 보낸 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띄워놓기 위해 모두를 바라 본 후, 제안을 했다.
"우리 각자의 출신지를 이야기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전 맥시코에서 왔습니다. 랜서 씨, 랜서 씨는 어디에서 오셨죠?"
질문을 받은 랜서는 당황했다. 출신지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갑판 이전의 일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출신지가 기억날리가 만무했다.
"전... 프... 프랑...."
랜서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답을 끄집어냈다. 본인도 속으로 놀라고 있었으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요?" 포터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그게 기억이....아, 프랑.... 프랑크푸르트일겁니다."
"그렇다면 독일 출신이신가요?"
"예... 그렇죠..."
랜서는 겨우 자신의 출신지를 생각해내었다. 프랑크푸르트. 어쩐지 더욱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럼 독일은 언제 떠나셨다요?" 마틸다가 물었다.
"아 그게...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러나 랜서는 고향만이 기억날 뿐, 그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껏 이름과 고향을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던 아까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지만, 랜서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대화할 자신이 없어졌다. 말을 섞을수록, 질문에 대답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고, 자기 존재에 대해 의심이 커져갔다. 결국 랜서는 자리를 떴다. 식당 문을 열고 나와 철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던 도중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식당 문을 뒤돌아본다음 다시 계단을 마저 내려가 숨을 내뱉었다. 그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안개 이슬이 조그맣게 맺힌 차가운 철제 벽에 등을 댄 채, 랜서는 가만히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작 기억난 것이라고는 이름과 고향 뿐이었다. 랜서는 이런 상황에 짜증이나 화가 나기 보다는 점점 간절해졌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존재하는 것인가? 대답에 대한 답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갑판을 내달리며 기쁨의 포효라도 내지를 기분이었다. 랜서가 몇 분 쯤 가만히 바다를 내다보며 자신의 기분을 곱씹고 있을 때에, 철계단에서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계단을 다라 내려오고 있었다. 랜서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틸다가 있었다. 마틸다는 곧장 계단을 내려와 랜서의 앞을 지나 배의 복도를 지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랜서는 마틸다를 보더니 다시 의문에 차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마틸다 씨... 혹시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랜서가 마틸다를 보았을 때, 의문에 가득찬 그것은 바로 낯설지 않은 느낌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이전에 본 것 같은 느낌. 그것이 그의 머릿속을 다시 엉망친창으로 만드려 하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상하다는 듯, 랜서의 눈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아뇨. 처음 보는걸요?"
"저기... 무례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당신이 굉장히... 친숙해요. 익숙하고..."
"음, 그건 다행이네요."
"아니요, 그게... 다정한 느낌이 아니라, 오랫동안 바라본 느낌이란 말입니다."
랜서는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며 힘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힘든 것은 마틸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아가부터 랜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 중 하나인 줄 알았으나, 랜서의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마틸다는 눈을 약간 찡그랜 채 랜서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 배에 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눈을 떠보니 제가 배 위에 서 있었어요. 제가 언제 어디서 배를 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전... 맘소사...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랜서는 허공에 눈을 맞춘재 손을 입술에 대고 말을 이었다.
"제 이름과 고향은 기억나는데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집은 어딘지, 가족들은 누군지, 직업은 뭔지..."
대답을 들은 마틸다는 랜서의 상태가 확실히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제 그녀는 랜서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드려고 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잠시 쉬는 게 좋겠어요. 방으로 돌아가셔셔 한 숨 주무시는게..."
"... 잠깐만요."
마틸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랜서는 갑자기 머리에 번뜩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랜서는 바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마틸다에게 말했다.
"유보트... 그게 기억이 나요. 우리 배는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는 랜서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는 눈을 부릅떴으나 동공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제 인상을 확실히 찡그리고 답했다.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모두가 그걸 주의하고 있어요."
"아니요, 확실해요. 왜인지 그게 기억이 납니다."
이름과 고향 밖에 기억이 나질 않더니, 이젠 유보트라니! 랜서는 자신의 기억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지만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것이란 사실에는 확신이 들었다. 왜 유보트가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랜서의 머릿 속에는 배가 유보트의 공격을 받고 좌초하는 그림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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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 <The Twilight Zone>, 한국명칭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 번 글로 옮겨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애먹는 중...
"...않아..."
안개 사이로 여객선의 갑판이 보이고, 그 위에는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어 선 채 "믿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람은 하나 불지 않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깔린 습기로 인해 날이 추웠던지라, 남자는 목을 입고있는 긴 트렌치 코트 안으로 들이밀어놓고는 팔짱을 힘껏 쥐고 있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로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은 초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동공은 풀려 있는 것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남자는 몇 초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더니 금세 잠에서 깨어난듯 몸을 푸드덕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에는 온통 안개가 맺어놓은 물방울 맺힌 난간과 선장실 벽 뿐이었다.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리둥절해 한다. 이윽고 자신의 상황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어디에서 왔었지? 이름은? 온갖 의문점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남자의 질문이 점점 깊숙히 빠져들 무렵, 갑자기 누군가가 남자의 앞에 나타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옆으로 넘겼으며 수염은 깔끔하게 잘라낸 모습의 신사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흰 셔츠에 검은 자켓을 걸쳤는데, 자켓의 모양이 으레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입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이 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선원일 것이다.
"랜서 씨?"
"예?"
선원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선원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찾던 남성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가, 곧 안정을 찾았다. 그래, 나는 랜서구나. 랜서였다. 랜서는 여러가지 의문 중에서 적어도 자신의 이름만은 해결했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랜서는 끼던 팔짱을 풀고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의 온기가 그의 두 손을 감쌌다.
"식사 시간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선원은 랜서를 배 안으로 안내했다. 랜서도 두 말 않고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좁다란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내려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큰 식당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다. 식당에는 이제 막 도착한 랜서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과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 하는 승객들이 있었다. 테이블들은 흰색 보로 덮여있었고, 그 위에는 와인잔과 그릇들이 엎어진 채로 놓여져 있었다. 승객들은 꼭 몇 명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배에 혼자 탑승한 것은 랜서뿐인 듯했다. 아니 근데, 정말 내가 이 배에 혼자 탑승한게 맞을까? 랜서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 뻔 했으나, 한 여자아이가 떨어뜨린 인형을 주워주느라 곧 그 의문을 잊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자."
인형을 받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랜서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식당 문을 나갔다. 랜서는 이 모든 모습이 낯설었고 희한할 뿐이었다. 전혀 익숙치 않은 풍경이었다. 그저 조용히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를 벗어 선원에게 건넬 뿐이었다.
"랜서 씨 인가요?"
방황하는 랜서의 뒤로 살집이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턱이 두 개일 정도로 살이 붙어있었으며 덩치도 컸다. 머리는 전부 뒤로 넘겨서 이마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자신의 몸에 맞게 입은 옷일지는 모르겠으나, 흰 셔츠에 노란 니트를 입었고, 붉은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었으며 세로로 줄무늬가 그려져있는 자켓을 입고 있었다. 잘 입은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돈이 꽤나 있어보이는 사람이었다.
"예... 그런데요...?"
"전 포터라고 합니다. 여기에 앉으시죠!"
어리둥절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랜서에게 포터는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랜서는 포터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저 포터라는 사람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랜서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으나 포터는 곧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랜서에게 소개시켜주기 시작했다.
"끝에 앉아 계신 남성 분은 '스탠리' 씨 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계신 여성 분은 스탠리 씨의 비서인 마틸다 씨죠."
포터의 소개가 끝나자 스탠리와 마틸다가 랜서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인가요? 아니면 미국으로 떠나시는 길인가요?"
"미국으로... 떠나는 길일겁니다... 아마도..."
랜서는 마틸다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도 그럴것이, 정작 자신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단편이 아예 사라진 느낌이었다. 갑판에서 정신을 차리기 이전의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랜서는 바로 그것에서부터 위화감을 계속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결국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에서 랜서는 소극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대화가 오고 갔고, 랜서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랜서는 그 모든 의문에 짜증이 났다. 전부 집어치우고 싶었다. 점차로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순간 배의 선장이 랜서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선장은 키가 큰 편이었고, 호리호리한 몸에 제복을 딱 맞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이가 좀 들어보였는데, 선장의 흰 턱수염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빠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밖에 안개가 가득 깔려 있어서 항해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 연안에는 독일군의 유보트가 매복해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죠."
배가 지나가는 곳은 독일군의 유보트 출몰 지역이었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독일군은 오직 적과 아군만을 생각했을 뿐, 민간인이라는 제 3자를 염두해 두지 않았다. 때문에, 독일군은 유보트를 이용하여 민간 여객선을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자 승객들은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포터가 침묵을 깨고 이야기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뒤로 합시다. 여기 랜서 씨도 오셨으니까요."
포터는 선장을 돌려 보낸 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띄워놓기 위해 모두를 바라 본 후, 제안을 했다.
"우리 각자의 출신지를 이야기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전 맥시코에서 왔습니다. 랜서 씨, 랜서 씨는 어디에서 오셨죠?"
질문을 받은 랜서는 당황했다. 출신지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갑판 이전의 일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출신지가 기억날리가 만무했다.
"전... 프... 프랑...."
랜서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답을 끄집어냈다. 본인도 속으로 놀라고 있었으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요?" 포터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그게 기억이....아, 프랑.... 프랑크푸르트일겁니다."
"그렇다면 독일 출신이신가요?"
"예... 그렇죠..."
랜서는 겨우 자신의 출신지를 생각해내었다. 프랑크푸르트. 어쩐지 더욱 아련한 느낌이었다.
"그럼 독일은 언제 떠나셨다요?" 마틸다가 물었다.
"아 그게...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러나 랜서는 고향만이 기억날 뿐, 그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껏 이름과 고향을 기억해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던 아까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지만, 랜서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대화할 자신이 없어졌다. 말을 섞을수록, 질문에 대답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고, 자기 존재에 대해 의심이 커져갔다. 결국 랜서는 자리를 떴다. 식당 문을 열고 나와 철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던 도중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식당 문을 뒤돌아본다음 다시 계단을 마저 내려가 숨을 내뱉었다. 그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안개 이슬이 조그맣게 맺힌 차가운 철제 벽에 등을 댄 채, 랜서는 가만히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작 기억난 것이라고는 이름과 고향 뿐이었다. 랜서는 이런 상황에 짜증이나 화가 나기 보다는 점점 간절해졌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존재하는 것인가? 대답에 대한 답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갑판을 내달리며 기쁨의 포효라도 내지를 기분이었다. 랜서가 몇 분 쯤 가만히 바다를 내다보며 자신의 기분을 곱씹고 있을 때에, 철계단에서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계단을 다라 내려오고 있었다. 랜서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틸다가 있었다. 마틸다는 곧장 계단을 내려와 랜서의 앞을 지나 배의 복도를 지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랜서는 마틸다를 보더니 다시 의문에 차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마틸다 씨... 혹시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랜서가 마틸다를 보았을 때, 의문에 가득찬 그것은 바로 낯설지 않은 느낌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이전에 본 것 같은 느낌. 그것이 그의 머릿속을 다시 엉망친창으로 만드려 하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상하다는 듯, 랜서의 눈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아뇨. 처음 보는걸요?"
"저기... 무례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당신이 굉장히... 친숙해요. 익숙하고..."
"음, 그건 다행이네요."
"아니요, 그게... 다정한 느낌이 아니라, 오랫동안 바라본 느낌이란 말입니다."
랜서는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며 힘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힘든 것은 마틸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아가부터 랜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 중 하나인 줄 알았으나, 랜서의 얼빠진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마틸다는 눈을 약간 찡그랜 채 랜서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 배에 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눈을 떠보니 제가 배 위에 서 있었어요. 제가 언제 어디서 배를 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전... 맘소사...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랜서는 허공에 눈을 맞춘재 손을 입술에 대고 말을 이었다.
"제 이름과 고향은 기억나는데 그 외의 것들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집은 어딘지, 가족들은 누군지, 직업은 뭔지..."
대답을 들은 마틸다는 랜서의 상태가 확실히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제 그녀는 랜서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드려고 할 지경이었다.
"세상에... 잠시 쉬는 게 좋겠어요. 방으로 돌아가셔셔 한 숨 주무시는게..."
"... 잠깐만요."
마틸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랜서는 갑자기 머리에 번뜩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랜서는 바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마틸다에게 말했다.
"유보트... 그게 기억이 나요. 우리 배는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는 랜서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는 눈을 부릅떴으나 동공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마틸다는 이제 인상을 확실히 찡그리고 답했다.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모두가 그걸 주의하고 있어요."
"아니요, 확실해요. 왜인지 그게 기억이 납니다."
이름과 고향 밖에 기억이 나질 않더니, 이젠 유보트라니! 랜서는 자신의 기억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지만 유보트의 공격을 받을 것이란 사실에는 확신이 들었다. 왜 유보트가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랜서의 머릿 속에는 배가 유보트의 공격을 받고 좌초하는 그림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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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 <The Twilight Zone>, 한국명칭 <환상특급>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 번 글로 옮겨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애먹는 중...
내가 예전에는 무슨 글을 쓰고 살았었더라?
기억이 안난다 정말. 무슨 글을 썼었는지, 어떻게 썼었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으니 정말 쓸 글이 없다.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사색에 잠긴 것도 아닌... 하루. 음악은 계속 듣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그런데 정말 예전에는 무슨 정신으로 글을 썼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감을 잃어버린 것일까. 과거의 나를 복습해야 하는 것일까. 2014년으로 되돌아가서 나의 역사를 곱씹어보며 감을 되찾아야 하는가보다. 이와중에 벌써 2월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말 예전에는 무슨 정신으로 글을 썼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감을 잃어버린 것일까. 과거의 나를 복습해야 하는 것일까. 2014년으로 되돌아가서 나의 역사를 곱씹어보며 감을 되찾아야 하는가보다. 이와중에 벌써 2월이 시작되었다.
2015년 1월 27일 화요일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감상문
‘액자’라고 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다. 작게는 예술
작품, 특히 미술 작품을 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액자가 있고 크게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테두리를
형성하는 거대한 액자가 있다. 이 액자에 걸린 작품은 그 시대의 사상이나 관념 등을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유희를 뽐낸다. 액자는 이를 외부와 분리시켜
작품이 순수하게 그 자체로써 존재하도록 규정짓는다. 또한 작품으로 하여금 ‘예술’로 규정을 짓기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액자 안에 있는 것은 자연스레 예술로 인식을 하면서, 액자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거나 혹은 관심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액자의 역할이다.
액자에 담긴 미술작품은 각각 존재하는 개별자인 동시에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동일체이다. 액자에 담김으로써 그 밖의 다른 세계와는 ‘분리’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관조자마저도 미술작품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액자는 그림과 관조자의 직접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데, 관조자를 포함한 외부 세계는 차단시키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관조자의 정신은 그의 삶이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또한 액자의 테두리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에 있어서 강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순이다. 예술에 관여하는 것은 이러한 액자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자극’이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조각상에 덮인 천이나, 콘서트의 서치라이트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는 주관적 감상마저도 이 자극에 들어간다. 칸트는 이 자극에 대하여 부정적인 스탠스를 취하면서, 자극에 의해 미가 증대된다는 것은 오류이며 자극은 되려 순수한 취미판단을 저해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극을 이물질이라는 성가신 존재 그리고 없어야 좋은 존재에 비유했다. 반면 자크 데리다는 자극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자극은 작품의 가장자리로써 작품에 내재하는 것이며 때문에 작품의 구성요소로 보았다.
우리 주변의 테두리를 인식하는 것은 낯설고 이색적인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는 우리도 모르게 그저 멋대로, 마음에 드는 대로 선택하는 것들이 수두룩하고 이러한
선택은 매 순간마다 찾아온다. 하물며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어떤가? 나는
예술작품의 작은 테두리, 나아가서는 시대문화적인 큰 테두리를 인식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감상하는 것은 거의 그림 그 자체들이다. 누구도
액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술관은 어떤지 말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점묘법을 사용하여 안개 낀 밤 풍경을 묘사한’작품이라는 설명은 들었어도 ‘날카롭게 조각된 나무모양의’액자라는 설명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액자가 바로 작품을 순수하게 가두어놓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니, 나의
생각보다 그것은 미술작품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지켜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세상과 단절시키는 그것은 비단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는 한다. 가령
우리가 매 순간마다 선택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시대관념적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테두리가 들어간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우리는 늘 머릿속에 각자의 고유한 액자를 들고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마땅한 작품이 보이면 그 액자 안에 가두어
놓고 평가하며 만족해한다. 이는 예술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 큰 연결고리가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의 예술작품들은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 작품 외적인 요소들과 작품이 결합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어차피 액자는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므로, 작품이 언제까지나 그
액자 안에 갇혀있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자연적이지 못한 일이기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칸트가 보기에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액자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가해지는 자극 또한 포함되는데, 데리다는 자극 또한 작품의 한 요소로써 보고 있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뉘는데, 현대의 예술 작품들은 작품과 자극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극이 작품이 되거나 작품을 넘어서 주가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칸트가 본다면 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애초에 작품과 자극을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과 외적인 것은 액자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작품과 작품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대결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물론 그리스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각색한 이야기일 테지만), 제욱시스는 작품을 방해하는 천, 즉 자극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바로 작품에 속한 요소였다. 파라시우스는 자극을 작품의 요소로 생각하여 그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칸트는 계속해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작품의 요소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자극을 작품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칸트는 작품의 요소와 작가의 의도 모두를 거부하고 있기에 유동적이지 못한 입장으로 보인다. 액자에 관한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으니, 나중에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면 그때는 액자 모양과 더불어 작품을 감싸고 있는 각종 조명들이나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봐야겠다. 그것이 정말로 작품과 나의 자연성을 이어줄 지 궁금하다. 이제 좀 더 재미있는 관람시간이 되지 않을까.
액자에 담긴 미술작품은 각각 존재하는 개별자인 동시에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동일체이다. 액자에 담김으로써 그 밖의 다른 세계와는 ‘분리’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관조자마저도 미술작품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액자는 그림과 관조자의 직접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데, 관조자를 포함한 외부 세계는 차단시키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관조자의 정신은 그의 삶이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또한 액자의 테두리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에 있어서 강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모순이다. 예술에 관여하는 것은 이러한 액자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자극’이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 조각상에 덮인 천이나, 콘서트의 서치라이트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더 좋아 보인다는 주관적 감상마저도 이 자극에 들어간다. 칸트는 이 자극에 대하여 부정적인 스탠스를 취하면서, 자극에 의해 미가 증대된다는 것은 오류이며 자극은 되려 순수한 취미판단을 저해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자극을 이물질이라는 성가신 존재 그리고 없어야 좋은 존재에 비유했다. 반면 자크 데리다는 자극에 대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자극은 작품의 가장자리로써 작품에 내재하는 것이며 때문에 작품의 구성요소로 보았다.
칸트가 보기에 강제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액자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가해지는 자극 또한 포함되는데, 데리다는 자극 또한 작품의 한 요소로써 보고 있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뉘는데, 현대의 예술 작품들은 작품과 자극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극이 작품이 되거나 작품을 넘어서 주가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칸트가 본다면 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애초에 작품과 자극을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과 외적인 것은 액자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작품과 작품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대결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물론 그리스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각색한 이야기일 테지만), 제욱시스는 작품을 방해하는 천, 즉 자극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바로 작품에 속한 요소였다. 파라시우스는 자극을 작품의 요소로 생각하여 그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칸트는 계속해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작품의 요소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자극을 작품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칸트는 작품의 요소와 작가의 의도 모두를 거부하고 있기에 유동적이지 못한 입장으로 보인다. 액자에 관한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으니, 나중에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면 그때는 액자 모양과 더불어 작품을 감싸고 있는 각종 조명들이나 흘러나오는 음악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봐야겠다. 그것이 정말로 작품과 나의 자연성을 이어줄 지 궁금하다. 이제 좀 더 재미있는 관람시간이 되지 않을까.
2015년 1월 19일 월요일
월간소녀 노자키군
남들이 그렇게 재밌다길래 혹해서 본 작품인데 재밌당.
애니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건데 자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봐서 다행스런 마음도 든다. 무엇보다 본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특징은
히로인의 다양한 표정... 히로인이 사는 것도 왜인지 힘든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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